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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의 덫'을 경계한 미테랑

[아탈리가 말하는 미테랑] <3> 권력과 관료-언론간 전쟁

고위 관료들을 경멸한 미테랑

대통령 미테랑은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멀리했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좌관들을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 돼요. 그러다 보면 항상 그들에게 아이디어를 미루고 말아요.”

그의 측근 가운데, 그는 기술자, 정치인, 그리고 보좌관이 된 드문 친구들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그런 보좌관들의 무능이 가끔 큰 파국을 초래해도 그는 화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계파에 속하지 않는 보좌관들은 자신의 충복의 계파에 속하기를 바랐다. 특히 그는 나에게 상당수의 보좌관을 선발하게 했다. 그의 중요한 보좌관들은 봉사의 관점에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보고 선발한 주변인들이었다.

그는 지적 능력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보다 기질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능?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골고루 나눠 갖는 것이오. 의지와 양식, 이런 것이 더욱 보기 드문 거요.”

그는 독창성과 기발함, 창의성과 기이함을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틀린 생각이라도 그에게 참신해 보이면 대다수가 인정하는 옳은 생각보다 그를 더욱 끌리게 만들었다. 그는 특히 고위 공무원들을 경계했다.

“순응주의자들, 국어로 글도 쓸 줄 모르는 자들, 국민으로부터 단절된 자들, 반동주의자들!”

그가 엘리제궁에 들어와 단행한 공간 배치가 이런 원칙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같은 층에 그를 중심으로 세 사람, 세 주변인을 배치했다. 앙드레 루슬레, 피에르 베레고부아 그리고 나. 각자는 그의 한 측면을 반영했다. 앙드레 루슬레는 사업계에서 그가 신뢰하는 사람, 과거의 모든 투쟁을 잘 아는 측근이었다. 프랑스 가스회사 사원 출신인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좌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정치인으로 절대적 헌신과 놀라운 섬세함을 지녔다. 세 번째인 나는 현대성을 추구하는 그의 의지를 실현한다고 생각됐다.

그의 곁에서 내가 수행하는 역할이 너무 특이해 많은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내 활동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지고 또 가장 주변적인 것이 그의 ‘셰르파’가 되는 것이었다. 이 별명은 영국 언론이 G7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각국 국가원수의 보좌관들에게 붙여준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세계 각국에서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과 매달 한 번 비밀회담에 참석했다. 이전 정상회담에서 나온 결정들의 적용을 확인하고, 이후의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이 때문에 나는 대통령을 대신해 국가원수들이나 그들의 측근을 만나기 위해 또 다른 수많은 단기 여행을 했다. 또 가끔은 사흘을 자지 않고 정상회담의 결론을 협상하기도 했다. 이런 아주 특별한 활동 외에 나는 그가 - 파리 아니면 다른 곳에서 - 외국 국가원수들과 갖는 모든 회의, 장관회의, 안보회의와 관계장관회의, 그리고 사회당 간부들과의 만남에 참석했다. 또 그의 모든 해외여행에 동행했다. 끝으로 그에게 오고 그에게서 나가는 모든 메모를 읽었다. 또한 나는 모든 것을 글로 적어 두었다가 그가 나에게 추후에 쓰기를 바라는 책에서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해야만 했다. 그는 종종 내게 이렇게 물었다. “이것 메모했소? 그리고 저것은?”

외국에 나가서 메모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기술에 속했다. 대화에 어울리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다시 읽을 수 있도록 메모하려면 신속하고 명료해야 했다. 미테랑은 항상 통역을 대동했기 때문에 내 일이 조금은 쉽게 여겨졌다. 그런데 내 직업생활 중 가장 두려웠던 일이 이와 관련해 발생했다. 1985년 5월28일, 스위스 콘스탄츠 호수에 떠 있는 선상에서 처음으로 헬무트 콜 독일 총리와 깊은 대화를 나눈 회담을 가질 때였다. 논의의 주제는 핵문제에 관한 것으로, 극도의 보안을 요구하는 성질이었다. 대화가 끝난 다음(평소처럼 이 자리에도 나 혼자 배석했다) 두 정상은 오랫동안 기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파리를 향해 출발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선상에서 기록한 메모를 두고 온 것을 알았다. 만일 어떤 기자가 그것을 주워 공개한다면 엄청난 사건을 야기했을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비행기 트랩 아래서 보안기관 책임자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이렇게 귓속말을 했다. “걱정 마십시오. 독일 기자 한 명이 당신의 메모에 손을 대는 순간 우리 요원들이 그것을 주웠습니다.”

내 기분이 어떠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나는 혼자만 해독할 수 있는 메모체계를 개발했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여자&#8231;뇌물&#8231;아첨&#8231;돈 등 좋지 않은 영향에 버틸 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사건에 걸려들면 그가 그것을 직접 비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그것을 말해서 그의 안쓰러움이 당사자에게 전달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자기 측근 중 한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맞붙여 경쟁시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좌관 중 한 명이 대통령을 겨냥하는 비판을 하면 그는 “내가 알아보지. 괜찮아” 하고 응답했다.

자크 아탈리 ⓒ도서출판 에디터


아첨꾼들

미테랑은 자신에게서 무엇을 얻어가려는 사람을 훤히 알아보는 보기 드문 재능을 가졌다. 그리고 그들을 멀리 따돌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농락했다. 구걸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상대해야할 적의 모습이 이미 드러나 보였다.

“두 가지 중 하나다. 내가 그를 도와주려 하지 않으면, 그는 나를 미워할 것이고, 그를 도와주면, 그는 나를 더욱 미워할 것이다.”

1988년 6월 어느 날 국회의원에 당선된 보좌관들을 점심에 초대한 자리에서 미테랑은 이렇게 설명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주된 역할은 여러분한테 레지옹 도뇌르(L&eacute;gion d'Honneur)를 받게 해달라고 애걸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따서 바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일단 훈장을 받고 나면 당신들과의 사이를 틀어버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을 받는 데 당신들이 필요 없었다는 것을 보이려고 말입니다.”

측근들의 아첨을 들어주지 않던 그이기에 철새 같은 아첨꾼들에게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아첨꾼은 무수히 많았다. 그들은 대가로 법적 사면(赦免), 공직 임용, 서훈, 초청, 세금 면제 등의 특혜를 얻기 위해 그를 구름 위로 올렸다. 그에 대한 응답은 흔히 부정적이었고, 그것은 잔인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소란스럽고 혼란스럽던 문인 장-에데른 알리에가 그랬다. 1981년 이후 그는 자신이 우리의 가장 절친한 친구요, 가장 충직한 후원자라고 자처했다. 매일 아침 7시가 되기 직전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문학작품에 대한 찬사(“나는 감히 사람들이 빅토르 위고가 자네보다 글을 더 잘 쓰는 것처럼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어”)를 피력하고, 내친 김에 어느 텔레비전 방송사의 경영을 요구했다. 그는 대통령께 불타는 듯이 구구절절한 편지를 쓰고, 모든 요로를 통해 자신의 ‘무한한 찬미’를 대통령에게 알렸다(여전히 자신이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자리에 임명해 달라고 요구하며). 그 자리에 임명되지 않자, 그것을 요구했고, 중개인을 통해 대통령을 위협했다.

“나에게 그 텔레비전 방송사 사장직을 주지 않으면 나는 당신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책을 펴내겠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은 그를 점심식사에 초대해 내가 배석한 가운데 그의 모든 수작(“당신은 태양왕입니다. …어느 군주가 프랑스 역사에 이보다 더 위대한 발자취를 남길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려고 합니다. 당신은 현 세기를 빛나게 하시고…. 당신이 그 경영을 내게 맡겨주시면 나는 회사의 모든 방송을 통해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릴 것입니다….”)에 차분하게, 때로는 비꼬기도 하면서 안 된다고 대답했다. 미테랑은 단호하게 거절했다.“당신은 가끔 훌륭한 글을 쓰시는 분입니다. 계속 그렇게 되도록 하십시오.”

식사를 마치고 2층으로 돌아와서 대통령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을 이 점심식사에 초대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인데. 그는 자신이 모욕당하는 자리에 당신이 참석한 것을 원망스럽게 생각할 것이오. 지금부터 당신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원수가 된 거요. 바로 다음, 그가 내게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진실로 알고 나면 내 차례가 될 것이오.”

그리고 나에 이어 그의 차례가 되었다. 장-에데른 알리에는 내가 쓴 책을 상대로 음모를 획책하더니, 증오를 품고 대통령을 쫓아다녔다. 대통령은 자신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려는 책의 발행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 - 불법도청을 명령할 정도로 - 을 동원했다. 그 책의 주된 잘못은 장본인이 그 사실을 알릴지 결심하기도 전에 그것을 폭로하겠다는 것이었다.

권력과 언론

그를 ‘군주’ 취급하고 그의 궁정 이야기를 다룬 기사를 읽으면 미테랑은 화가 치밀어 언론에 대한 멸시가 타올랐다. 그는 제4공화국부터 언론사를 출입했던 터여서 그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론사의 모든 맥을 파헤쳐 음모를 추적했다. 종종 매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기자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붓기도 했다. 특히 신문사 기자들, 그중에서도 정치칼럼니스트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한 번쯤 그의 가혹한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은 기자는 드물었다. 그리고 그 가혹한 비난은 흔히 부당한 것이었다.

기자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 이야기가 칼럼이 되고 그것을 쓴 필자들은 그 칼럼이 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것인지, 그가 시킨 대로 받아 적은 것인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보통 이런 식의 밀월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다. 그를 겨누어 터뜨리는 비판이 다시 등장하면 그는 이들 기사에 아무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불평거리를 찾기 위해 이들 기사를 즐겨 읽었다. 그것으로 싸울 의지를 북돋우고, 거기서 논쟁의 재료를 찾아냈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 관해 최악의 혐오스러운 기사를 쓴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 적도 있었다. 나는 특히 우파 언론인 루이 포벨스와 같이 한 점심식사를 잊을 수 없다. 미테랑은 매주 자신을 헐뜯는 <피가로 마가진> 편집장의 두 번째 소설인 <사랑이라는 괴물>을 매우 좋아했다. 대통령은 작가에게 그 책에 관한 멋진 이야기를 했다. 문학에 관한 한 대화는 빛이 났고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4시간 동안 계속된 점심식사가 끝난 이후 루이 포벨스는 계속 그를 비판했지만 더 이상 그를 모욕하지는 않았다.

그가 존경하고, 기사를 주의 깊게 읽었던 -매번 나에게 그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물으며- 유일한 칼럼니스트는 레이몽 아롱이었다. 공동 공약과 공산당과의 연합에 반대하는 아롱의 가차 없는 비판은 그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1983년 10월, 아롱이라는 대가(大家)가 죽은 이후 그가 어떤 칼럼니스트의 관점을 그만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여론이 흉흉하면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파리에는 내가 잘못 되기를 바라는 기자 200명이 있어!”

그는 이들 기자를 두고 “거드름 피우는 것들” “무능한 것들” “나약한 것들” “형편없는 것들” “아무것도 모르는 볼품없는 것들” “자본에 고용된 것들”, 그리고 심지어 “CIA 요원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좌파 기자들을 특히 싫어했다. 그것은 좌파 기자들이 그가 잘못 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테랑은 자신이 야당이던 시절 줄곧 가장 신랄한 비판으로 자신을 추궁하다 자신이 당선된 후에는 가장 심한 아첨꾼이 되어 공식 여행에 초대받고 임무를 받아 특파되기를 바라던 사람들을 특히 경멸했다. 매번 비행기가 이륙할 때마다 미테랑은 불안한 표정을 하고 비행기 창밖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보좌관 한 명 한 명을 살피며 “활주로를 잘 보시오. 분명 그들이 데려가 달라고 가로누워 있을 거요!”라는 상투적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다는 듯 되풀이했다.

방송기자들에 대해 그는 드골 시대인 수십 년 전부터, 국영밖에 없던 텔레비전 방송의 “스피커들”은 체제수호를 위한 월급쟁이들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한 야당생활을 할 때는 방송에 제 시간 지키지 않기, 특종을 내려고 안달하는 것에 굽히지 않기 등 그들의 비위에 맞는 일은 되도록이면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사정이 더욱 나빴다. 그는 그들의 뜻에 반해 당선되었고, 따라서 그들에 대해 아무런 배려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의 첫 번째 전략은 드골과 지스카르의 월급쟁이들을 사회당 월급쟁이들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일은 실패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잘못을 저지른 것을 인정하고 다소 독립적인 방송기자들이 생겨나도록 해주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처음에는 재능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후에는 그들의 방송생활을 좌우하는 관건이 되었다.

엘리제궁에서 2년을 보내고 나자, 그는 심지어 인터뷰나 연설을 할 때 카메라 앞에서 처신을 잘하는 법을 배우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변화된 자세를 보이게 된 것은 몇몇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스텔리오 로렌지와 세르주 마오티라는 두 명의 텔레비전 전문가와, 자크 필랑과 제라르 콜레라는 두 명의 광고 전문가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매체에 관한 그의 고자세를 일리 있다고 공감하고 기자들의 머리를 건너 뛰어 여론에 직접 의사를 전할 수 있도록 매체를 제도화하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했다.

그가 언론에 대해 가진 경멸은 한 일화에 의해 더욱 심해졌다. 그 일은 오랫동안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남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1982년 9월 우파가 전년도의 패배에서 다시 깨어나 당면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가열 찬 비판을 시작하던 때였다. 그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벙어리처럼 있는 좌파를 보고 몹시 화가 났다. 1982년 12월 어느 날 우리가 아테네에 갔을 때였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왜, 선거 전에 가명으로 - 코민이라는 이름이었지? - 이상야릇한 정치소설을 쓴 당신 친구 앙드레 베르코프라고 있지 않소. 그 양반 다가오는 3월 지방선거 이전에 또 다른 비슷한 책 한 권 쓸 수 없을까요? 좌파를 자처하는 기자도, 사회당원도 우파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할 책 말이오?”

나는 앙드레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카통이라는 가명으로 자신을 가린 우파 정치인을 내세워 자기 스스로의 진영을 비판하는 책을 쓸 뜻을 넌지시 비쳤다. 대통령은 승낙을 표하고 “이 비밀을 지키도록 하시오. 이것이 나로부터 시작된 줄 알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죠?” 파야르 출판사 사장 클로드 뒤랑과 약속이 이뤄졌다. 나는 당시 엘리제궁에서 나의 보좌역이던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앙드레 베르코프가 메모장을 채우는 데 도움 되는 기밀이 아닌 모든 정보를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모두 다섯 명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밀은 지켜질 수 있었다. 그 책은 <탈환>이라는 이름으로 1983년 1월 출간돼 서점에서 양호한 성공을 거두었다. 기자들은 로마식 가명 뒤에 과연 누가 숨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알랭 페르피트51), 레이몽 바르, 지스카르 등이 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언론은 감히 어떤 기자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쓸 수 없는 우파에 대한 신랄한 이 비판서를 칭찬했다.

카통은 심지어 VSD라는 어느 주간지의 칼럼니스트가 되기도 하고, 그의 소재를 확인하지 않기로 약속한 우파 신문들에 허용한 인터뷰를 통해 우파를 비판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썼다.

“시라크는 자신이 프랑수아 미테랑의 총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도 괜찮을 것이다. 그에 맞서서 적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무튼 그는 분명 지스카르의 총리였고, 코레즈 출신의 카스토르를 샤말리에르 출신의 폴뤽스에게 맺어준 광적인 사랑을 우리는 잘 안다….”

미테랑은 이것을 읽으면서 파안대소했다. 파리에서는 카통의 정체를 밝히려는 움직임이 절정에 달했다. <르 피가로>는 “여전히 가면을 쓴 채 나아가는 이 우파 인물”을 미화했다. 카통은 목소리를 변형시켜 심지어 라디오 방송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 목소리는 엘리제궁 비서관 올랑드였다! 대통령의 보좌관이 이런 가면무도회에 참가한다는 것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엄청난 스캔들이 될 것이다! 나는 불안하게 여겼다. 미테랑은 이런 것을 즐겼다.

“괴로워하지 마시오. 그들은 너무 감쪽같아요. 결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거요.”

실제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어 카통은 제2권을 펴내 비슷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무공을 알리고 싶은 열망에서 베르나르 피보의 방송 초대를 받아들였다. 당시 가장 중요한 문학 방송에서 빈 의자 하나가 그를 위해 남겨졌다. 사진기자들은 레이몽 바르를 기다렸지만 실망스럽게도 유머 작가가 오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 앙드레 베르코프가 우리 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재미를 느끼는 좌파신문 <리베라시옹>지의 필자를 빼면 - 대통령과 연관을 짓지 않았다. 그날 저녁 미테랑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잘 아시겠죠. 기자들은 진실을 알려고 하는 특별한 열정을 갖고 있지 않아요. 그들은 그것을 조작해 특종을 만드는 것이나 좋아하지, 진지하고 객관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결국 그럼에도 언론은 미테랑의 행동에 매우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그가 여론의 변화 - 심지어 부당하기까지 한 - 를 의식하는 것을 도왔다. 게다가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매일 1시간 이상 신문을 읽는 데 할애했다. 특히 그가 그토록 놀리거나 저주하기를 좋아했던 칼럼니스트들은 그가 나라를 이해하고 그의 행동 방향을 정하는 데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언론인들에게 결코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계속>
도서출판 에디터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0 0
    sprite1001

    이 글을 보시는 님께 호소합니다!!
    요즘 수도권 시내 버스에서도 광고하고 있는 유투브 컨텐츠에요.
    부디 짬을 내셔서 확인하시고 바른 판단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눅17:26~30).
    https://youtu.be/2QjJS1Cnr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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