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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인혁당 사건은 사법살인이었다"

32년만에 판결 번복 '무죄'.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 등 책임 물어야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조사규명위에 의해 '사법살인'으로 밝혀진 인혁당 재건위 연루자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23일 법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법살인'으로 판결났다.

이는 당시 사법살인에 대한 대법원 등 사법부의 책임을 자인한 것이어서, 사법부는 무죄 판결에 그치지 말고 당시 사법살인에 책임있는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 등 사법계 인사들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아 향후 법원의 대응이 주목된다.

중앙지법 "인혁당 재건위 연루자 8명 모두 무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문용선 부장판사)는 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1975년 긴급조치 1호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이 집행돼 숨진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씨 등 8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사안을 제외한 모든 사안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ㆍ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각 피고인들이 인혁당 재건을 위한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혐의를 비롯해 여정남씨의 민청학련 배후조종 혐의와 송상진ㆍ하도원씨가 북한방송을 청취해 반공법을 위반한 혐의에 대해 무죄를 각각 선고했다.

다만 여정남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중 `반독재 구국선언' 혐의 부분은 다른 재판에 병합돼 유죄 판결이 확정됐고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975년 4월9일 사형집행후 32년만에 법정에서 판결이 번복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용공조작과 사법부의 복종으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 8명의 인혁당 희생자들. ⓒ뷰스앤뉴스


1975년 4월의 학살

인혁당 사법살인은 현대사학자들은 '1975년 4월의 학살'로 부른다.

1973년 10월, 유신체제 아래 최초의 시위가 서울대에서 일어났고 이듬해 1월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됐다. 이에 반발해 4월에 전국의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를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책동으로 돌리고 그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1975년 4월 9일, 대법원 확정판결 직후 20여시간만에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괴수'라 명명한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02년 9월 12일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위원장 한상범)가 "중정은 당시 도예종씨 등 23명에 대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구성, 학생들을 배후 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했지만 위원회 조사 결과 이를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혐의는 모두 피의자신문조서와 진술조서 위조를 통해 조작됐음이 확인됐다"며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정권에 의해 조작된 용공조작임을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피의자신문조서와 진술조서를 조작하는 과정에 중정이 파견 경찰관을 동원해 구타, 몽둥이 찜질,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자행했다"며 "이같은 고문으로 사형이 집행됐던 하재완씨 등 관련자들이 탈장과 폐농양증 등의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또 "재판을 담당한 군사법원 재판부 역시 피고인이 부인한 혐의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하거나 불법적 고문수사에 항의하는 발언을 기록에서 누락시키는 방식으로 공판조서를 허위 작성했으며, 피고인들의 증인 신청을 단 한차례도 받아주지 않거나 가족도 피고당 단 한명만 방청을 허락하는 등 재판과정을 위법하게 진행했다"고 밝혔다.

인혁당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수사팀장 윤모씨는 진상규명위에게 "사건과 관련해 박 대통령의 서명이 담긴 문서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 진술했으며, 담당 수사관도 "이모 국장이 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하고 결재를 받았다는 진술을 다른 수사관으로부터 들었다"고 증언했다.

민복기는 이제 말해야 한다

인혁당 사형집행은 전세계 인권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즉각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같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사법살인에는 박정희 정권은 물론 사형판결을 주도한 군사법원 및 대법원 관련자들의 책임이 크다. 32년만의 판결 번복으로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하기엔 사법부의 역사적 책임이 너무 크다는 얘기다.

특히 1975년 군법정에서 날조된 공판조서를 근거로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지은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의 책임이 크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지배적 평가다.

그의 부친은 대한제국 황실의 척족으로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에 앞장선 친일파 민병석이다. 그 역시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 경성제국대학 법과 졸업 후 40년 경성지방법원 판사, 45년 경성복심법원 판사 등 승진을 거듭하며 친일의 대를 이었다.

박정희 집권 시절에는 1968년 10월부터 78년 12월까지 무려 10여년동안 5, 6대 대법원장을 연임하며 박정희 철권통치를 방조했다. 그의 대법원장 재임기간은 역대 최장수이나 후대 법조인들은 그 시절을 소위 사법부의 '암흑기'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재임기간 중 사법부는 71년의 '사법파동', 72년 유신헌법에 따른 '재임용파동' 등을 거치며 권력의 노예가 됐다. 그는 73년 신년사를 통해 "나라의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구조가 가장 집중적,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신헌법의 본질인 이상 사법권의 존재양식 또한 이에 발맞춰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유신을 예찬하기도 했다.

그는 대법원장 퇴임후에는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고, ▲80~84년 국토통일원 고문, ▲80~88년 국정자문위원, ▲86년 헌정제도연구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 2000년에는 '자랑스런 서울법대인'으로 꼽히기도 했으며, 그가 쓴 법전 등은 지금도 법대생들의 교재로 쓰이고 있다.
박태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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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2 개 있습니다.

  • 13 16
    반박

    박근혜는 배상하고 사죄한 후 자결하라
    아니면 직접 교수대에 오르든지

  • 10 18
    핵으로

    장군님이 원쑤를 갚아주실겨
    얼릉 더 퍼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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