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혁', 프랑스 르네상스 열다!
[아탈리가 말하는 미테랑] <5> 미테랑의 전방위 개혁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프랑수아 미테랑이 1973년 사회당의 슬로건을 ‘삶을 변화시키자’로 정한 것을 비난한다. 그것은 불가능하고 황당한 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이런 비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권하기 훨씬 전부터 그는 좌파의 기대와 이상의 모든 것을 실현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생활이 힘든 수백만 명의 일상생활을 지속적 방식으로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일을 해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프랑스가 어떠했는지 기억한다면 1981년 이래 그의 활동은 프랑스사회와 대부분 프랑스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이바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모든 문제 - 특히 실업문제 - 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의 첫 7년 임기 초반 3년 동안 실행된 핵심 개혁조치들은 두 번에 걸친 임기 동안 자주 들어섰던 좌우동거체제 기간과 엘리제궁을 떠난 뒤에도 절대로 의심받지 않는다.
200년만의 첫번째 좌파 내각
미테랑의 첫 번째 성공은 - 그가 분명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정권을 잡은 좌파를 국회의원 임기 전체에 걸쳐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가 등장하기 전에 프랑스에서 좌파의 집권경험이 2년 이상 계속된 경우는 없었다. 엘리제 대통령궁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좌파는 오직 네 번 정권을 잡았소. 1848년에는 4개월, 1870년에는 코뮌으로 파리에서만 2개월, 1936년에는 1년. 따라서 1789년 이후 지속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첫 번째 좌파 내각이 바로 우리 내각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200년 만에 처음이지!”
그는 이번 집권경험의 성공 여부에 따라 좌파의 쇄신이 좌우된다는 것을 알았다. 집권 초기 그는 이런 말을 되풀이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의 집권이 좌파의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물론 우리는 개혁조치들을 실현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역사에서 권력행사에 효율적이었던 좌파로 기억될 수 있도록 힘쓰며 성공하는 것이오. 공약을 지키고 나라를 그르치지 않는 좌파로 기억되는 것 말이오. 뒤에 내가 아닌 다른 사회당원이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내가 진정 대통령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야당은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면 혼란이 올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4번의 정권교체를 하면서도 별 탈 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당시는 좌파진영에서조차 비판이 쏟아졌지만 사정은 점점 안정됐고, 이제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대단한 변화를 이루었다.
3년 만에 ‘삶을 변화시키다’
첫 번째 정권교체에 성공하기 위해 그는 매우 신속히 중요한 개혁을 실행하고, 극단적 요구를 배제하며, 자급자족적 경제운용으로 엉뚱하게 빠지는 것을 막을 줄 알았다. 이런 목적에서 그는 사람을 선발하고, 간부를 양성하고, 시간을 관리할 줄 알았다. 당장 총선을 실시하려고 결정한 것은 그 혼자였다. 새로운 국회가 소집되자마자 당초 예정했던 중요한 개혁조치들을 개시하리라고 결정한 것도 그 자신이었다. 거기에는 언론매체의 자유화와 지방분권처럼 좌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도 포함되었다. 이런 중요한 개혁조치들이 시작되자 더욱 극단적 조치를 취하기보다 그의 핵심적인 노력을 유럽통합 건설 쪽으로 방향을 정하는 용기를 발휘한 것도 그 자신이었다.
엘리제궁에 도착하자 미테랑은 자신의 모든 측근에게 ‘혁명’이니 ‘위대한 날의 저녁’이니 ‘사회주의’니 ‘자주관리’니 하는 거창한 말들에 기뻐 들뜨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가 보기에 일정을 사전에 정하지 않고 개혁을 실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되면 실망한 유권자들이 우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공산당이 도도하게 처신토록 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계획을 가장 신속하게 실행에 옮겼다.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그 효과를 체감하고, 경제가 회복되어 그 효과가 보완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취임초기 여러 번 반복해 피력했다. 그렇게 해야 그의 두 번째 임기가 가능할 것이었다.
정확히 그렇게 되었다. 첫 3년 동안 실행한 개혁조치들의 규모는 대단했다. 그 자신이 직접 가장 사소한 내용까지 그 조치들의 실행을 살폈다. 내각의 구성원은 야당시절을 지내며 검증한 사람 중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 뽑았다. 늙은 중진들은 모양을 갖추어 물러나게 하고, 탄탄한 행정경험을 가진 가장 젊은 사람들을 승진시켰다. 손에 펜을 들고 모든 명령과 법안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행정업무의 반복되는 쳇바퀴 속에 빨리 빨려들어 무뎌지는 장관들에게 평소 갖지 않는 과감성을 강요했다.
이런 개혁조치들의 목록은 길었고, 처음 공포될 때는 항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의 임기가 끝난 다음 우파든 좌파든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들 개혁조치들은 너무 당연한 것들처럼 여겨져서, 잊고 등한히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주춧돌을 형성하고 있다. 그가 없었다면 이것들은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의 간단한 목록을 작성할 필요가 있다. 예사롭지 않은 한 인물이 바라고, 가능하게 만들고, 그리고 실현한 것의 청사진을 담고 있다.
봉급생활자를 살린 사회복지 개혁
당시 사회복지 부문에서의 불평등은 심각했다. 노동자의 절반은 휴가를 떠나지 못했다. 70만 명의 봉급생활자는 한 해에 40번 이상 밤샘노동을 했다. 노동자의 아이들 대학진학률은 4%에 불과했는데, 회사 중역의 자식들은 4분의 3이나 대학에 진학했다. 4분의 1에 해당하는 젊은이가 전문기술교육을 받지 못하고 교육기관을 떠났다. 평균수명은 남자의 경우 겨우 70세였는데, 노동자들은 훨씬 낮았다. 그들은 대부분 퇴직하고 5년 안에 죽었다.
미테랑은 60세 정년제, 주 39시간 근무, 제5주째 유급휴가, 노동조건 개선, 세입자와 집주인의 균형적 관계 유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10년 유효 갱신가능 체류증명서 발급 등을 실행했다. 이는 많은 사람의 생활을 바꾸었다. 마침내 봉급생활자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좌파 기득권 포기한 지방분권
헌법을 수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그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상원의 거부 때문에) ‘7년 임기의 위대한 사업’은 지방분권화였다. 지방출신 선량으로서 국가가 파견한 니에브르 도지사의 족쇄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선량들에게 현지 집행권의 전권을 부여하는 것을 원했다. 릴르 시와 마르세유 시의 시장을 수상과 내무부 장관에 각각 임명했다. 그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파리의 막강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종식시키려는 각오가 대단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26개의 법률과 250개의 명령을 거쳐야 하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 조항은 그가 스스로 작성한 것들이다. 어떤 장관들은 자기들의 행정수단이 사라지게 될까 불안해 반대했고, 어떤 정치적 동지들은 이 혁명적 조치가 대다수 지방에서 우파에 권력을 주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비록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될지라도 개혁을 바라는 것은 좌파의 영광이다. 여성들의 투표권이 없었다면 좌파는 1946년 이후 권력을 계속 가졌을 것이다. 그래도 레옹 블룸은 이런 개혁을 인정했다. 지방분권도 같은 문제를 야기한다. 같은 대답을 주어야 한다.”
끝으로 그는 얼마가 지난 뒤 나라의 정치생활을 깊게 변화시키는 두 가지 결정을 실행하도록 했다. 1985년에는 겸직제한 조치를 지키도록 하고, 1990년에는 정당의 자금조달이 마침내 합법적이 되도록 체계화했다.
사형제 폐지, 동성연애자 인권보호...소수자 보호
풍습에 관하여 상당수의 막연한 바람을 정당한 규범으로 바꿈으로써 많은 사람의 삶을 편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6년 전 <자유, 자유들>을 집필하며 많은 밤을 지새우면서 이들 규범을 정리했다. 그리하여 동성연애자들을 겨냥한 차별을 폐지하고 - 당시 동성연애는 형법 소관의 범죄였다 - 여성의 권리를 대폭 향상시켜 사회보장기금에 의한 임신중절비용 환불을 승인할 정도였다.
모두 알다시피 그는 우선 혼자서 사형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심했다. 로베르 바댕테르 - 그는 1981년 이전 사형제 폐지 지지자 중 가장 열렬한 가담자였다 - 의 귀중한 도움을 받아 우선 상원이 찬성표를 던지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사형제폐지는 실질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결국 자크 시라크도 사형제 폐지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조치가 아직도 이 나라에서 인기가 있는 야만행위를 종식시킨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활동은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법 분야에서 비록 그가 구속제도와 재판진행의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고, 재범을 방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안전과 자유법’, ‘반기물파괴자법’ 등과 같은 인권에 위배되는 수많은 법조문의 폐지를 단행하도록 했다. 그는 국가 보안재판과 상설 군사재판을 폐지하도록 했다. 유럽 인권재판소에 개인이 재판을 의뢰할 수 있는 권리를 도입하도록 했으며, 공익근무형의 창설을 승인하도록 했고, 손해배상의 신속화, 피해자의 권리 강화, 가난한 사람들의 사법서비스 이용, 사법적 통제의 강화 등을 용이하도록 했다.
교육개혁
교육에 관해서는 고등교육 개혁, 기술직업교육 법률계획, 우선 교육지구 신설, 차별교육, 과목별 수준집단, 교육기관의 자율권, 고등학교의 생활, 금전적‧인적 보충수단 투명화, 그리고 수학기간 연장 등을 단행하도록 했다. 연구에 새로운 수단과 지침서를 부여하여 예산상의 중요한 우선분야가 되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장-피에르 슈벤망이 정한 목표(한 학년의 80%가 대입자격시험 합격자가 되도록 함)를 비판했다:
“이렇게 많은 합격생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빵 만드는 사람 또한 필요한 법이다!”
방송의 국가독점 종식
방송 분야에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의 국가독점을 종식시켰다. 이 개혁조치 - 지방분권과 마찬가지로 - 가 좌파보다 우파에 더 유리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단행했다. 1981년, 프랑스는 수십 개에 이르는 보잘 것 없는 불법 라디오 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경찰을 보내면서 여전히 권력이 통제하는 3개의 공영방송에 옹색하게 방송을 맡기고 있었다. 바로 이때 프랑수아 미테랑은 1,600개의 라디오 방송과 2개의 새로운 텔레비전 방송 설립을 허가했다. 그는 방송에 광고를 허용하고 유선방송과 위성방송의 개발을 지원했다. 비록 그는 이런저런 젊은 야심가들이 자유 운운하며 대규모 그룹을 설립하는 것을 보기 싫어하고, 젊은이들을 이용하여 물려받은 재산을 불리는 사람을 경멸했지만, 전파를 시민에게 개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종종 “큰돈을 벌게 되는 몇몇 인물 뒤에는 젊은이들의 노력이 가려져 있다”고 말했다. 1985년 7월 각료회의에서 그는 자신의 정책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개인적으로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독점을 깨부수고 싶었습니다. …방송을 통한 의사표시가 공영방송에만 한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이데올로기는 기자들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자본주의 이윤의 이데올로기와 일치합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우리가 말하는 동안 케이블 방송들이 생겨나고 위성방송들이 준비 중입니다. 앞으로 프랑스는 외국으로부터 수십, 수백의 영상과 방송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공영방송을 구하려면 그것을 민영방송과 동거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변화에 돌입하는 것은 후회할 일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 앞에 서는 것이 후회할 일이 아닌 것처럼…. 기술이 그렇게 강요하기 때문에 자꾸 새로운 물건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런 결정을 내림으로써 목전의 이익과 신념을 져버렸다는 점도 압니다. 우리는 돈의 위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은 여러분이 대표하는 이데올로기에 자유를 줄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의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1974년 지스카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수백 명의 기자가 쫓겨났습니다. 1981년에는 매우 유명한 인사를 포함한 스물다섯 또는 스물여섯 명이 - 잘못 - 쫓겨났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도록 방관한 것을 후회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런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위인사국을 설치해 공공 분야의 인사에 중립성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기관은 도덕적 신뢰성을 갖게 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 영화와 음악 보호
문화 분야에서 그는 당시의 구도를 심층적으로 바꾸었다. 독특한 도서상을 제정하여 출판과 서점 거래를 활성화하고, 미디어에 프랑스 작품 할당량을 강제하여 프랑스 음악과 영화를 보호했다(특히 영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금융지원제도를 만들었다). 첫 해부터 문화부 예산을 2배로 늘리고, 미술관 예산은 3년 만에 3배로 늘렸다. 그의 최측근인 자크 랑 장관에게 임무를 맡겨 “모든 프랑스인이 만들고 창조하는 능력을 배양하고, 그들의 재능을 자유로이 표현하며, 그들이 선택한 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지방에는 (대규모 공사 예산의 3분의 2 이상이 지방에 할당되었다) 마르세유에 국립무용학교를, 아를에는 국립사진학교를, 앙굴렘에는 만화회관을 설립하도록 했다. 그가 시행한 대규모 공사를 새로운 세대의 건축가들에게 맡겼다. 생베르나르 강변로에 들어설 아랍세계연구원(IMA)은 장 누벨에게, 루브르미술관은 여 밍 페이에게,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은 카를로스 오트에게, 라데팡스의 신개선문은 요한 오토 폰 스프렉켈젠에게,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도미니크 페로에게 맡겼다.
이런 대규모 공사 중 그가 가장 애착을 갖고 1978년부터 거의 강박관념처럼 이야기하던 것이 바로 루브르미술관을 재무부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까지 전체를 확장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 일에 많은 낮과 밤을 지새우며 자신이 직접 페이의 피라미드 안을 선택하고, 실물 크기의 모형을 이용하여 빛과 어둠의 효과를 시간 단위로 재고, 공사장을 수천 번 오가고,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호화로운 사무실을 떠나지 않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던 좌·우파를 막론한 역대 재무부 장관들의 책동에 맞섰다.
경제개혁. 부유세 신설, 국영화...
몇몇 다른 중요한 개혁조치들은 처음에 항의를 받아 미루었다가 다시 집행했다. 공장 노동조건 개선조치와 부유세 신설 조치가 이에 속한다. 이 세금은 재산 몰수의 성격을 갖지 않도록 상한선을 책정하고자 했고, 파비우스 수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술작품과 들로르 재무장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산시설은 거기서 제외하도록 의무화했다.
몇몇 다른 개혁조치는 이후 우파에 의해 문제시되어 쓸모없이 되었지만, 실행된 짧은 기간 경제재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를테면 국유화 조치들은 오늘날에도 비난받지만, 프랑스 대부분의 대기업을 파산에서 구했다. 그리하여 5개 제조회사, 36개 은행, 2개 금융회사가 공공부문에 편입되었다. 여기에 항공‧제철 그리고 정보산업 분야의 다른 중요한 기업의 대주주권을 국가가 확보한 것도 포함하는 것이 옳다. 미테랑은 모든 절차가 결점이 없고 보상이 나무랄 데 없는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때문에 국회에서 끝없는 논쟁이 벌어지고, 뒤이어 오랜 소송이 따르고 마침내 헌법위원회에 맡겨지는 일이 많았다. 국유화 조치들은 1983년 2월이 되어서야 진정한 효력이 나타났다. 수자원회사(CGE)와 생고뱅, 그리고 2~3개의 은행을 제외하면 모든 국유화 대상 기업은 거의 파산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효율적인 금융시장이 없어 이들 회사는 그들의 자산규모에 맞는 민간 주주를 만나지 못했다. 지스카르 데스탱이 재선되었더라면 이들 대부분은 분명 해체되거나 작게 나뉘어 외국에 팔렸을 것이다. 따라서 새 내각은 수백억 프랑을 마련해 부채를 메우고 구조조정, 즉 해고를 단행해야 했다. 3년 만에 화학‧정보통신‧전화‧제철 분야의 현대화를 위한 용감한 작업이 완수되었다. 고용 측면에서는 비극이었지만, 산업 측면에서는 성공이었다.
후에 미테랑은 생산 공장의 국유화는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은행 국유화는 실망했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은행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만 계속했다”. 이런 조치들이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는 1986년 같은 기업들이 국유화 때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민영화되었다는 점이다. 민영화가 실패한 증거는 1984년부터 좌파에 의해 진정한 현대적 금융시장이 설립되었지만, 이들 기업은(생고뱅을 제외하고) 이때부터 외국에 팔리거나 사라지고 만 점이다. 한동안은 국가가 그들의 생명을 구했었다. 당시 많은 주주가 지금의 재산을 갖게 된 것은 당시 납세자들의 덕분이다.
미테랑의 최대 관심사는 봉급자와 실업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구매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더 이상의 봉급인상이나 실업수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물가상승과 세금하락을 통해서였다. 그는 “너무 많은 세금은 세금 자체를 죽인다”고 선언하고 식료품에 대한 부가가치세 경감, 직업세 경감, 대규모 사업의 예산상 제외를 결정했다. 부자들에 대해서는 상속세의 가산금을 생산수단에 해당하는 유산에 대한 재산세의 면제로 보상하도록 했다. 세금을 낮추기 위해 사회보장기금, 공·사기업을 위한 재정지원의 다른 수입원을 찾기 위해 나아갔다. 또한 자본시장을 설립하도록 자극했다.
이런 모든 개혁조치 중 대통령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60세 정년, 노동조건 개선 등 사람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킨 것들이다
여러 개혁조치 중 어떤 것도 국가원수의 끈질긴 주장과, 매순간의 관심과, 장관들이 정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도록 하는 독려가 없었다면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흔히 그의 의도를 비난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는 정한 약속을 절대 문제 삼지 않았다.
200년만의 첫번째 좌파 내각
미테랑의 첫 번째 성공은 - 그가 분명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정권을 잡은 좌파를 국회의원 임기 전체에 걸쳐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가 등장하기 전에 프랑스에서 좌파의 집권경험이 2년 이상 계속된 경우는 없었다. 엘리제 대통령궁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좌파는 오직 네 번 정권을 잡았소. 1848년에는 4개월, 1870년에는 코뮌으로 파리에서만 2개월, 1936년에는 1년. 따라서 1789년 이후 지속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첫 번째 좌파 내각이 바로 우리 내각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200년 만에 처음이지!”
그는 이번 집권경험의 성공 여부에 따라 좌파의 쇄신이 좌우된다는 것을 알았다. 집권 초기 그는 이런 말을 되풀이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의 집권이 좌파의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물론 우리는 개혁조치들을 실현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역사에서 권력행사에 효율적이었던 좌파로 기억될 수 있도록 힘쓰며 성공하는 것이오. 공약을 지키고 나라를 그르치지 않는 좌파로 기억되는 것 말이오. 뒤에 내가 아닌 다른 사회당원이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내가 진정 대통령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야당은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면 혼란이 올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4번의 정권교체를 하면서도 별 탈 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당시는 좌파진영에서조차 비판이 쏟아졌지만 사정은 점점 안정됐고, 이제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대단한 변화를 이루었다.
3년 만에 ‘삶을 변화시키다’
첫 번째 정권교체에 성공하기 위해 그는 매우 신속히 중요한 개혁을 실행하고, 극단적 요구를 배제하며, 자급자족적 경제운용으로 엉뚱하게 빠지는 것을 막을 줄 알았다. 이런 목적에서 그는 사람을 선발하고, 간부를 양성하고, 시간을 관리할 줄 알았다. 당장 총선을 실시하려고 결정한 것은 그 혼자였다. 새로운 국회가 소집되자마자 당초 예정했던 중요한 개혁조치들을 개시하리라고 결정한 것도 그 자신이었다. 거기에는 언론매체의 자유화와 지방분권처럼 좌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도 포함되었다. 이런 중요한 개혁조치들이 시작되자 더욱 극단적 조치를 취하기보다 그의 핵심적인 노력을 유럽통합 건설 쪽으로 방향을 정하는 용기를 발휘한 것도 그 자신이었다.
엘리제궁에 도착하자 미테랑은 자신의 모든 측근에게 ‘혁명’이니 ‘위대한 날의 저녁’이니 ‘사회주의’니 ‘자주관리’니 하는 거창한 말들에 기뻐 들뜨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가 보기에 일정을 사전에 정하지 않고 개혁을 실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되면 실망한 유권자들이 우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공산당이 도도하게 처신토록 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계획을 가장 신속하게 실행에 옮겼다.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그 효과를 체감하고, 경제가 회복되어 그 효과가 보완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취임초기 여러 번 반복해 피력했다. 그렇게 해야 그의 두 번째 임기가 가능할 것이었다.
정확히 그렇게 되었다. 첫 3년 동안 실행한 개혁조치들의 규모는 대단했다. 그 자신이 직접 가장 사소한 내용까지 그 조치들의 실행을 살폈다. 내각의 구성원은 야당시절을 지내며 검증한 사람 중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 뽑았다. 늙은 중진들은 모양을 갖추어 물러나게 하고, 탄탄한 행정경험을 가진 가장 젊은 사람들을 승진시켰다. 손에 펜을 들고 모든 명령과 법안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행정업무의 반복되는 쳇바퀴 속에 빨리 빨려들어 무뎌지는 장관들에게 평소 갖지 않는 과감성을 강요했다.
이런 개혁조치들의 목록은 길었고, 처음 공포될 때는 항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의 임기가 끝난 다음 우파든 좌파든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들 개혁조치들은 너무 당연한 것들처럼 여겨져서, 잊고 등한히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을 떠받치는 주춧돌을 형성하고 있다. 그가 없었다면 이것들은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의 간단한 목록을 작성할 필요가 있다. 예사롭지 않은 한 인물이 바라고, 가능하게 만들고, 그리고 실현한 것의 청사진을 담고 있다.
봉급생활자를 살린 사회복지 개혁
당시 사회복지 부문에서의 불평등은 심각했다. 노동자의 절반은 휴가를 떠나지 못했다. 70만 명의 봉급생활자는 한 해에 40번 이상 밤샘노동을 했다. 노동자의 아이들 대학진학률은 4%에 불과했는데, 회사 중역의 자식들은 4분의 3이나 대학에 진학했다. 4분의 1에 해당하는 젊은이가 전문기술교육을 받지 못하고 교육기관을 떠났다. 평균수명은 남자의 경우 겨우 70세였는데, 노동자들은 훨씬 낮았다. 그들은 대부분 퇴직하고 5년 안에 죽었다.
미테랑은 60세 정년제, 주 39시간 근무, 제5주째 유급휴가, 노동조건 개선, 세입자와 집주인의 균형적 관계 유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10년 유효 갱신가능 체류증명서 발급 등을 실행했다. 이는 많은 사람의 생활을 바꾸었다. 마침내 봉급생활자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좌파 기득권 포기한 지방분권
헌법을 수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그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상원의 거부 때문에) ‘7년 임기의 위대한 사업’은 지방분권화였다. 지방출신 선량으로서 국가가 파견한 니에브르 도지사의 족쇄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선량들에게 현지 집행권의 전권을 부여하는 것을 원했다. 릴르 시와 마르세유 시의 시장을 수상과 내무부 장관에 각각 임명했다. 그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파리의 막강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종식시키려는 각오가 대단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26개의 법률과 250개의 명령을 거쳐야 하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 조항은 그가 스스로 작성한 것들이다. 어떤 장관들은 자기들의 행정수단이 사라지게 될까 불안해 반대했고, 어떤 정치적 동지들은 이 혁명적 조치가 대다수 지방에서 우파에 권력을 주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비록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될지라도 개혁을 바라는 것은 좌파의 영광이다. 여성들의 투표권이 없었다면 좌파는 1946년 이후 권력을 계속 가졌을 것이다. 그래도 레옹 블룸은 이런 개혁을 인정했다. 지방분권도 같은 문제를 야기한다. 같은 대답을 주어야 한다.”
끝으로 그는 얼마가 지난 뒤 나라의 정치생활을 깊게 변화시키는 두 가지 결정을 실행하도록 했다. 1985년에는 겸직제한 조치를 지키도록 하고, 1990년에는 정당의 자금조달이 마침내 합법적이 되도록 체계화했다.
사형제 폐지, 동성연애자 인권보호...소수자 보호
풍습에 관하여 상당수의 막연한 바람을 정당한 규범으로 바꿈으로써 많은 사람의 삶을 편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6년 전 <자유, 자유들>을 집필하며 많은 밤을 지새우면서 이들 규범을 정리했다. 그리하여 동성연애자들을 겨냥한 차별을 폐지하고 - 당시 동성연애는 형법 소관의 범죄였다 - 여성의 권리를 대폭 향상시켜 사회보장기금에 의한 임신중절비용 환불을 승인할 정도였다.
모두 알다시피 그는 우선 혼자서 사형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심했다. 로베르 바댕테르 - 그는 1981년 이전 사형제 폐지 지지자 중 가장 열렬한 가담자였다 - 의 귀중한 도움을 받아 우선 상원이 찬성표를 던지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사형제폐지는 실질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결국 자크 시라크도 사형제 폐지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조치가 아직도 이 나라에서 인기가 있는 야만행위를 종식시킨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활동은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법 분야에서 비록 그가 구속제도와 재판진행의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고, 재범을 방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안전과 자유법’, ‘반기물파괴자법’ 등과 같은 인권에 위배되는 수많은 법조문의 폐지를 단행하도록 했다. 그는 국가 보안재판과 상설 군사재판을 폐지하도록 했다. 유럽 인권재판소에 개인이 재판을 의뢰할 수 있는 권리를 도입하도록 했으며, 공익근무형의 창설을 승인하도록 했고, 손해배상의 신속화, 피해자의 권리 강화, 가난한 사람들의 사법서비스 이용, 사법적 통제의 강화 등을 용이하도록 했다.
교육개혁
교육에 관해서는 고등교육 개혁, 기술직업교육 법률계획, 우선 교육지구 신설, 차별교육, 과목별 수준집단, 교육기관의 자율권, 고등학교의 생활, 금전적‧인적 보충수단 투명화, 그리고 수학기간 연장 등을 단행하도록 했다. 연구에 새로운 수단과 지침서를 부여하여 예산상의 중요한 우선분야가 되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장-피에르 슈벤망이 정한 목표(한 학년의 80%가 대입자격시험 합격자가 되도록 함)를 비판했다:
“이렇게 많은 합격생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빵 만드는 사람 또한 필요한 법이다!”
방송의 국가독점 종식
방송 분야에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의 국가독점을 종식시켰다. 이 개혁조치 - 지방분권과 마찬가지로 - 가 좌파보다 우파에 더 유리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단행했다. 1981년, 프랑스는 수십 개에 이르는 보잘 것 없는 불법 라디오 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경찰을 보내면서 여전히 권력이 통제하는 3개의 공영방송에 옹색하게 방송을 맡기고 있었다. 바로 이때 프랑수아 미테랑은 1,600개의 라디오 방송과 2개의 새로운 텔레비전 방송 설립을 허가했다. 그는 방송에 광고를 허용하고 유선방송과 위성방송의 개발을 지원했다. 비록 그는 이런저런 젊은 야심가들이 자유 운운하며 대규모 그룹을 설립하는 것을 보기 싫어하고, 젊은이들을 이용하여 물려받은 재산을 불리는 사람을 경멸했지만, 전파를 시민에게 개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종종 “큰돈을 벌게 되는 몇몇 인물 뒤에는 젊은이들의 노력이 가려져 있다”고 말했다. 1985년 7월 각료회의에서 그는 자신의 정책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개인적으로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독점을 깨부수고 싶었습니다. …방송을 통한 의사표시가 공영방송에만 한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이데올로기는 기자들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자본주의 이윤의 이데올로기와 일치합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우리가 말하는 동안 케이블 방송들이 생겨나고 위성방송들이 준비 중입니다. 앞으로 프랑스는 외국으로부터 수십, 수백의 영상과 방송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공영방송을 구하려면 그것을 민영방송과 동거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변화에 돌입하는 것은 후회할 일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 앞에 서는 것이 후회할 일이 아닌 것처럼…. 기술이 그렇게 강요하기 때문에 자꾸 새로운 물건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런 결정을 내림으로써 목전의 이익과 신념을 져버렸다는 점도 압니다. 우리는 돈의 위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은 여러분이 대표하는 이데올로기에 자유를 줄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의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1974년 지스카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수백 명의 기자가 쫓겨났습니다. 1981년에는 매우 유명한 인사를 포함한 스물다섯 또는 스물여섯 명이 - 잘못 - 쫓겨났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도록 방관한 것을 후회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런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위인사국을 설치해 공공 분야의 인사에 중립성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기관은 도덕적 신뢰성을 갖게 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 영화와 음악 보호
문화 분야에서 그는 당시의 구도를 심층적으로 바꾸었다. 독특한 도서상을 제정하여 출판과 서점 거래를 활성화하고, 미디어에 프랑스 작품 할당량을 강제하여 프랑스 음악과 영화를 보호했다(특히 영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금융지원제도를 만들었다). 첫 해부터 문화부 예산을 2배로 늘리고, 미술관 예산은 3년 만에 3배로 늘렸다. 그의 최측근인 자크 랑 장관에게 임무를 맡겨 “모든 프랑스인이 만들고 창조하는 능력을 배양하고, 그들의 재능을 자유로이 표현하며, 그들이 선택한 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지방에는 (대규모 공사 예산의 3분의 2 이상이 지방에 할당되었다) 마르세유에 국립무용학교를, 아를에는 국립사진학교를, 앙굴렘에는 만화회관을 설립하도록 했다. 그가 시행한 대규모 공사를 새로운 세대의 건축가들에게 맡겼다. 생베르나르 강변로에 들어설 아랍세계연구원(IMA)은 장 누벨에게, 루브르미술관은 여 밍 페이에게,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은 카를로스 오트에게, 라데팡스의 신개선문은 요한 오토 폰 스프렉켈젠에게,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도미니크 페로에게 맡겼다.
이런 대규모 공사 중 그가 가장 애착을 갖고 1978년부터 거의 강박관념처럼 이야기하던 것이 바로 루브르미술관을 재무부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까지 전체를 확장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 일에 많은 낮과 밤을 지새우며 자신이 직접 페이의 피라미드 안을 선택하고, 실물 크기의 모형을 이용하여 빛과 어둠의 효과를 시간 단위로 재고, 공사장을 수천 번 오가고,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호화로운 사무실을 떠나지 않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던 좌·우파를 막론한 역대 재무부 장관들의 책동에 맞섰다.
경제개혁. 부유세 신설, 국영화...
몇몇 다른 중요한 개혁조치들은 처음에 항의를 받아 미루었다가 다시 집행했다. 공장 노동조건 개선조치와 부유세 신설 조치가 이에 속한다. 이 세금은 재산 몰수의 성격을 갖지 않도록 상한선을 책정하고자 했고, 파비우스 수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술작품과 들로르 재무장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산시설은 거기서 제외하도록 의무화했다.
몇몇 다른 개혁조치는 이후 우파에 의해 문제시되어 쓸모없이 되었지만, 실행된 짧은 기간 경제재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를테면 국유화 조치들은 오늘날에도 비난받지만, 프랑스 대부분의 대기업을 파산에서 구했다. 그리하여 5개 제조회사, 36개 은행, 2개 금융회사가 공공부문에 편입되었다. 여기에 항공‧제철 그리고 정보산업 분야의 다른 중요한 기업의 대주주권을 국가가 확보한 것도 포함하는 것이 옳다. 미테랑은 모든 절차가 결점이 없고 보상이 나무랄 데 없는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때문에 국회에서 끝없는 논쟁이 벌어지고, 뒤이어 오랜 소송이 따르고 마침내 헌법위원회에 맡겨지는 일이 많았다. 국유화 조치들은 1983년 2월이 되어서야 진정한 효력이 나타났다. 수자원회사(CGE)와 생고뱅, 그리고 2~3개의 은행을 제외하면 모든 국유화 대상 기업은 거의 파산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효율적인 금융시장이 없어 이들 회사는 그들의 자산규모에 맞는 민간 주주를 만나지 못했다. 지스카르 데스탱이 재선되었더라면 이들 대부분은 분명 해체되거나 작게 나뉘어 외국에 팔렸을 것이다. 따라서 새 내각은 수백억 프랑을 마련해 부채를 메우고 구조조정, 즉 해고를 단행해야 했다. 3년 만에 화학‧정보통신‧전화‧제철 분야의 현대화를 위한 용감한 작업이 완수되었다. 고용 측면에서는 비극이었지만, 산업 측면에서는 성공이었다.
후에 미테랑은 생산 공장의 국유화는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은행 국유화는 실망했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은행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만 계속했다”. 이런 조치들이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는 1986년 같은 기업들이 국유화 때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민영화되었다는 점이다. 민영화가 실패한 증거는 1984년부터 좌파에 의해 진정한 현대적 금융시장이 설립되었지만, 이들 기업은(생고뱅을 제외하고) 이때부터 외국에 팔리거나 사라지고 만 점이다. 한동안은 국가가 그들의 생명을 구했었다. 당시 많은 주주가 지금의 재산을 갖게 된 것은 당시 납세자들의 덕분이다.
미테랑의 최대 관심사는 봉급자와 실업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구매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더 이상의 봉급인상이나 실업수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물가상승과 세금하락을 통해서였다. 그는 “너무 많은 세금은 세금 자체를 죽인다”고 선언하고 식료품에 대한 부가가치세 경감, 직업세 경감, 대규모 사업의 예산상 제외를 결정했다. 부자들에 대해서는 상속세의 가산금을 생산수단에 해당하는 유산에 대한 재산세의 면제로 보상하도록 했다. 세금을 낮추기 위해 사회보장기금, 공·사기업을 위한 재정지원의 다른 수입원을 찾기 위해 나아갔다. 또한 자본시장을 설립하도록 자극했다.
이런 모든 개혁조치 중 대통령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60세 정년, 노동조건 개선 등 사람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킨 것들이다
여러 개혁조치 중 어떤 것도 국가원수의 끈질긴 주장과, 매순간의 관심과, 장관들이 정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도록 하는 독려가 없었다면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흔히 그의 의도를 비난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는 정한 약속을 절대 문제 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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