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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역사야! 그래 대단한 역사야"

[아탈리가 말하는 미테랑] <2> 1981년 집권

1978년 총선, 공산당과의 밀고당기기 협상

1978년 총선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그 선거는 공동강령을 ‘현실화’할 것을 요구했다. 제2차 석유파동이 그 공약에 담긴 복지향상을 위한 자금지원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미테랑은 나에게 베레고부아와 함께 공약의 경제부분에 관해 공산당원들을 상대로 협상을 이끌어 나갈 것을 요청했다. 유일하게 위임받은 것은 합의를 이끌어 내되, 본질적인 것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피테르만&#8231;마르셰&#8231;에르조그, 그리고 카나파를 상대로 오랫동안 밀고 당기기를 한 끝에 최후의 싸움은 두 개의 주제에 관한 것이 되었다. 하나는 SMIC, 즉 최저임금에 관한 것으로, 공산당원들은 한 달에 2,400프랑으로 인상하기를 원했지만 재정부 예산부서 요원들(이들은 몰래 우리를 위해 일했다)은 그만큼의 자금 지원은 어렵다는 평가를 내렸다.

다른 하나는 좌파의 공동강령으로 국유화가 예고된 기업 계열사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공산당은 이들도 국유화할 심산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악영향 때문에 프랑스경제의 핵심을 국가가 수용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점에 관해 잘 버텼다. 미테랑이 첫 번째 사항에 대해서는 양보하라고 청할 정도였다. “당신은 한 달에 100프랑을 위해 좌파연합을 망치게 하지는 않겠지요!”

반면 그는 두 번째 사항에 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문제의 전략적 파급효과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그가 권력을 잡으면 원칙에서는 물러서지 않되 주변 정세에 관해서는 유연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 마음에 들었다.

1977년 9월 어느 날 저녁 콜로넬-피비엥 광장에서 공산당과 급진좌파의 지도자들과의 협상이 망칠 조짐을 보이려고 할 때였다. 공산당의 제2인자인 폴 로랑이 느린 말과 흉내 낼 수 없는 목소리로, 정말 웃기는 것이라며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레닌 동지가 스위스에 망명 중이었소. 그는 일을 열심히 했어요. 그의 동지들이 그를 데리고 가서 세르뱅 산의 경치를 감상하도록 했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걸었습니다. 정상 부근에 이르러 모든 사람이 주변 경치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 유명인의 반응을 기다렸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레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스럽군! 정말 한스러워!'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레닌 동지에게 이토록 멋진 경치를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그게 무슨 말인지 설명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 '아, 죄송합니다! 제가 사회민주주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렸다. 모든 시선이 미테랑에게로 향했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손수건을 대고 참지 못하는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같은 날 저녁 몇 시간 뒤 국유화하기로 한 기업의 계열사 문제에 봉착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의 모든 전략이 수포로 돌아갔다. 공산당 없이 좌파는 승리할 수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미테랑은 나를 카메라가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어둠 속을 걸었다. 나는 그가 낙담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이렇게 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어요. 한번 보시오, 공산주의자들은 협상하러 다시 올 거요. 총선에서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오. 그들은 덫에 걸렸어요. 우리는 최소한의 공약을 놓고 그들과 합의에 도달할 것이오. 그리고 다시 우리는 결렬될 것이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다시 돌아와 1981년 좌파연합 후보를 지지할 것이오. 국민이 그것을 원하고, 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들은 노동자계층을 배반할 수 없어요. 이번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불안해하지 마시오. 이것은 마치 인간의 달나라 도착과 같아요.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많이 하지요. 하지만 뒤에 다시 가면 그 이야기를 덜하고, 그리고는 전혀 하지 않아요.”

불확실성기에 발전한 우정

1974년에서 1978년에 이르는 불확실한 기간, 우리의 지적 공모는 우정으로 발전했다. 아무튼 그가 우리의 관계에 관해 언급한 유일한 인터뷰에서 그렇다고 말했다.

우리는 함께 유럽과 미국&#8231;이스라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곳을 여행했다. 일요일 저녁이면 그가 우리 집에 와서 식사하기도 하고, 내가 비에브르가에 있는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의 재능 속에 숨겨진 대단한 이야기꾼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이야기꾼은 시골의 전설, 선량들의 파렴치함, 가장 외진 지역까지 포함한 선거구 획정의 특이한 점 등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었고, 조르주 다얀과 함께 뮌헨에서 히틀러와 달라디에28)가 주고받은 대화를 흉내 낼 줄 알았다.

나는 또한 문필가로서 그의 면모를 발견했다. <뤼니테>지에 보내는 정교한 칼럼을 집필하는 것은 그의 오전 일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것으로 1975년 <지푸라기와 알곡>이라는 책을 발간해 서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 기회에 그는 베르나르 피보의 문학방송에 출연했고, 많은 사람이 그를 다시 보는 기회가 되었다. 나는 이 책이 1974년 대선 전에 나왔더라면 그에게 모자랐던 15만 표를 옮겨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늘 생각했다.

나는 또한 책을 좋아하는 미테랑을 따라 여러 서점에 함께 다녔다. 우리는 여러 시간을 보내며 장정이 아름다운 책들을 쓰다듬고, 희귀본을 훑어보았다. 끝으로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미테랑의 모습을 보았다. 화요일 아침마다 나는 그와 함께 생-자크가의 실내 체육관에서 테니스를 쳤다.

이런 모든 것을 넘어, 프랑스를 사랑하는 미테랑이 있었다. 당시 나는 그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비록 대부분의 프랑스 국민은 그렇지 못하지만, 프랑스는 매우 부유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할 개혁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프랑스가 감당할 수 있는 개혁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진짜 한계는 재정이 아니라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변화하게 만들기에는 너무 어려운 프랑스 국민의 정신 상태입니다.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변화를 가장 주저하는 자들입니다!”

1993년 방한해 의장대 사열을 받고 있는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 ⓒ연합뉴스


1978년 총선 패배후 쏟아진 '미테랑 죽이기' 비난

그리고 1978년 3월의 총선이 다가왔다. 가능성 많은 좌우동거 체제에 관한 어두운 논란과 사회당 경제안의 비용에 관한 이전투구의 싸움이 사전에 벌어져 힘들고 긴장되었다. 1974년처럼 나는 공약에 관계된 측면에서 이 선거전을 지휘했고, 또다시 패배했다.

이 새로운 패배가 많은 사람의 눈에는 미테랑의 정치 생명에 조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분명 사회당은 23%의 표를 얻어 처음으로 프랑스의 제1당이 되었다. 하지만 ‘늙은’ 당수를 겨냥한 비난이 터져 나왔다. 2차 투표일 저녁, 미셸 로카르는 매우 정교하게 다듬은 연설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좌파는 역사와의 새로운 약속을 또 놓치고 말았습니다. 제5공화국 시작 이후 여덟 번째였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엄청난 슬픔에 잠깁니다.”

미테랑을 증오하는 월간 <에스프리>지 편집장 장-마리 도메나크는 일간지 <르 코티디엥 드 파리>에 이렇게 썼다. “좌파는 여전히 제 수준을 찾지 못했다.”

우파 언론과 마찬가지로 ‘좌파’로 불리는 언론에서도 이 기회를 이용해 그를 밖으로 밀어내고 좌파연합도 단번에 끝내려고 시도했다. 예순두 살의 그의 나이와 시대에 뒤떨어진 그의 무능을 부각시켜 그를 정치적으로 살해하려는 기사와 칼럼이 줄을 이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 바로 이들 기자가 대통령 미테랑에게 아첨할 때, 그는 기억을 통해 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그들이 쓴 가장 모욕적인 글의 발췌문을 낮은 목소리로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1978년 9월19일, ‘유럽1’이라는 라디오 채널을 통해 로카르는 또 다시 주장했다. “분명 누군가의 정치 스타일, 누군가의 구닥다리가 심판받은 것입니다. 더욱 진실을 말하고, 더욱 사실에 가깝게 말해야 합니다.”

‘구닥다리’라는 말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니에브르 국회의원의 정치적 생명은 종말을 고한 듯 보였다.

1979년 4월 메츠에서 열린 전당대회 저녁, 그러나 모든 예상을 뒤엎고 미테랑은 당권을 유지했다. 막판에 CERES와 동맹을 맺은 덕분이었다. 그는 파비우스에게 당의 대변인 자리를 제의했다. 나에게는 다가오는 대선공약을 준비하는 임무를 맡는 정세분석 중앙위원직을 제의했다. 파비우스는 수락하고 나는 또 거절했다. 말과 글의 자유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의 첫 만남 이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CERES의 장-피에르 슈벤망이 나를 대신해 이 책임을 받아들였다.

전당대회에서는 승리했지만 파리에 팽배한 미테랑에게 불리한 분위기는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 모든 매체가 그에게 달려들어 은퇴를 종용했다. 가장 혐오스럽고 가장 모욕적인 톱기사가 계속되었다. 로카르와 그의 친구들은 비겁한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미테랑은 가장 잔인한 칼럼들을 읽고 또 읽었고, 가장 심하게 상처를 주는 풍자화들을 마치 그것들을 즐기고 거기서 계속 버티는 힘을 길어 올리기라도 하듯 보란 듯이 자신의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나는 그가 충격을 삭이는 능력과, 어떻게 보면 그것을 받는 희열을 발견했다.

1981년 대선 도전, 그리고 승리. "대단한 역사야!"

1980년 초 미테랑이 또다시 출마하리라는 것을 확신한 나는 장래 선거운동 팀을 구성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내가 하는 대로 두었다.

나는 로카르와의 접촉을 유지했는데, 미테랑은 그를 우파와 공산당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로 여겼다. 우파와 공산당은 힘을 모아 미테랑이 선거에서 거둔 성공을 정치적 승리로 바꾸지 못하도록 했다. 그 가을에 나의 요청에 따라 두 라이벌이 만나기로 합의했다. 두 명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위해 전면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한 절차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오전 11시 무렵 로카르가 비에브르가로 갔다. 미테랑이 나에게 1시간 뒤에 오라고 해서 나는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로카르와 마주쳤다. 그는 매우 상기돼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서로를 이해했다네!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 설명할 수 있었거든. 그가 나를 두고 출마하려고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구먼.”

몇 분 뒤 미테랑은 대담에 관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다.

“우선 평소처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소.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지겨워 나는 종잇장을 구겨 장난치기를 시작했어요. 그것을 뭉쳐 일종의 공을 만들어 자로 쳐올리며 놀았는데, 잘못하는 바람에 그 종이공이 내 책상과 그가 앉아 있는 사이 바닥에 떨어졌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알겠어요? 그가 그것을 주우려고 두 손을 바닥에 대고 엎드리더라고….”

그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해가 갔다. 그는 로카르를 시험했고, 힘겨루기를 한 것이었다. 로카르는 결단코 그의 배포에 맞는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로카르가 경선에서 물러났다. 1981년 1월24일 크레테이 시에서 열린 사회당 전국대회는 미테랑의 출마를 승인했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사회당을 이끌어갈 인물로 리오넬 조스팽을 선택했다.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당권을 다시 잡지 않으리라고 작정한 결과였다. 당시 미테랑은 조스팽을 두고 “공산당이 목소리를 높여도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가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2월3일, 자크 시라크가 -7년 전 샤방 델마스를 배반했던 것처럼 지스카르를 배반하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나라를 후퇴시키는 악화과정을 종식하기 위하여”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여론조사는 미테랑이 임기가 끝나는 대통령에게 아주 많은 표차로 진다고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의 당선을 확신했다. 나는 그의 당선에 대해 유력 여론조사기관의 책임자와 베토벤의 4중주 전곡 녹음 원반을 걸고 내기를 했다. 3월 초 어느 날 저녁, 평소보다 늦게 그의 사무실에는 우리 둘만 있었다. 여론조사는 그가 48%밖에 득표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는 미테랑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당선될 것입니다. 아무튼 나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까?”

그는 미소를 띠며 이상한 대답을 했다.

“나는 당신…, 당신들 모두를 위해 이 일을 하오. 당신이 아는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다른 당면과제가 많아요….”

모든 주제에서 우파를 상대로 한 싸움은 정면대결로 치달았다. 미테랑이 국가의 방송 독점을 불법적으로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유 라디오 방송을 지지하자 경찰이 와서 사회당, 말 셰브르브 주거단지 낡은 집 지붕에 자리 잡은 ‘라디오 리포스트’, 그리고 콜뤼슈가 운영하는 RFM, 친구들 모임이 운영하는 작은 음악 방송국인 NRJ 등 다른 방송국의 문을 부수었다.

3월이 되고, 좌파에게 선거운동은 1974년과 같이 시작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열기는 오히려 덜했다.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파리의 어느 호텔에서 미테랑 뒤쪽에 침울하게 정렬한 선거운동요원과 - 110개의 제안으로 요약되는 - 공약의 소개는 참담했다.

그리고 3월14일, 그의 선거를 망칠 뻔했던 하나의 사건이 오히려 그의 당선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바로 <카르트 쉬르 타블(Cartes sur table: ‘패를 펼치고’)>라는, 당시 텔레비전의 정치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방송에의 출연이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후보는 마지막 자막이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했다. 그때 돌연 한 기자가 그에게 당선되면 사형제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바로 직전 어떤 여론조사가 발표되었는데, 사형제의 유지를 지지하는 쪽이 60%였다. 미테랑 후보는 자신은 이 수치를 알고 있지만, 비록 선거에 패하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양심에 따라 분명 사형제를 폐지하리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노라고 응수했다.

그날 이후 투표 성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퇴임 대통령에 대한 자크 시라크의 공격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별 이변 없이 지스카르가 28%를 얻은 1차 투표가 끝난 다음날, 처음으로 여론조사에서 미테랑이 승리자가 될 것이라고 발표됐다. 나는 우리 집에 선거운동 참모 몇 명을 모았다. 후보의 공약을 법과 조례 안(案)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이 방대한 작업은 열흘 만에 순조로이 끝났다.

긴장이 고조되어야 할 순간인 선거일 5월10 오후 5시 솔페리노가에 선거운동의 주요 지휘자들이 모여 있었다. 조스팽&#8231;랑&#8231;킬레스&#8231;포프랑&#8231;파비우스&#8231;에스티에&#8231;모루아&#8231;베레고부아&#8231;뒤마 그리고 나. 전 해에 죽은 조르주 다얀을 제외하면 1974년 5월부터 뚜렷한 확신은 없었지만 이 순간을 준비하기 위해 매주 목요일 아침 비에브르가의 미테랑 집에 모였던 모든 사람이었다. 하나의 이상과 한 사람에 대한 믿음에 의해 모인 친구들 한 무리가 최악의 상황에서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14%의 인플레이션, 150만 명의 실업자, 400억 프랑의 무역수지 적자, 투기 때문에 위협받는 화폐가치, 위기의 유럽, 냉전에 휘둘리는 국제정세, 그 어느 것도 희망을 주는 것이 없었다.

우리는 전화기 하나가 뎅그렇게 놓여 있는 사회당 서기장의 큰 책상 주위에 둘러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여론조사 기관에서 전화가 올 것이었다. 이변이 없다면 2시간 뒤에는 프랑수아 미테랑이 프랑스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참석한 각자는 다음날이면 프랑스 내각에서 무엇인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36년 이후 첫 좌파내각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에는 아무도 감히 확신을 갖지 못했다.

마침내 전화벨이 울렸다. 저녁 6시20분이었다. 가장 민첩한 조스팽이 수화기를 들었다.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SOFRES의 제롬 자프레의 목소리였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당선되었습니다. 52% 획득했고, 오차는 전혀 없습니다.”

침묵이 이어지다 폭발했다. 모두 얼싸안았다. 리오넬은 샤토-시농에 있는 새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대편 수화기에 그가 나타나기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자, 확실합니다. 당선되셨습니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대단한 역사야, 그래! 대단한 역사야!”

분명 그는 마음속으로 대문자로 시작하는 역사 즉 위대한 역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마디 짧은 문장으로 우리에게 자정 무렵 솔페리노가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빌리면 “지겨운 일을 끝내기 위해” 전화를 끊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텔레비전으로 방송될 그의 첫 번째 연설문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정치적 투쟁과 반목을 넘어 우리 각자의 행동을 심판하는 일은 역사에 속합니다….”

역사, 위대한 역사…. 그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위대한 역사였다.

"국민은 곧 실망하고 우파는 빠르게 회복할 것"

당선자는 수도를 향해 차를 타고 오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우리 편 후보가 아니라 모든 프랑스 국민의 대통령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는 우리가 당선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모험에서 우리 각자가 책임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이 사람의 최고 권력은 태고 적부터 모든 우두머리의 권력과 똑같은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관직과 임무와 역할을 나눠 주는 것이었다.

그는 당선을 누리지 않았다. 그는 솔페리노가에 도착하자 여러 가지 일을 인색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간단하게 발표했다. 이리하여 피에르 모루아는 열하루 뒤에 자신이 총리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대통령비서실장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실망했다.

이상한 기간이 시작되었다. 그 기간 동안, 당선자가 지명하여 즉석에서 구성된 팀이 피에르 베레고부아를 중심으로 정권 인수를 준비했다. 정권인수는 당선자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는 거기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일은 아주 어려울 것이오. 프랑스 국민은 빨리 실망할 것이오. 빨리 행동을 취해 국회를 해산하고 약속한 모든 개혁조치를 실행해야 할 것이오. 전 세계의 금융업자들이 우리에게 맞서 뭉쳐 우리가 더욱 급진적이 되거나 아니면 배반하도록 압박할 것이오. 이 둘 사이를 잘 항해해야 할 것이오. 그러고 나면 경제성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오. 위기는 7년 동안 지속되지는 않기 때문이오. 가장 어려운 일은 통치할 사람을 고르는 일이 될 것이오.”

그는 불안해했다. 그가 마지막 각료직을 떠난 것은 25년 전으로, 참사원 의장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가스통 데페르를 제외하면 우리 중 누구도 장관직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의 공약을 옮긴 법과 조례 안이 정리된 서류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사형제 폐지, 지방분권, 자유 라디오 허가, 경제·복지 활성화, 외환 통제, 국유화, 퇴직문제 등이 포함돼 있었다. 예산국 직원의 과반수가 동원되어 두 달 전부터 준비한 수정예산안이 그 속에 첨부되었다. 300억 프랑의 경기 활성화 예산은 1975년 자크 시라크 정부의 활성화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봉투를 개봉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각이 봐야 할 것이오.”

권력에 관한 그의 구상이 끝났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내각은 통치하고 그는 국가원수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토록 많은 세월을 기다려 왔는데도 그는 조급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뒤 어려운 상황이 한창 진행 중일 때도 내가 너무 놀라고 심지어 화가 날 정도로 그는 보란 듯이 호텔방이나 엘리제궁 조용한 방에 몸을 숨기고 졸라&#8231;모파상 혹은 바르베 도르비의 소설들을 탐독했다.

그는 부수적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은 7월에 나와 함께 G7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오타와에 갈 거요. 안 그래요?”

이리하여 나는 아마도 중요한 일들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5월21일 - 정권 이양의 날이 되었다. 모든 언론이 프랑화의 개연성 높은 평가절하에 관해 구구한 억측을 하고 있는데, 그는 취임식 의식에만 관심이 있었다. 미테랑은 취임 기념식을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기념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헌법평의회 의장 로제 프레 앞에서 선서를 해야 했다.

바로 5월21일 오후 그의 책상에 쌓인 축하 메시지를 훑어보면서 신임 대통령은 생각에 잠겨 큰소리로 내 앞에서 말했다.

“맞아요, 어려워질 거요. 우파는 아주 빨리 회복할 것이고, 좌파의 환상은 흩어질 것이오. 그리고 군대는…. 국회를 당장 해산해야 해요. 로카르는 반대해요. 그는 우선 우파가 내가 지명하려는 내각을 뒤집기를 바라오. 그러면 우리는 선거에서 질 거요! 법학자들은 정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기다릴 수 없어요. 시간이 갈수록 우리한테 불리해요. 국민 여론은 빨리 실망할 것이고,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가장 빠른 시일 내에 통치할 수단을 마련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호응이 사라지고, 개혁이 들어서게 할 수 없으며 우리는 실패하는 것이오.”

"아탈리 당신은 내 옆방을 차지하시오. 책도 계속 쓰시오"

다음날인 5월22일, 선거운동에 참가했던 상당수 미테랑의 보좌관들은 공식적으로 그들의 직위에 추인되기 훨씬 전에 엘리제궁 사무실을 나누어 차지했다. 오후 늦게 대통령은 나를 오라고 했다. 나는 약간 토라져 집에서 그의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특별보좌관’이 되기를 요청하며 말했다.

“당신은 바로 옆 사무실을 차지하시오.”

드골대통령 시절에는 부관들이 있었고, 퐁피두 시절에는 각료회의가 열리던 곳이었다. 그가 자세히 설명했다.

“당신은 나에게만 소속된 거요. 모든 장관과 보좌관들과 접촉하시오. 국제정치든 국내정치든 당신은 당신과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심의할 수 있소.”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은 내가 여기 있는 때까지 있어야 해요. 그리고 책 쓰는 일을 그만두지 마시오. 기분전환도 하고, 여행도 하시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이어갔다.

“보좌관들을 거느리시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고르시오. 당신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소.”

그리고 주저하다 이 말을 내뱉고 말았다.

“당신한테 부탁하는 오직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여자들이오. 그래요. 진지하게 하는 말이오. 여자들 말이오! 여자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끌려요. 그들은 그런 사람에게 접근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들은 당신한테 접근하기 위해 모든 짓을 다할 거요. 조심하시오. 조심해요!”

나는 대통령 집무실에 이웃한 멋진 사무실에 자리 잡았다. 그곳에는 이전에 제1통령을 위해 만든 탁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제4공화국 말까지 모든 공화국 모든 대통령이 사용하던 집무 가구였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와서 합석하여 뱅상 오리올은 모든 대화를 녹음하기 위해 그 탁자에 녹음기를 설치했었다고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책상 서랍 두 개를 열었다. 실제로 그 중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더 짧았다. 분명 거기에 녹음기를 두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메모할 것을- 그리고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발간하기를 부탁하오.”

나는 그러니까… 회상록 필자에 임명된 것이었다.

토요일인 다음날 아침 미테랑은 처음으로 자신의 초창기 보좌관들을 집무실로 소집했다. 오래전부터 우리 모두를 알고 있는 미테랑이 이렇게 말을 맺었다:

“여러분이 여기 있는 것은 내각이 하는 것에 대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을 내게 말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자리에서 활동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번이 여러분이 나와 갖는 처음이자 마지막 회의입니다. 여러분은 법적 존속을 갖지 않고 내가 확실한 지침을 주는 경우가 아니면 내 명의로 명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이 순간부터 그와 나, 우리는 하루하루 꼬박 10년 동안 함께 일했다. 이번에는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면서였다. 그것은 너무도 놀랍고 실망스럽고 흥분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계속>
도서출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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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rite1001

    이 글을 보시는 님께 호소합니다!!
    요즘 수도권 시내 버스에서도 광고하고 있는 유투브 컨텐츠에요.
    부디 짬을 내셔서 확인하시고 바른 판단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눅17:26~30).
    https://youtu.be/2QjJS1Cnr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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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향기

    https://youtu.be/n1LyKzTAhfg
    제대로 봐야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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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박

    진짜 대단하다
    https://youtu.be/bQ_wJeV7M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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