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아, 미안허데이...”
<인터뷰> 개구리소년 실종-사망사건 아버지들
우종우(55)씨는 다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지난 달에 이어 근 한달만에 다시 서울로 가는 길이다. 모 방송국에서 부른다기에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차창 밖 세상은 너무나 달라졌지만 우씨의 일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철원(당시 13세)이가 사라져버린 1991년 3월 26일 그 후부터는...
우씨와 서울행 기차에 오른 김현도(59)씨는 벌써 환갑을 바라본다. 그의 나이 마흔 넷이던 지난 91년에 아이를 잃고 이제 15년의 세월이 흐르고야 말았다. 집 앞 와룡산으로 개구리를 잡아오겠다고 나섰던 영규(당시 11세)의 해맑은 웃음이 세상에서 본 마지막 아들의 뒷모습일 줄이야... 그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이것이 이제 그에게 현실이 돼버렸다.
‘철원아, 호연아, 영규야, 찬인아, 종식아...’ 골백번을 고쳐불러도 돌아오지 못할 아이들의 이름을 그들은 또 나즈막이 불러본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하나...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달라고 수천번의 인터뷰를 해온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점심 나절이 다 돼서였다. 국수 한 그릇 간단히 말아먹고 방송국이 있는 목동으로 향했다. 국수로 점심을 때우면서도 현도씨는 자꾸만 입맛을 다셨다. 점심이 못 마땅해서가 아니다. 이제는 밥보다 소주 한 잔이 그를 버티게 해 주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런 현도씨를 종우씨는 나무란다. “방송국 선생님들 앞에서 술냄새 풀풀 풍기면 되나? 녹화끝나고 한 잔 하꾸마” 그러나 종우씨가 어찌 현도씨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종우씨와 함께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 난지도, 외딴섬, 지방 소도시 동네 구석구석 훑고 다녔던 현도씨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냐 말이다.
다섯 아이 실종 후 40개월 넘게 전국 돌아다녀...
아이들이 사라진 1991년 3월 26일 이래로 무려 40개월이 넘는 3년 6개월 가량을 다섯 아비들은 트럭에 아이들의 사진을 걸고 찾아헤맸다. 아이들이 쓰레기더미에 묻혀있다해서 난지도도 뒤져보았고, 섬에 팔려가 새우잡이를 하고있다해서 3시간여를 배를 타고 까마득한 섬마을도 훑어보았다. 암만 황망한 제보에도 그들 다섯 아비는 한걸음에 내달려갔다.
아이들을 찾느라 돈도 바닥난 그들은 밤에는 가장 허름한 여인숙에서 새우잠을 자야했고, 낮에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했다. 그렇게 40개월을 버텼지만 결국 아이들은 실종된지 11년 6개월만인 지난 2002년 9월 26일, 개구리를 잡으러 간 바로 그 와룡산 기슭에서 이끼 낀 유골로 발견되고 말았다.
“안 믿었십니다. 우예 믿을수 있는교? 뼈쪼가리 몇 개 가지고 (경찰이) 우리 아들(애들의 경상도 방언)이라는 데 그걸 우예 믿는교? 그란데 우리 아가 입고나간 옷을 보고...휴...” 종우씨는 이제 더 내어줄 눈물도 없다. 눈물로 보낸 지난 15년의 세월을 두고 더 흘릴 눈물이 없는게다.
“종식이 집을 파보라” 졸지에 살인자로 내몰린 종식이 아버지...끝내 간암으로 사망
아이들을 잃고 방황했던 지난 15년의 세월 중 그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기억은 지난 1996년 1월의 일이다. 실종된 다섯 아이들의 주검이 종식(함께 실종된 다섯 아이들 중 한명)군의 집에 묻혀있다는 것. 심리학자 김가원씨의 이같은 주장으로 경찰은 종식군의 아버지 김철규씨의 집안 구석구석을 굴삭기로 내다팠다.
“우리가 아이라(아니다) 캤거든... 아인데(아닌데), 진짜 그건 아인데 김 박사 실수하는기라 캤는데 (경찰이) 그래 팠 뿌데...” 현도씨는 그 날의 기억이 너무나 죄스럽다. 졸지에 살인누명을 쓴 종식이의 아버지도 안타까웠지만 그 날 이후로 홧병을 얻어 결국 간암으로 철규씨가 2001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유해도 못보고 철규(사망 당시 49세)씨는 그렇게 세상을 버렸다. “문디 자슥...1년만 더 버티제. 1년만 버티고 아들 유골이라도 보고 죽제...” 종우씨는 먼저 간 친구 철규씨가 더 원망스럽다. 죽은 다섯 아이들도 절친한 친구였지만 다섯 아버지들 역시 둘도 없는 형제같은 사이다.
사소한 일에도 부부다툼...서로 원망...‘깨져 버린 가정’
그러나 이 보다 더 그들을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소한 일에도 부부 다툼이 잦은 가정 불화다.
“부부간에 안싸운 사람 없심다. 무슨 일만 있으면 서로 원망하지예. 눈만 마주치면 서로 짜증내기 바쁩니더” 현도씨는 아이들이 실종된 이후로 다섯 가정은 철저히 파탄났다고 하소연했다. 벌써 한 가정은 부부간 불화가 심해 헤어졌다.
남아있는 아이들에게도 못할 짓이긴 매한가지다. 죽은 아들 영규의 위로 딸을 둔 현도씨는 딸의 중.고등학교 졸업식에 단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철원이 위로 아들 하나만 있는 아버지 종우씨도 마찬가지다.
“애들은 아예 부모가 아파할까봐 내색도 안합니다. 죽은 동생얘기 일체 안하지요. 나는 뭐 그 심정 모르겠십니까? 아이 찾아다니느라 잘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잘 커준 아들이 고맙지요” 종우씨는 먼저 간 아들을 가슴에 묻고 남아있는 아들을 고아아닌 고아로 돌봐주지도 못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미안허데이...”
방송국 녹화가 끝난 것은 오후 4시가 다 돼서였다. 녹화를 끝내고 방송국 근처 공원에서 만난 현도씨와 종우씨는 방송국 옆에 즐비한 빌딩숲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이고 높데이. 저리 높네. 으리으리한 건물에서 넥타이 딱 매고 일할 맛 나겠네” 현도씨는 수십층에 이르는 주상복합 건물을 보며 부러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부러운 것은 하늘에 닿을 듯한 저 건물이 아니다.
‘우리 아이도 살아있었다면... 저 휘황찬란한 건물 한 편에 자리 딱 꽤차고 서류뭉치 들고다니며 폼나게 일했을텐데...’ 아버지가 진정 부러운 것은 바로 여느 아버지들처럼 아들이 첫 월급 탓다고 용돈 받아보는 일, 바로 그 일이 아니었을까.
종우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가방사이로 흐트러진 기자의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철원이가 살아있었다면 딱 기자와 비슷한 또래였을 텐데... 그 안타까운 마음에 종우씨는 몇 번이고 옷을 매만지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기자를 바라보았다.
개구리소년들의 공소시효 15년이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3월 25일 자정이 지나면 법적으로는 이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렇게도 국회의원 나리들을 부여잡고 공소시효 연장해 달라고 애걸복걸했건만 이제는 그마저도 허사가 돼 버렸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흐릿해지고 그만 포기할 때도 된 거 아니냐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내는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범인을 잡아 아이들의 원혼이라도 달래주어야 하는데...” 끝내 현도씨와 종우씨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철원아! 호연아! 영규야! 찬인아! 종식아! 미안 허데이... 이 못난 아버지를 용서해다오”
23일, 아이들이 숨져간 대구 와룡산 기슭에서 위령제를 준비하는 아버지들은 또 한번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우씨와 서울행 기차에 오른 김현도(59)씨는 벌써 환갑을 바라본다. 그의 나이 마흔 넷이던 지난 91년에 아이를 잃고 이제 15년의 세월이 흐르고야 말았다. 집 앞 와룡산으로 개구리를 잡아오겠다고 나섰던 영규(당시 11세)의 해맑은 웃음이 세상에서 본 마지막 아들의 뒷모습일 줄이야... 그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이것이 이제 그에게 현실이 돼버렸다.
‘철원아, 호연아, 영규야, 찬인아, 종식아...’ 골백번을 고쳐불러도 돌아오지 못할 아이들의 이름을 그들은 또 나즈막이 불러본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하나...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달라고 수천번의 인터뷰를 해온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점심 나절이 다 돼서였다. 국수 한 그릇 간단히 말아먹고 방송국이 있는 목동으로 향했다. 국수로 점심을 때우면서도 현도씨는 자꾸만 입맛을 다셨다. 점심이 못 마땅해서가 아니다. 이제는 밥보다 소주 한 잔이 그를 버티게 해 주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런 현도씨를 종우씨는 나무란다. “방송국 선생님들 앞에서 술냄새 풀풀 풍기면 되나? 녹화끝나고 한 잔 하꾸마” 그러나 종우씨가 어찌 현도씨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종우씨와 함께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 난지도, 외딴섬, 지방 소도시 동네 구석구석 훑고 다녔던 현도씨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냐 말이다.
다섯 아이 실종 후 40개월 넘게 전국 돌아다녀...
아이들이 사라진 1991년 3월 26일 이래로 무려 40개월이 넘는 3년 6개월 가량을 다섯 아비들은 트럭에 아이들의 사진을 걸고 찾아헤맸다. 아이들이 쓰레기더미에 묻혀있다해서 난지도도 뒤져보았고, 섬에 팔려가 새우잡이를 하고있다해서 3시간여를 배를 타고 까마득한 섬마을도 훑어보았다. 암만 황망한 제보에도 그들 다섯 아비는 한걸음에 내달려갔다.
아이들을 찾느라 돈도 바닥난 그들은 밤에는 가장 허름한 여인숙에서 새우잠을 자야했고, 낮에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했다. 그렇게 40개월을 버텼지만 결국 아이들은 실종된지 11년 6개월만인 지난 2002년 9월 26일, 개구리를 잡으러 간 바로 그 와룡산 기슭에서 이끼 낀 유골로 발견되고 말았다.
“안 믿었십니다. 우예 믿을수 있는교? 뼈쪼가리 몇 개 가지고 (경찰이) 우리 아들(애들의 경상도 방언)이라는 데 그걸 우예 믿는교? 그란데 우리 아가 입고나간 옷을 보고...휴...” 종우씨는 이제 더 내어줄 눈물도 없다. 눈물로 보낸 지난 15년의 세월을 두고 더 흘릴 눈물이 없는게다.
“종식이 집을 파보라” 졸지에 살인자로 내몰린 종식이 아버지...끝내 간암으로 사망
아이들을 잃고 방황했던 지난 15년의 세월 중 그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기억은 지난 1996년 1월의 일이다. 실종된 다섯 아이들의 주검이 종식(함께 실종된 다섯 아이들 중 한명)군의 집에 묻혀있다는 것. 심리학자 김가원씨의 이같은 주장으로 경찰은 종식군의 아버지 김철규씨의 집안 구석구석을 굴삭기로 내다팠다.
“우리가 아이라(아니다) 캤거든... 아인데(아닌데), 진짜 그건 아인데 김 박사 실수하는기라 캤는데 (경찰이) 그래 팠 뿌데...” 현도씨는 그 날의 기억이 너무나 죄스럽다. 졸지에 살인누명을 쓴 종식이의 아버지도 안타까웠지만 그 날 이후로 홧병을 얻어 결국 간암으로 철규씨가 2001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유해도 못보고 철규(사망 당시 49세)씨는 그렇게 세상을 버렸다. “문디 자슥...1년만 더 버티제. 1년만 버티고 아들 유골이라도 보고 죽제...” 종우씨는 먼저 간 친구 철규씨가 더 원망스럽다. 죽은 다섯 아이들도 절친한 친구였지만 다섯 아버지들 역시 둘도 없는 형제같은 사이다.
사소한 일에도 부부다툼...서로 원망...‘깨져 버린 가정’
그러나 이 보다 더 그들을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소한 일에도 부부 다툼이 잦은 가정 불화다.
“부부간에 안싸운 사람 없심다. 무슨 일만 있으면 서로 원망하지예. 눈만 마주치면 서로 짜증내기 바쁩니더” 현도씨는 아이들이 실종된 이후로 다섯 가정은 철저히 파탄났다고 하소연했다. 벌써 한 가정은 부부간 불화가 심해 헤어졌다.
남아있는 아이들에게도 못할 짓이긴 매한가지다. 죽은 아들 영규의 위로 딸을 둔 현도씨는 딸의 중.고등학교 졸업식에 단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철원이 위로 아들 하나만 있는 아버지 종우씨도 마찬가지다.
“애들은 아예 부모가 아파할까봐 내색도 안합니다. 죽은 동생얘기 일체 안하지요. 나는 뭐 그 심정 모르겠십니까? 아이 찾아다니느라 잘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잘 커준 아들이 고맙지요” 종우씨는 먼저 간 아들을 가슴에 묻고 남아있는 아들을 고아아닌 고아로 돌봐주지도 못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미안허데이...”
방송국 녹화가 끝난 것은 오후 4시가 다 돼서였다. 녹화를 끝내고 방송국 근처 공원에서 만난 현도씨와 종우씨는 방송국 옆에 즐비한 빌딩숲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이고 높데이. 저리 높네. 으리으리한 건물에서 넥타이 딱 매고 일할 맛 나겠네” 현도씨는 수십층에 이르는 주상복합 건물을 보며 부러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부러운 것은 하늘에 닿을 듯한 저 건물이 아니다.
‘우리 아이도 살아있었다면... 저 휘황찬란한 건물 한 편에 자리 딱 꽤차고 서류뭉치 들고다니며 폼나게 일했을텐데...’ 아버지가 진정 부러운 것은 바로 여느 아버지들처럼 아들이 첫 월급 탓다고 용돈 받아보는 일, 바로 그 일이 아니었을까.
종우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가방사이로 흐트러진 기자의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철원이가 살아있었다면 딱 기자와 비슷한 또래였을 텐데... 그 안타까운 마음에 종우씨는 몇 번이고 옷을 매만지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기자를 바라보았다.
개구리소년들의 공소시효 15년이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3월 25일 자정이 지나면 법적으로는 이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렇게도 국회의원 나리들을 부여잡고 공소시효 연장해 달라고 애걸복걸했건만 이제는 그마저도 허사가 돼 버렸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흐릿해지고 그만 포기할 때도 된 거 아니냐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내는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범인을 잡아 아이들의 원혼이라도 달래주어야 하는데...” 끝내 현도씨와 종우씨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철원아! 호연아! 영규야! 찬인아! 종식아! 미안 허데이... 이 못난 아버지를 용서해다오”
23일, 아이들이 숨져간 대구 와룡산 기슭에서 위령제를 준비하는 아버지들은 또 한번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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