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인세, 굶주린 북녘 어린이 위해..."
유서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지 말고 통일 이뤄 잘 살기를"
지난 17일 타계한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이 생전에 북녘의 굶주린 어린이들을 위해 인세를 써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장례위원회는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달라'는 내용의 유서가 자택에서 발견됐다"고 18일 밝혔다. 유서에는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말고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과 시신을 화장해서 집 뒷산에 뿌려달라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가 각각 60여만 부나 팔리는 성공을 거뒀지만 고인은 모든 인세를 자선단체에 기부했고 고인이 소유한 것은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5평 남짓한 오두막집이 전부였다. 고인은 생전에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오두막도 없애 자연상태로 돌려놓고 자신을 기념하는 일을 하지 말하고 당부해왔다.
앞으로 고인이 쓴 1백여편의 동화를 통해 생기는 인세는 생전에 절친했던 정호경 신부, 최완택 목사, 박연철 변호사가 관리, 고인의 유지대로 북녘 어린이들을 돕는 데 쓰일 예정이다.
고인은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인 1946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지만 빈곤으로 인해 가족들과 헤어져 어렸을 때부터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와 가게의 점원 등을 하였다. 그러다가 19세에 결핵에 걸려 늑막염, 폐결핵, 방광결핵, 신장결핵 등을 앓으며 대구, 김천, 상주, 문경을 떠돌며 걸식을 하다가, 196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하여 그 마을의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종지기가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는 교회 뒤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살며 1백여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생전에 고인은 등단할 때를 제외하곤 모든 상을 거절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1995년 아동문학가 윤석중씨가 고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새싹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오두막으로 직접 상패와 상금을 가져오자 다음 날 우편으로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염무웅 교수는 생전의 고인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근대화가 덜된 사람’"이라고 말했고, 신경림 시인은 "깊은 산속의 약초 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생전에 고인은 산문집 <우리들의 하나님>에서 이런 가르침을 남겼다.
"사는 거야 어디서 살든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 먹은 뱃속의 차이로 인간의 위아래가 구분 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약탈과 살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정신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 아닐까."
고인의 장례위원회는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달라'는 내용의 유서가 자택에서 발견됐다"고 18일 밝혔다. 유서에는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말고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과 시신을 화장해서 집 뒷산에 뿌려달라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가 각각 60여만 부나 팔리는 성공을 거뒀지만 고인은 모든 인세를 자선단체에 기부했고 고인이 소유한 것은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5평 남짓한 오두막집이 전부였다. 고인은 생전에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오두막도 없애 자연상태로 돌려놓고 자신을 기념하는 일을 하지 말하고 당부해왔다.
앞으로 고인이 쓴 1백여편의 동화를 통해 생기는 인세는 생전에 절친했던 정호경 신부, 최완택 목사, 박연철 변호사가 관리, 고인의 유지대로 북녘 어린이들을 돕는 데 쓰일 예정이다.
고인은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인 1946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지만 빈곤으로 인해 가족들과 헤어져 어렸을 때부터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와 가게의 점원 등을 하였다. 그러다가 19세에 결핵에 걸려 늑막염, 폐결핵, 방광결핵, 신장결핵 등을 앓으며 대구, 김천, 상주, 문경을 떠돌며 걸식을 하다가, 196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하여 그 마을의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종지기가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는 교회 뒤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살며 1백여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생전에 고인은 등단할 때를 제외하곤 모든 상을 거절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1995년 아동문학가 윤석중씨가 고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새싹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오두막으로 직접 상패와 상금을 가져오자 다음 날 우편으로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염무웅 교수는 생전의 고인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근대화가 덜된 사람’"이라고 말했고, 신경림 시인은 "깊은 산속의 약초 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생전에 고인은 산문집 <우리들의 하나님>에서 이런 가르침을 남겼다.
"사는 거야 어디서 살든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 먹은 뱃속의 차이로 인간의 위아래가 구분 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약탈과 살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정신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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