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냉전 주역' 키신저 타계. 제3세계 반미정권 붕괴도
100세로 타계. 최근까지 '신냉전' 반대하며 활발한 활동
키신저는 미국 외교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특히 탈냉전을 주도해 국제 외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독일계 유대인 출신인 그는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 닉슨 대통령에 의해 1969년 1월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된 후, 이후 1973년 국무장관까지 겸임하면서 미국 외교정책의 쥐락펴락했다.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임한 것은 지금까지 그가 유일무이했다.
그는 베트남전 장기화, 냉전 등으로 늪에 빠진 미국을 구하기 위해선 '탈냉전'이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재임기간중 일관되게 냉전체제 해체를 주도했다.
우선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미중 정상회담에 앞서 미국 탁구대표팀이 중국을 방문해 친선게임을 벌인 1971년 4월 이른바 '핑퐁 외교'를 폈고, 1972년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주석간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1979년 미·중 수교를 가능케 했다.
구 소련과의 데탕트(긴장완화)를 위해선 핵 군축의 기초가 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과 미사일방어(MD)를 제한하는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조약(ABM Treaty) 체결을 1972년 이끌어냈다.
베트남전과 관련해선 1973년 파리협정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킨 공로로 북베트남 협상 대표인 레득토(黎德壽)와 함께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1973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하고 후폭풍으로 1차 오일쇼크가 세계경제를 강타하자 양측을 오가는 '셔틀외교'로 극한 갈등을 중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과정에 제3세계의 반미정권들을 붕괴시키는 일련의 공작으로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는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이 당선되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부추켜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렸고, 1976년에는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 정부를 전복시키기도 했다. 동티모르, 키푸로스 등에서도 마찬가지 공작을 폈다.
그는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국제 컨설팅 회사인 '키신저 어소시에이츠'(Kissinger Associates) 회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CFR, 애틀랜틱 카운슬 등의 멤버로 활동하며 국제외교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는 트럼프, 바이든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신냉전'이 확산되는 데 대해 반대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 우크라이나 침공을 한 러시아를 궁지로 몰아선 안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대중 봉쇄정책에도 반대해 지난해 7월 방중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으로부터 "라오 펑유(老朋友·오랜 친구)"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 과정에 컨설팅 명목으로 미국과 중국의 브로커 역할을 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챙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키신저의 타계 소식을 전하며 “그는 미국 국제 문제와 정책 형성에 비할 데 없는 지배력을 발휘했던 외교관이지만, 그를 절조와 도덕관념이 없다고 보는 비판세력의 끊임 없는 공격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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