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계급을 가른다”
[기고] 문재인 정부는 어느 편인가
오래 된 자료를 정리하다 눈이 번쩍 뜨이는 제목을 접했다. 2010년 2월 11일 한겨레신문의 인터뷰 기사였다. 손낙구의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에 대한 인터뷰 기사다.
손낙구는 이 책에서 “직업이나 소득을 기준으로 한 계급이 아니라 재산 소유를 기준으로 계급을 구분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계급”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10년이 다 돼가는 오래 전 이야기인데도 강렬하게 와 닿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그 말에 딱 들어맞기 때문일 것이다.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 몇 채를 소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집이 어디에 위치하는지가 그 사람의 경제적 지위, 즉 “계급”을 결정하는 데 지금처럼 중요했던 적도 없었다.
보수는 “자본”을 편들고, 진보는 “노동”을 대변한다
어느 사회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뚜렷이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 의해 사회구성원들이 둘로 나뉘는데, 자본주의사회가 출현한 이래 그 기준은 ‘생산수단을 소유하느냐 아니냐’였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계급이 그렇지 못한 노동자계급을 고용하여 생산을 하고, 생산물을 판매한 다음 그 판매대금을 분배하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다. “계급”이란 말이 의미하듯 둘 사이에는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는데, 그 불균형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곳은 분배에서다.
고용주로서 힘의 우위에 있는 자본은 노동이 생산에 기여한 몫을 다 주지 않으려 하고, 노동은 자신의 몫을 받아내려 할 테니, 두 계급 간의 갈등 혹은 투쟁은 필연적인 결과일 터이다.
“계급”이나 “투쟁”이란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다. 주류경제학자들이 그렇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힘의 불균형이나 투쟁이 자본주의시스템에서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한다며 이런저런 복잡한 이론을 들이대지만, 현실을 직시하면 계급과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직접 보게 된다.
이명박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비즈니스 프랜드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고 그 후 5년간 일관되게 실천했다. 기업과 친구가 되겠다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노골적으로 “자본”의 편을 들겠다는 선언 아닌가. 박근혜의 노골적인 ‘친재벌정책’과 거기에서 파생된 ‘노동개혁’도 이와 대동소이한 ‘자본 편들기’였다.
이와 정반대 입장에 선 것이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이다. 기업의 몫인 이윤을 줄이고 노동의 몫인 임금을 늘리겠다는 것이 소득주도성장론의 본질이다.
지난 10여년을 돌아보면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은 제각각 자본과 노동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는 정책을 국가경제의 핵심으로 삼았던 것이다.
“집”이 정당 선택의 기준이다
손낙구는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에서 사회구성원의 이해를 가르는 기준으로 소득보다 재산, 그 중에서도 집이 더 중요해졌다고 주창하였다. 따라서 계급의 구분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2002년에서 2008년까지 8년간 선거의 투표결과를 토대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직업이나 소득을 기준으로 한 계층분류보다 자산을 기준으로 한 계층분류를 사용할 경우, 계층과 투표행태 사이의 관계는 거의 일차함수 형태의 높은 상관성을 나타냈다.”
여기서 자산이란 “집”이다. 집의 소유가 지지정당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사회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의미다.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이익 중 가장 큰 부분을 소득이 아니라 집이라고 여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몇 번의 선거에서의 투표결과를 근거로 “계급”의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다. 아직은 가설의 단계라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 평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설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우리 사회의 어젠다가 노동과 자본의 갈등에서 재산소유의 갈등으로 바뀌어야 하고, 새로운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도 형성되어야 한다. 실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다주택 자산가와 무주택자 간의 ‘기울어진 운동장’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좌우하는 것이 임금이듯 주택소유자와 무주택소유자의 이해를 가르는 것은 “집값”이다. 집값이 오르느냐 내리느냐에 따라 두 계급간의 부의 배분이 달라진다. 임금이 오르는 만큼 자본가의 이윤이 감소하듯 집값이 하락하는 만큼 주택소유자의 부는 감소한다. 그리고 어느 한쪽의 손실과 똑같은 금액이 다른 쪽의 이익이 되는 것 또한 동일하다.
이 대목에서 솟는 의문이 있다. “계급”이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는 사회구성원의 집합체다. 그러므로 각 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다시 말하면 상대 계급의 이익을 줄이기 위해 담합하여 행동한다. 마치 경영자총연합이나 전경련과 같은 자본가단체가 구성되고, 노동조합이나 노총과 같은 노동자단체들이 형성되어 임금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듯 말이다. 물론 자본과 노동의 계급이 생산과정에서 조직화되어 있는 것과 달리 집의 소유에 따른 계급은 조직화가 쉽지 않은 면이 있다. 그러나 이익이 있는 곳에 항상 행동이 있게 마련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강자들이 항상 우위를 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체제 형성의 초기국면을 탐구했던 아담 스미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고용주는 임금을 올리지 않으려고 언제 어디서나 자기들끼리 은밀하게, 하지만 한결같이 하나로 뭉친다.···물론 이러한 고용주의 단결에 대한 이야기는 밖으로 새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비밀리에 행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실로 자연스런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용주는 임금을 현행수준보다 아래로 떨어뜨리기 위해서 특별한 협약을 맺곤 하는데, 이런 협약은 실행에 옮겨지는 순간까지 극도로 비밀에 붙여진다.”
임금이 아니라 집값이 계급간의 이해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 현실에 이 이야기를 대입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다주택 자산가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들끼리 은밀하게 뭉친다. 사회적 강자인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활용하여 집값을 적정수준보다 더 높게 끌어올리기 위해 행동한다. 학자는 집값 상승을 위한 논리를 만들어서 전파하고, 정치세력은 다주택자에게 유리한 법을 제정하며, 관료들은 집값을 끌어올리는 정책을 실행한다. 또한 언론은 집값 상승을 조장하는 여론을 조성한다. 물론 이런 담합과 노력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나오지 않는다.”
지난 3년여 집값 급등을 고통스럽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문재인정부는 어느 편인가?
이들의 반대쪽에 있는 무주택계급은 어떤가? 학계와 관료는 물론 언론에서도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곳을 찾기 어렵다. 사회적 약자인 무주택계급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다.
그나마 기댈 곳은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밖에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자본과 노동의 투쟁에서 노동의 편임을 천명한 문재인정부이기에 그런 기대는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실행한 정책으로 판단하건대 집권세력이 무주택자보다 다주택자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집값 폭등으로 무주택자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기고, 엄청난 세제혜택으로 대한민국을 ‘다주택자의 천국’으로 만들었음을 보면, 새로운 계급 간의 싸움에서 다주택자 편에 섰음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송기균 송기균경제연구소(blog.daum.net/kig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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