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분신하며 투신했다. 5월 들어서만 1일 안동대학교 김영균, 3일 경원대학교 천세용씨에 이어 세 번째 분신이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 주부, 고등학생까지 분신대열에 뛰어들어, 10일 성남피혁 윤용하, 18일 주부 이정순, 보성고 김철수씨 등이 분신하며 공안통치에 죽음으로 항거했다.
1991년 5월 분신정국은 4월 28일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 군이 집회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면서 촉발됐다. 잇따른 분신과 20만~30만 명씩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시위대열에 노태우 정권은 극한 위기에 몰렸다. 정권 최대의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권은 5월 7일 고위당정회의, 8일 청와대 치안관계대책회의를 열고 분신배후에 대해 철저히 수사를 하라고 지시한다
5월8일 노태우 정권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박홍 서강대 총장이었다. 박홍 총장은 이날 낮 12시30분쯤 교내 메리놀 강당에서 김기설씨 분신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자청하며 "지금 우리사회에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우리는 이 세력의 실상을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총장은 "고귀한 생명을 파괴해서라도 이념을 실천하겠다는 젊은이들의 사상적 황폐함과 이들의 죽음을 묵인하고 조장하는 사회분위기도 어둠의 세력을 돕고 있다"며 "좌익이든 우익이든 생명을 담보로 싸움을 벌이는 쪽은 인간존엄성을 뿌리째 파괴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총장은 "부모의 자식임을 거부하고 조국의 아들이라며 죽음의 길로 달려간 젊은이의 심정이 안타깝다"면서 "그러나 생명을 파괴하는 분신은 건설적인 사회개혁의 수단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박총장은 '정말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해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확답했다.
16년전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한 박홍 서강대 이사장이 지금 어떤 말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 ⓒ연합뉴스 5월10일 <조선일보>가 즉각 박 총장 주장에 화답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이날자 '박홍총장의 경고'란 사설을 통해 "서강대의 박홍 총장은 8일 이 대학 구내에서 발생한 김기설씨 분신자살 사건과 관련해서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배후에 분명히 죽음을 조종하는 선동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며 "우리는 박총장이 어떤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못한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자살 소동에는 무언가 자연스럽지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의문점이 개재한다는 점을 강하게 느낀다"고 박 총장 주장에 공감을 표시했다.
사설은 이어 "또 항상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왔고,지금도 그런 소신에 변함이 없을 박총장이 오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파탄적-비지성적 소란을 보며 책임있고 교육자다운 용기있는 발언을 하고 있는 데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며 거듭 공감을 표시했다.
사설은 "오늘의 우리 사회는 어찌된 셈인지 양식을 가진 인사들의 발언조차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강단에서 부모의 심정이 되어 '불쌍한 사람은 부모밖에는 없으니 제발 그런 죽음은 하지 말라'면서 '그렇게 죽어서는 열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한 대학교수가 학생들의 배척을 받은끝에 스스로 교단을 떠나야하는 시대이며,소신을 말한 박총장 자신이 규탄서명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회"라며 박 총장을 적극 감싸며 "대신 운동권 학생들에 동조해서 가두시위를 하고 구호를 외쳐대는 교수들이나, 시국선언에 서명하는 교수들이 행세하는 사회"라고 민주화진영을 비난했다.
사설은 이어 "그런 세태 풍조 속에서 박총장의 발언은 더욱 의미있는 것이다. 그는 자살한 김씨의 배후세력을 '전염병균같은 이들'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은 그늘에서 엄청난 힘을 갖고 자신도 죽고,남도 죽이는 물귀신 공법으로 물 마시듯 폭력을 점염시키고 있다'고 규탄했다"며 "분신은, 사상과 행동의 혼돈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거짓 이념과 영웅환상을 고취하고 있는 죽음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 죽음 찬미의 자살 증후군"이라며 죽음의 배후가 있음을 강조했다.
사설은 "자살과 시신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죽음의 세력이 있다면 생명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점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또 바로 그같은 인간가치 파괴의 행태는 국민의 동정과 지지를 받기도 어렵다"며 "그리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정말로 필요한 우리 사회의 건전한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마저 모두 왜곡시키고 퇴색시키지 않을까 박총장과 함께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닷새 뒤인 5월15일에는 이한빈 김두현 김성열 엄규진 장하구 하영기씨 등 자유지성 3백인회 공동대표 6인이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들은 현사태를 불안스럽게 여기고 있다"며, 박 총장이 언급한 어둠의 세력과 관련,"자살 특공대설이 이제 낭설만은 아닌듯하다"며 이를 기정사실화했다. 이들은 "과거 월남 승려들의 연쇄분신 자살로 야기된 정정불안이 마침내 월남의 공산화를 자초했다"며 "이제 한국이 이데올로기 환상에 젖은 젊은 학생,근로자들의 분신자살을 선동하는 불순세력의 거점으로 된듯하다"며, 노태우 정부에 대해 안보적 차원에서의 강력대응을 주문했다.
결국 분신한 김기설씨와 함께 전민련 활동을 하던 강기훈씨가 공안세력으로부터 '어둠의 배후'로 몰려 징역 3년의 형을 받고 꼬박 형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13일 16년전 대필이 분명하다고 판정을 내렸던 국과수가 대필이 아니라는 정반대 판정을 내림으로써 강기훈씨는 비로소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년전 그를 '어둠의 배후'로 몰았던 박홍 현 서강대 이사장은 아무 말도 없으며, 공안정국을 부채질했던 <조선일보>는 14면에 "강기훈씨, 유서 대필 안했다"는 제목의 2단짜리 기사로 짤막하게 처리하는 데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