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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청렴할 수 없으면 떠나라"

[전문] 우리가 다시 경청해야 할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가르침

19일 서울대 총장에서 물러난 정운찬 교수는 평소 독일의 빌헬름 레프케의 저서 <휴머니즘의 경제학>에 나오는 "나라의 장래가 아무리 암담하더라도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이상 희망은 있다"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레프케가 말한 세 부류란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 '법을 지키는 법관',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인'을 가리킨다. 정 교수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과연 이 세 부류의 사람이 제 책임을 다하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하곤 한다.

요즘 정 교수의 개탄이 새삼스럽다. 그의 탄식처럼 이 '세 부류'에서 연일 크고작은 탈선이 목격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김홍수 게이트'로 불리는 사상 최대의 법조비리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물론 다 그런 건 결코 아니다. 제 역할에 충실하려는 법조인들이 더 많다. 아니, 다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년 새 비슷한 사건이 계속 터져나온다는 것은 분명 적신호다. 이때 법조인들이 다시 돌이켜 봐야할 사표가 있다.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의 가르침이다. 법조계의 큰 어른이자, 우리 사회의 사표가 가인이다. 물론 법조인들은 그분을 너무 잘 안다. 사법연수생 시절부터 그분의 가르침을 귀가 따갑게 듣곤 하기 때문이다.

이에 그 분의 생전 가르침을 다시 들어보고자 한다.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이 80년대 쓴 <가인 김병로 평전> 가운데 가인의 청렴, 강직을 보여주는 부분(4백4~4백12쪽)이다. 물신의 지배 아래 사는 이 시대 모두가 다시 경청해야 할 가인의 가르침이다. 가인의 손자인 김종인 박사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주>


청렴과 강직의 표본

김진배는 가인을 "청렴, 강직의 표본"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조금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었다.

미군정 사법부장 시절 이미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던 그는 우리 정부가 세워지고 사법부의 수장이 되자 더욱 청빈하게 처신했다. 정부 수립 직후 박봉에 시달리던 한 시골 판사가 사표를 들고 찾아가자 "일제 때나 미 군정 때도 판사를 지낸 당신이 독립정부가 세워진 이 마당에 협조를 않겠다니 무슨 말이냐. 나도 죽을 먹으며 산다. 함께 참고 고생해 보자"고 간곡하게 만류해 그 판사가 사표를 거두어 돌아갔다고 하는데, 가인에게 청빈의 정평이 있었기에 그 만류는 호소력을 가졌던 것임은 물론이다.

김진배의 전기(<가인 김병로>), 이영근의 평전(<법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원로 법조인들의 회고록은 가인의 청빈을 입증해 주는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우선 개인 생활에서 낭비가 없었고 절검에 앞장섰다. 대법원장 자신의 가족들까지도 점심은 국수로 때우기가 일쑤였다. 김진배는 이렇게 썼다.

실제로 그는 그의 말년까지도 비싼 화장지를 사서 쓰지 않고 신문지를 손바닥보다도 더 작게 잘라서 화장실에 꿰어 놓은가 하면 웬만한 손님이 와서 커피나 홍차 대신 엽차 한잔을 대접하면 그만이었고, 담배 한 가치를 두 토막으로 잘라 피우는 등, 괴벽하리 만큼 절제를 한 사람이다.

남창동 대법원장 관사는 기름 난방시설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만약 자기가 기름을 때게 된다면 다른 법원장 관사에서도 기름을 때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판사가 있는 고위법관과 그 아래 법관들 사이에 공평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대법원장 자신이 기름을 때지 않고 톱밥이나 연탄을 땠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김진배의 <가인 김병로>에서)


담배 한 개비, 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이라고 아껴 쓰는 가인의 절약 정신은 괴팍하리만큼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지만, 대법원장 재임 근 10년 동안 반 토막 수정 도장으로 결재를 해온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김병로(金炳魯) 라는 한문 석자로 새겨진 이 수정 도장은 재임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수정 윗부분이 부러져 반 토막이 되었다.

대법원장 초기에는 결재할 때 이 도장을 직접 찍었으나 후에는 대법원장이 보는 앞에서 관계자에게 찍도록 했는데, 반토막 도장이니 찍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대법원장님, 결재 도장 하나 다시 파죠"라고 진언하자, 가인은 "그것 하나 제대로 찍을 기술이 없나"라고 웃어 넘기는 바람에 다시는 도장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가인의 인감 도장은 몇 십 년이나 썼는지, 이름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가인은 이 닳아진 목도장을 당신의 임종 때까지 평생동안 썼다고 한다. 한번은, 대법원장을 가까이에서 보신 노세우(盧世遇) 회계과장이 인감 도장을 좋은 수정으로 파자고 건의하자, "재산을 날마다 사고 파는 것도 아닌데, 1년에 몇 번이나 쓴다고 비싼 수정 도장을 쓰겠는가"라며 사양했다고 한다. 큼지막한 대리석에 이름 석 자를 새겨 대문 앞에 붙이는 것마저도 그는 싫어했다.

이러한 가인이 국산품이 아닌 외제품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국산품의 질이 워낙 떨어진 때라 웬만한 집 아이들은 외제 학용품을 쓰는 것이 예사였던 때에도 가인은 손자나 손녀들에게 꼭 국산품을 쓰게 했다. 한 손녀가 급우들에게 우리 할아버지가 대법원장이라고 뽐내보아야 "진짜 할아버지라면 어떻게 그런 나쁜 물건만 사주시겠느냐"고 반문을 받았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법원에서 물품을 구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직원들이 짜고 "연필 하나만 해도 깎으면 부러지고 펜촉 하나만 해도 종이까지 긁히니 일을 하다 보면 신경질이 나고 돈으로 치더라도 외제를 쓰는 것이 훨씬 경제적입니다. 더구나 다른 관청에서는 다 외제를 쓰는데 우리만 나쁜 국산을 쓰니 그런 어려움은 세상에 누가 알아주겠습니까"라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가인은 자기도 손자와 손녀가 국산 연필이 얼마나 나쁘고 국산 종이가 얼마나 나쁜가를 울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수십번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청이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국산품을 쓰지 않으면 우리산업은 누가 키우냐면서 부하 직원들을 타일렀다고 한다.

공과 사의 구별 또한 엄격했다. 가족들 가운데에서도 대법원장 승용차를 타본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초등학교 다니는 손자들이 그 좋다는 차를 한번 타려고 해도 못 타게 했다. 언젠가 추운 겨울날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손자에게 대법원장 승용차를 태워준 운전 기사는 "이 사람아! 이 차가 대법원장 차지 손자 차인가"라는 나무람을 들어야 했다.

가인의 며느리 부탁으로,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른 가인 손자의 성적을 알아봐 주려 학교 에 다녀온 비서관 이강원 역시 "자네는 대법원장 비서관인가 내 며느리 비서관인가"라는 호통을 들어야했다.

간혹 친척이 찾아와 재판에 관한 얘기라도 떠내면 가인은 "집안에 대법원장이 둘이냐"고 핀잔을 주어 입을 막았다. 생질녀가 토지 관계로 소송중인 동안에는 집에 놀러도 못 오게 했다. 가까운 사람의 인사 문제는 아예 모른 체했다. 자신의 변호사 사무원으로 10여 년이나 데리고 있던 백원신(白元信) 씨가 사법서사 인가를 얻지 못해 애태우는데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남에게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받지 않았다. 가인 친구의 아들이 겨울에 한강에서 잡은 잉어 다섯 마리를 들고 와 받아놓은 것도 "만에 하나라도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고 꾸중했고, 그 바람에 집을 찾아 되돌려 주느라고 고생했다고 비서를 지낸 김성계(金星界) 씨는 털어 놓았다. 추석이나 연말 때에 의례적으로 보내는 고기 몇 근이나 옷감 한두 가지도 모두 돌려보냈다. 손녀사위인 제12대 국회의원 이택돈(李宅敦) 변호사는 "그분은 물욕과 담을 쌓은 분으로, 항상 법관까지 돈을 먹으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고, 장손 김원규 씨는 "할아버지는 청백리 황희(黃喜)정승이 얼마나 멋있게 살다 갔느냐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회상했다.

가인은 기관 운영에 있어서도 절검을 앞세웠다. 김갑수의 회고에 따르면, 가인은 "대법원장실조차 제대로 설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법관 각자에게 사무실을 주어야겠다고 건의해도, "따로 방을 쓰게 되면 심심해서 어떻게 할 것이냐? 한 방을 쓰면 합의하기도 좋을 텐데 속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치였다". 대법관에게도 각각 승용차가 있어야겠다는 건의에 대해서도 "법관이란 집에서 법원에나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것인데 차는 해서 무엇하느냐"고 이야기했다. 고재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가인 재임중 입법부와 행정부의 장(長)에 비해서 대법원장에 대한 판공비나 접대비 같은 경제적 대우는 형편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것에 거의 무관심이었다. 우리 젊은 사람들은 심히 불만으로 여겼지만, 그분은 상시 우리나라 재정형편으로 보아서는 현재 받는 것도 과한 것이라고 우리를 나무랐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행정 관청에서는 연도 말에 예산이 남으면 소속직원을 위로 출장 보낸다든지 또는 다른 명목을 붙여서 다 써버리지만, 가인은 남은 예산을 고스란히 국고에 돌리곤 하였다.(고재호의 <법조 반백년>에서)

그러므로 예산 집행에 관한 한, 가인은 부하 직원들로부터 가장 인기 없는 상사였다. "예산을 그렇게 아끼던 일제 때 재판소 사람들도 연말이 되면 예산을 무슨 명목으로든지 다 쓰는 것이 상례고, 사무비로 쓸 명목이 없으면 비품이라도 사는데 이렇게 짜게 법원을 운영하시면 누가 여기서 일하겠습니까"라고 불만을 표시하면, "일본놈이 어떻게 했든지 다른 관청에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우리만이라도 한 푼의 돈일지언정 아끼는 데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니냐, 남의 원조로 예산을 짜서 쓰는 판에 우리가 물건을 아껴야지, 독립했다고 선포만 해놓으면 그것이 나라인가? 돈 없어서 일 못하겠으면 그만두고 나가라"고 호통을 치던 모습을 1950년대 중반 법원행정처 회계과장이었던 노세우는 회고했다.

이러한 자세의 가인인지라 공금에 대해서는 어떻게나 철저한지 줄 때나 받을 때 한 장이라고 손수 세어서 주고 세어서 받았다. 돈 관계 문서를 볼 때에도 1원짜리 끝 숫자 하나까지 꼬박꼬박 챙기는 성미였다. 그것은 상대방이나 아랫사람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손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나 아랫사람들이 게을러서 돈을 허술하게 다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꼼꼼히 법원 살림을 살면서도 가인은 "예산이 5할 가량은 낭비되고 있다. 자기 재산이라면 그렇게 함부로 쓰지는 못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주의를 주었다. 시내 출장에 차량을 사용할 때도 대법원자인 자신이 휘발유 배정표에 서명하면서 신청 분량보다 적게 내주어, 젊은 법관들은 행정부의 계장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고 불평을 했다. 자동차 수리에도 대법원장의 결재가 있어야 했다.

사법부의 어른이면서도 한동안 정보비가 없었다. 노용호(盧龍鎬) 법원행정처장이 정부쪽에 요청하겠다고 이야기해도 "정보비는 정부에서 알아서 계상을 해주어야지 우리가 요청할 수는 없다. 우리가 요청하면 정부에서는 법원에 부탁을 해 오게 되고 전보비가 마치 꼬리 달린 돈으로 쓰일 우려가 있다"면서 끝내 거절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국회의 국정감사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1949년도 보고서는 "법원의 예산 문제에 있어서, 원래 법원은 보수적이고 소극적이며 더욱이 지나친 양심과 정직으로 인해서 예산 획득이 대단히 졸렬하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청사 수리를 위한 예산조차도 획득하지 못하였는바, 그 예로서 판결 서류는 영구 보존인데도 불구하고 용지난으로 개인의 편전지(便箋紙)에다 판결서를 기록한 점을 발견하였다"라고 지적하고, "향후 예산 투쟁을 좀더 적극적으로 해주기 바란다"고 권고한 것이다. 1952년도 국정감사 보고서도 "전쟁을 편승한 부면(部面)이나 일반 행정 관청에서는 경비가 비교적 윤택함에도 불구하고 법원 등은 소송 조서를 뒤집어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이 있은 뒤 정보비는 계상되었는데 한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변호사 출신의 윤길중(尹吉重) 의원이 대법원장의 정보비를 어디에다 쓰느냐고 묻자, 김동현 대법관이 "지방 법원장 등이 올라오면 식사대접이나 한다"고 대답해 법제 사법위원들이 폭소를 터뜨리면서도 가인의 인품에 새삼 경복했다고 한다. 그것은 회의비나 접대비 항목에 들어 있는 돈으로 쓸 일이지 대법원장의 정보비에서 나갈 필요가 없었는데도 가인이 자기 몫을 써가면서까지 다른 항목의 공금을 아꼈기 때문이었다.

남은 정보비도 아랫사람들을 위해 썼다. 그 좋은 예가 1956년 설날 때 전국 법원장들에게 내려보낸 떡값이었다. 가인이 정보비를 쪼개 나눠준 것임을 안 법원장들은 일부를 다시 떼어 답례로 고급 제니스 라디오 한 대를 선물했다고 한다.

나라 살림을 철저히 아껴 살려고 한 그는 앞으로 있을 법원 청사의 확장이나 신축에 대비하여 법원 주변의 국유재산 수천 평을 법원으로 넘기겠다는 정부 당국의 호의마저 사양했다. "범죄가 줄어들고 소송이 적어야 좋은 세상이지, 청사만 늘려서 무엇하겠는가?"라는 태도였다고 한다. 발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인의 이러한 태도가 꼭 본 받을 태도라며 무조건 추종하는 것이 좋겠느냐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직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 정신을 깊이 생각해 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청렴할 수 없으면 떠나라"는 훈시

가인은 자신이 수범을 보인 청렴을 법관들에게도 철저히 요구했다. 환도 직후인 1953년 10월 12일에 열린 제 1회 법관 훈련회동에서 가인은 '법관의 도(道)'에 대해 강의했다.

그는 우선 "법관된 자로서는 어떠한 정실에 끌려서는 안 되겠다"고 전제하고 "어떠한 사건에 있어서든지 친분과 감정 등을 초월하여 이성에 입각한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법관의 몸가짐을 설명했다. 첫째, 세상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둘째, 음주를 근신해야 하겠다는 것, 셋째, 마작과 화투 등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 넷째, 어떠한 사건이든지 판단을 하기 전에 법정 내외를 막론하고 표시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 다섯째, 법률 지식을 향상시키고 인격 수양을 해야 하겠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

이 훈시에서 가인은 "법관이 일반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법관으로서는 최대의 명예 손상이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명예 실추는 법관 전체의 명예 실추가 되는 것입니다. 법관은 양심과 이성을 생명처럼 알아야 하며 이를 굳게 지킴으로써 법관된 책임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라는 금언을 남겼다.

반년 뒤인 1954년 3월 20일 열린 1954년도 법관 훈련 회동에서도 가인은 법관의 자세를 강조했다. 그는 우선 "현실을 직시할 때, 세상의 모든 권력과 금력과 인연 등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우리들을 유혹하며 우리들을 정궤(正軌)에서 일탈하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내 마음이 약하고 내 힘이 모자라서 이와 같은 유혹물들에게 유혹을 당하게 된다면 인생으로서의 파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법관된 존엄성으로 비추어 보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경고하고 "세상 사람이 다 부정의에 빠져 간다 할지라도 우리 법관만큼은 정의를 최후까지 사수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격려했다. 그는 이어 "법원도 썩었다" 또는 "법관조차 믿을 수 없다"라는 "불미스러운 말들"이 들려오지 않도록 법관은 노력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가인의 이러한 훈시에도 불구하고 1954년 9월23일 서울지방법원장으로 있던 김○○ 씨가 사건 청탁을 둘러싸고 신○○ 변호사로부터 45만 환을 받았다는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일이 일어났다. 가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는 다음 달인 10월 11일 전국 법원 수석 부장판사 회의를 소집하고 "사법부도 병들고 말았다고 하는 사실 등은 사법의 장래에 대한 일대 경종이 아닐 수 없으며, 최후로 우리 사법부마저 이러한 비경(悲境)에 다다르고야 말았다는 것은 참으로 통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고 전제하고 "사법관으로서의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사법부의 위신을 위하여 사법부를 용감히 떠나야 합니다"라고 질타했다.

법관은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는 가인의 가르침은 1957년 4월 26일에 열린 1957년도 사법 감독관 회동에서도 되풀이되었다. 그는 "지금 사법관은 고립무원한 실정 아래 있습니다"라고 호소하면서, "사법관들은 짝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사법관들은 오직 '정의의 변호자'가 됨으로써 3천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법의 권위를 세우는 데 휴식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매듭지었다.
임지욱 기자

댓글이 2 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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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것이 힘이다
    https://youtu.be/2QjJS1Cnr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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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처녀

    https://youtu.be/bQ_wJeV7M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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