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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요원 김만복과 민청학련의 '1974 악연'

70년대 서울대 학원사찰, 민청학련 주역들과 같은 '권력의 배' 타

김만복 국정원장 내정자(60)의 이력은 대단히 특이하다.

그는 1974년 중앙정보부에 공채로 들어갔다. 입사전 그의 신분은 서울대 법대 졸업생. 당시 서울대, 그 중에서도 특히 법대는 전국 학생운동의 진앙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중정 입사는 대단히 이채로울 수밖에 없다.

중정요원 김만복과 민청학련의 '1974 악연'

1974년 중정에는 김 내정자 외에도 각대학 법대 출신들이 많이 입사했다. 새로 부임한 신직수 당시 중정부장의 특명 때문이었다 한다. 신직수 부장은 1973년 12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 의해 법무장관에서 중정부장으로 임명됐다. 이유는 이후락 부장이 1973년 초대형사고를 잇따라 터뜨렸기 때문이다. 국내외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던 김대중 납치사건과 최종길 서울대교수 고문치사 사건이 그것이었다.

국내외적으로 비난여론이 급등하자 박대통령은 6년여간 중정부장을 맡아온 이후락을 퇴진시키고 법무장관이던 신 부장을 발탁했다. 신 부장은 부임후 "수사를 하더라도 법을 좀 알면서 하라"며, 신입요원들을 법대생들 가운데 대거 발탁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서울대 법대 졸업생이던 김만복 내정자도 이런 분위기속에 중정에 들어갔다.

김 내정자는 중정요원이 된 후 세칭 '학원반'에 배치됐다. 학생운동 동향을 체크하는 역할을 맡은 것. 특히 모교인 서울대가 그의 활동반경이었다.

그가 요원이 된 1974년은 '살벌한 해'였다. 박 대통령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였으며, 위반자를 심판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지하신문 발행과 동맹휴학 등으로 맞섰고, 지식인과 종교계는 시국선언문 발표와 물밑 개헌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4월3일 박 대통령은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서울대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확증을 포착하였다”며 이른바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하며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했다.

중정은 즉각 1천24명의 위반자를 잡아들여 조사하고,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1백80명을 구속·기소하였다. 구속된 1백80명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계 23명 중 8명이 사형을,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를 각각 선고받았다. 인혁당계 8명은 사형확정후 즉각 사형이 집행됐고, 나머지는 1975년 2월 15일 대통령특별조치에 의하여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훗날 이 사건은 정권안보를 위한 대표적 용공조작사건으로 밝혀졌다. 인혁당 8명의 사형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사법살인'으로 밝혀졌고, 민청학련 사건도 지난해말 국정원 과거진상조사위가 '용공조작'으로 결론내렸다. 국정원 최종 결론전에도 이미 이들은 무죄임이 확정돼 많은 인사들이 정치권에 진입했다. 특히 이들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노무현 정권 들어 최전성기를 맞고 있다. '사형수 이철'을 비롯해 유인태 김근태 정동영 이해찬 장영달 강창희 유홍준 이강철 정찬용 등 내로라하는 권력실세들이 그들이다. 야권에도 소수이기는 하나 손학규 전 경기지사, 이재웅 한나라당 의원 등이 민청학련 출신들이다.

김만복 내정자는 서울대 담당 당시 이들의 면면을 알았다 한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김 내정자는 '국정원장 내정자'라는 정권의 핵심실세로 이들과 한배를 타게 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난 4월 노무현대통령으로부터 국정원 1차장 임명장을 받고 있는 김만복 내정자. 그로부터 반년만에 그는 국정원장으로 내정될 정도로 그에 대한 노대통령 신임은 대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합뉴스


대단한 '관운'

김 내정자는 '관운(官運)'이 대단한 인물이다.

김 내정자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은 물론, 군사정권의 유습에 대한 대대적 숙정을 단행한 YS의 문민정권 시절에도 승승장구했다. 여기에는 부산 출신으로 부산고 졸업생이라는 그의 '지연'도 적지않은 역할을 했다.

그는 80년대 들어선 국내 문제에서 손을 떼고 자메이카, 미국 등의 대사관에 국정원 몫으로 파견나가는 등 외사 문제에 전념했다.

김 내정자는 1997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제 운이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다 한다. 호남권력이 출범했으니 그런 판단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DJ정권은 국정원 요소요소를 호남인맥으로 채워 나갔고, 부산인맥인 김 내정자는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러던 그에게 전혀 예기치 않았던 '관운'이 도래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이 그것이었다. 남북정상회담 성사가 확정되자 청와대는 국정원에 정상회담팀에 '의전' 관련 요원 파견을 지시했고, 김 내정자가 차출됐다. 남북정상회담은 역사적 성공을 거두었고, 그후 정상회담팀 모두에게 포상이 내려졌고 김 내정자도 그 중 한명이었다. 이로써 김 내정자는 DJ정권 시절에도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2002년 대선에서 무명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김 내정자는 '이제는 정말로 옷을 벗어야 할 때가 됐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노 당선자가 자신과 같은 PK(부산-경남) 출신이라고는 하나, 자신이 살아온 역정과 너무 다른 길을 걸어온 당선자이자 신권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에게 또 한번의 '관운'이 찾아왔다. 대통령인수위는 청와대 내에 대북-대미 관계를 전담할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신설키로 했다. 대북-대미 관계야말로 노 정권이 풀어야 할 최대 현안이었기 때문이다.

정권 출범 직전 NSC가 조직됐다. 김 내정자는 NSC 초기멤버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달 뒤 그는 NSC 정보관리실장(1급)으로 발탁됐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참여 경험이 발탁 이유였다. 이때부터 그는 이종석 NSC사무차장의 최측근으로서 승승장구, 2004년 2월 국정원 기조실장, 2006년 4월 국정원 제1차장을 거쳐 마침내 국정원 사상 최초로 내부인사로 국정원장 내정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김 내정자는 2005년에는 국정원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간사를 맡아 70년대 '민청학련 사건' 등의 용공조작을 공식 확인하기도 했다.

유기홍 "김만복, 80년대초까지 학원사찰"

김 내정자가 70년대 학원사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열린우리당내 운동권 출신 상당수 의원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끄집어내기는 부담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서울대 학생운동권 출신인 유기홍 열린우리당 의원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대학 다닐 때(77~81년) 학교에 출입해 학원사찰요원이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의 이름이 '김만복'이라는 사실은 훗날 사회에 나와 그와 만나서 알게 됐다"며 "내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 당시 국정원 과장이던 그를 만났는데 그때 자신의 이름과 직책을 밝혔다"고 말했다.

유 의원은 그러나 "학원사찰 전력은 아픈 과거일뿐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며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 등의 실무진으로서 나름의 능력을 발휘했다는 국정원내 평가가 있었고, 업무 능력이 축적돼 국정원 기조실장까지 하고, 과거사 진상규명위원으로도 활동하지도 않았겠냐"고 반문했다.

유 의원은 "만약 그가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이라면 과거 경력이 문제가 되겠지만, 몸 담고 있는 조직의 수장이 되는데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며 "조직원으로서 임무에 충실했던 것 아니었겠냐"고 덧붙이기도 했다.

과거 공안시절의 피해자였던 유 의원의 말인 만큼 더이상 '과거의 아픈 상처'를 들추지 말자는 혜량은 충분히 이해 가며 공감된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이런 혜량을 보이더라도, 김 내정자 본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소명은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음주운전 전력도 공직자가 되는 데 하자가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김 내정자의 용기있는 고백을 기대해 본다.
박태견 대표 겸 편집국장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24 21
    정일

    둘다 아오지보내
    그래야 진짜 인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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