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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계의 '바비 진달' 키우기, 한국계는...

[김동석의 뉴욕통신] 오바마, 한국계 최준희 백악관 초청

미국의 정치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양당제에서 당을 통해서 권력을 접수하지만 일단 백악관을 차지하면 대통령은 누구든지 직접 국민을 상대하려고 한다. 때문에 만2년 동안의 대선 캠페인 기간동안 국민들로부터 검증된 정책이 당의 정책을 우선하게 된다. 대통령이 선거전에서 민심을 정확하게 읽었다면 연임에 성공을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4년을 넘기는 일도 고통이다.

국민들은 취임하는 대통령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모든 미디어는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를 일정기간 유보해 준다. 이것을 100일 동안의 ‘허니문 기간(honeymoon term)’이라고 한다. 모든 대통령은 선거전에서 나타난 민심을 기본으로 국정운영의 틀을 만들어서 국민에게 알리고 의회를 설득하며 모든 행정부서에 지침을 내리게 된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임무는 이 100일까지이다.

2000년, 선거에서는 졌지만 대통령이 된 조지 부시 공화당 권력은 그야말로 어리둥절했다. 백악관을 접수한 텍사스 사단은 100일 동안의 허니문 기간을 우왕좌왕 넘기고 말았다. 예비경선에서 부터 온갖 비방과 흑색선전을 무기로 선거를 치루었고, 정치이념이나 철학에 있어서도 종교적 근본주의에 정치세력을 접목시키느라 공화당의 정통 이념인 보수주의를 변질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허니문 기간이 지나고 또 다른 100일이 지나갔다. 모든 미디어는 부시 대통령의 국정철학이나 방향이 무엇인지 헷갈린다고 연일 아우성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 9.11테러가 터졌다.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안전을 위해서 미국 제일주의, 패권적 일방주의를 내세웠다. 바로 이때에 부시대통령의 경쟁자였던 ‘존 맥케인’의 휘하에 움츠리고 있던 소위 네오콘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부시 행정부 전면에 나섰다. 네오콘들의 ‘위기감 조성과 유지’의 전략으로 부시 대통령은 연임대통령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국민의 민심을 읽는 데서 행정부의 정책의 기초를 두는 그런 민주주의 정치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연임이었지만 대통령 역사상 인기최하위의 기록을 세우면서 거의 쫓겨나다시피하면서 백악관을 떠났다. 2006년 중간선거전부터 공화당은 선거마다 연전연패했다.

권력을 빼앗긴 공화당이 새로운 활로를 궁리했다. 풀뿌리 민심(공화당 지역조직)에 지난날의 과오를 사죄하지 않으면 한 치의 전진도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지난 1월 마지막주말 버지니아에서 공화당원 컨퍼런스가 열렸다. 공화당의 지도부는 이민자의 창의적인 자력갱생 리더십만이 “당”을 살릴 수 있다고 인정하고 고백했다. 공화당도 흑인을 당의장으로 뽑았고 선출직 지도자로 30대의 인도계 출신 루이지애나 주지사인 ‘바비 진달'을 추켜 세웠다. 미국내 인도계 커뮤니티가 ‘바비 진달’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고 있다. 인도계 이민자들이 미국을 살릴 수 있겠다고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인도계는 '바비 진달'을 공화당의 오바마라고 이름을 만들어서 전국적으로 유포시켰다. 심지어는 민주당내 인도계들이 공화당으로 들어가서 ‘바비 진달’을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인도계가 기가 막히게 기회를 포착했다. 인도계는 2004년 33살의 나이로 연방의회에 진출한 루이지애나의 ‘바비 진달’에게 주목했다. 인도계 지도자들이 뻔질나게 그를 만나러 다녔다. 전국의 인도계는 ‘바비 진달’을 위해서 300만 달러 이상을 모아주었다. LA나 뉴욕의 신문가판대에 모금함이 등장하기도 했다. 2006년 선거에서 88%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를 위한 인도계의 정성은 더욱 극성을 부렸다. 바비 진달은 2007년 주지사 선거전에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30대의 인도계 주지사가 태어났다.

인도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8년 대통령선거전이 시작되면서 전국의 인도커뮤니티는 공화당 지도부에 온갖 압력을 넣었다. 존 맥케인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바비 진달’을 지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이었다. 공화당의 거물이 된 ‘바비 진달’은 연초에 전국의 인도계 지도자들에게 “인도계 커뮤니티의 눈물겨운 지원을 한순간도 잊지 않겠다‘라는 신년 인사장을 발송하기도 했다.

인도계에 ’바비 진달‘이 있다면 한국계엔 '최준희'가 있다. 최준희 에디슨 시장은 갓난 아기때 엄마의 등에 업혀서 미국에 왔다. 세탁업의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부모님에겐 물론이고 주위의 어느 누구에게도 ‘정치’에 대해 물어 볼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권 진출에 대한 집념은 더욱 불타 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는 스스로 찾아 나섰다. 2000년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브래들리 캠프에서 실력을 발휘하여 주류 정치인들의 눈에 들었다. 한인1세들의 특별한 도움이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뉴저지주 민주당내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는 백인 토박이 정치인들의 저지와 방해를 뚫고서 2005년 뉴저지주 에디슨시장 예비경선에서 현직시장을 꺾었다. 전국적인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이를 지켜본 당시 연방 상원의원인 오바마가 파트너쉽을 함께할 것을 요청해왔다. 2005년 오바마가 직접 최준희시장 선거를 지원하러 뉴저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시장직을 거머쥐고 그는 사력을 다해서 에디슨시 개혁을 단행했다. 고질적인 경찰조직을 개혁해서 모든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내는데 성공했다. 2008년 콜로라도 덴버의 민주당 전당대회 아시안 코커스에서 대표연설을 하기도 했다. 전국단위에서 아시안계의 선두자리를 굳혔다.

2월의 세 번째 주말이 시작되는 지난 20일 금요일, 한국계 정치인 최준희 에디슨시장은 오바마대통령의 특별한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향후 자신과 함께 미국을 이끌어 갈 정치적 지도자를 자신이 직접 선정해서 특별하게 초청을 했다. 탁월한 지도력의 정치력을 갖춘 지방자치단체의 주역인 시장을 백악관이 선정한 것이다. 주제는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하여...“이다. 이것은 지난 만 3년 동안에 보여준 최준희 시장의 리더십을 평가한 성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인사회에서 “2세들의 주류사회 진출을 위해서”란 슬로건은 동포사회 어디를 가도 첫 번째로 강조하는 주장이다. 그것을 위해서 모금을 하고 재단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한다고 한다. 바비 진달의 머리카락 정도만 보고서도 벌떼같이 몰려들어 저렇게 거물 정치인으로 키워내는 인도계를 보면서, 혼자 힘으로 끙끙 거리면서 주류 정치권의 문을 열어 제치고 있는 최준희 시장의 마음은 어떨까? 도대체 우리동네 사람들의 주류사회는 어디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금 한인사회에는 최준희 시장에게 정치후원금을 보내는 투자와,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내려고 과외를 시키는 투자가 눈앞에 있다. 개인을 위해서도 필자라면 100% 전자를 택하겠다. 미국의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서 소상하게 이해하는 한국인이라면 지금 서슴없이 최준희에게 투자할 것이 분명하다. 그 투자는 결국 한인들과 한국을 위해 값진 결과를 반드시 낳을 것으로 확신한다.

2005년 뉴저지주 에디슨시장으로 당선된 한국계의 최준희 시장이 오바마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하는 등 민주당의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1월 기자회견 모습 ⓒ 미 뉴저지주 에디슨시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5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다. 최근에는 미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미국의 대선과 총선 및 워싱턴과 지역 정치권 현장에서 시민들의 정치력과 권리신장 운동에 나서면서, 이를 한국과 한인들의 미국내 정치력을 높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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