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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만에 부활하는 ‘몽양 여운형’

"여운형은 진보적 민족주의자, 좌우 틀로 평가해선 안돼"

19일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60주기를 맞아 대규모 추모학술심포지움과 추도식이 열린다. 민족의 분열과 분단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해온 진보적 민족주의자 몽양 선생이 최근의 급박한 한반도 해빙 기류에 힘입어 이제야 제대로 제 평가를 받는 양상이다.

몽양 60주기 대대적 추모식

(사)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는 19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서울역사박물관 강당(구 서울고 자리)에서 몽양 서거 60주기 추모학술심포지움을 개최한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오랫동안 몽양 여운형의 행적을 추적하고 전기를 준비해온 미국 펜실베니아대의 이정식 명예교수가 ‘여운형의 이상과 선택 : 냉전의 희생양’, 고려대 최상용 교수가 ‘여운형의 사상과 행동’, 그리고 경남대의 조영건 명예교수가 ‘몽양과 6.15시대’를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다.

이밖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 이수성 전 국무총리, 백낙청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서울대 명예교수)가 이 날 축사를 할 예정이며 사회는 이부영 60주기 추모학술심포지움 집행위원장이 맡는다.

지난 2005년 서울 우이동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에서 열린 몽양 선생 추모식.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보낸 화환이 눈길을 끌고 있다. ⓒ연합뉴스


"여운형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좌-우 이념 틀 버려야"

특히 이번 학술심포지움에서 펜실베니아대 이정식 교수는 최근 비밀 해제되어 출간된 쉬티코프 소련군사령관의 일기의 자료에 근거하여 몽양 말년의 동향을 분석, 소개할 예정이다.

이 교수는 미리 배포한 논문 요약본을 통해 “여운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분론적인 측도나 틀을 버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여운형이 '기회주의자였다' 또는 사상이 모호했다는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의 사상적인 틀을 그에게 맞춰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전제한 뒤 “한국의 문화는 독선적이고 교조적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고 지적했다. 그는 “좌도 그렇고 우도 그렇다. 여운형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우릴 줄 알고 대화를 좋아하고 남에게서 배우기를 즐기는 열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며 “비(非)한국적인 한국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어폐가 있겠지만 그는 일찍부터 세계화한 사람이었다”고 몽양을 총평했다.

그는 한마디로 “여운형을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며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지만 폭력을 통한 혁명을 배척했고 기독교 배경이 있기 때문에 유물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고 몽양의 사상을 소개했다. 그는 또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삼았던 그가 공산당의 독재를 선호할 수 없었다”며 “그의 사상의 근간을 이룩한 첫째는 그의 반제국주의 사상이고 둘째는 그의 독립에 대한 집념이었다. 물론 조국이 분단된 이후에는 독립에 대한 집념은 통일독립으로 변했다”고 평가했다.

38선 월경금지 조치에 "내 집안에서 윗방 가든 아랫방 가든 무슨 상관인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학술위원장을 맡고있는 조영건 경남대 명예교수는 미리 배포한 발제문 요약본에서 “1946년 미점령군사령관 하지가 38선 월경금지 조치를 내리고 포고령 위반으로 다스린다는 엄포 속에서 몽양은 다섯 차례 공개, 비공개로 통합정치와 화합통일을 위해 방북했다”며 “하지의 경고에 몽양은 '내 집안에서 내가 다니는데 윗방에 가든 아랫방에 가든 당신이 무슨 상관인가'라고 맞받았다”고 몽양의 배포를 소개했다.

조 교수는 “몽양의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은 6.15 통일시대, 6.15선언실천 이행과제로서 정치지도자와 정당이 감당해야할 짐이 되었다”며 “몽양의 방북은 ▲좌우합작, 남북연합 ▲인민당, 민전대표 자격으로 북한지역 제정당과의 의견 조율 및 인민당 조직확대 ▲민족통일의 책임적 주도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몽양의 무대가 남북통합의 장인 것을 감안해서 몽양은 진보적 민족주의자에 더해서 연공적 민족주의자로 명명하는 학자도 있다”며 “아무튼 몽양은 다른 정치인이 못해내는 전인미답의 통일, 통합의 길을 개척한 탐험적 선구자임에 틀림없다”고 총평했다.

몽양, '항일민족운동'에서부터 '좌우합작'에 이르기까지...

마지막으로 최상용 고려대 교수는 “여운형은 1943년 "일본의 패배를 선전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7개월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며 “그는 일본의 패배가 멀지 않았다고 판단, 1944년 독립준비를 위한 지하조직을 준비했다. 상해시대 신한청년당의 조동우, 일본의 조선독립단의 최근우, 국내의 이만규 등과 협의, 비밀결사로서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친일분자,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항일세력을 통합하고 공장, 학교, 대중단체의 세포조직을 만들어 나갔다”고 몽양의 항일 독립 투쟁사를 소개했다.

최 교수는 건국동맹과 관련 “구성원들의 이념적 성격을 보면 최근우, 이만규와 같은 중도파에서 여운형에 의해 대표될 수 있는 중도좌파 내지는 민족좌파에까지 이르고 있다”며 “이들 세력은 오랫동안 국내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해외의 좌파 독립운동가 그룹 특히 <러시아 한인>계 공산주의자 그룹과는 다르며, 8.15 이후는 김구의 <임정파>와 이승만의 <미주 한인파>, 송진우의 국내우파와 대립한 세력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해방 후 몽양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여운형은 1944년의 건국동맹을 확대하여 8월 16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스스로 위원장이 되었다”며 “8월 31일까지 <건준> 지부가 전국적으로 설치되어 145개에 달했다. 이 건준 지부는 8.15 이후 조직된 최초의 지방조직으로서 9월 6일 인민공화국 선언과 함께 지방 인민위원회에 해소되었다. 이 건국준비위원회가 한국민족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큰 의의를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건준이 전국적 규모의 민족통일전선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총평으로 “8.15 전에는 주로 반제.반식민 과제에만 집중되었던 민족운동이 일제의 인적. 물적 유산을 청산하는 반봉건 민주화 과제와 결합함으로써, 이념 정책 그리고 인물의 구성 면에서 새로운 모습의 민족통합의 조직체가 되었다”며 “이렇게 볼 때 여운형에 대한 평가는 건국준비위원회의 평가에서 그 절정을 볼 수 있다. 그 후의 인민공화국 좌우합작운동에의 참여도 어디까지나 건준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몽양의 민족주의 사상에 대해 “우선 민족자결주의의 자각을 토대로 하고 있고 사회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의 심화를 통하여 반제 민족주의로 발전했던 것”이라며 “그 다음 그의 반제 민족주의 사상은 반봉건 및 인민주권의 공화주의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결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몽양의 60주기 추도식은 이 날 앞선 오전 10시, 서울 우이동 묘소에서 봉행될 예정이다.
김동현 기자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1 1
    치스차코프

    살았으면 김일성손에 죽었지
    개한테 물려 죽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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