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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철저한 사회민주주의자

[아탈리가 말하는 미테랑] <4> 미테랑의 통치 방식

어느 철저한 사회민주주의자

그는 사회민주주의자가 되기 전에는 공화주의자였다. 그는 1946년 6월 파리에서는 좌파 후보였지만, 같은 해 11월 니에브르에서 중도우파로 공산당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식민지정책과 ‘프랑스에 속한 알제리’의 진짜 옹호자였던 그는 드골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돈의 위력을 거부함으로써 좌파로 넘어갔다:

“사회당 입당은 나로서는 마르크시즘에 동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좌파를 위해 권력에 다가가는 수단, 그리고 공산당을 그것의 진정한 수준에 가져다 놓는 수단이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경험했던 독일 전쟁포로수용소의 가치를 되찾았다:

“나는 철저히 폐쇄된 이 작업대에서 내 청년기의 선생님들에게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이상적인 공동생활체를 세웠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보다 균형 잡힌 공동체는 알지 못한다. 바로 거기서 나는 우리 사회를 근본적인 방법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비에트식 모델을 싫어해서 만약 그것이 프랑스에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걱정했다:

“사회주의 체제의 약점은 그것이 관료주의 체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민족전통과 사회주의가 결합하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는 마르크시즘보다 마르크스를 훨씬 높이 평가했다:

“자신의 경제학적 분석에 충실했던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가장 많은 곳에서 계급투쟁이 성공적으로 완수될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런 투쟁은 프롤레타리아 군대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산당원이 많은 곳은 농촌혁명이 필요하던 나라, 농촌사회였다. 공산주의에 중유럽과 동유럽의 일부를 얻게 해준 것은 붉은 군대였다. 이런 곳에서 농촌개혁의 필요성에 의해 반발상태가 팽배한 나라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가끔 그가 극단적 연설을 하고 싶어 하고 레닌주의의 유혹을 - 혹은 차라리 일종의 혁명에 대한 향수를 - 느꼈지만, 조금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는 더욱 급진적인 레닌주의가 될 수도, 그리고 우리의 경쟁자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결과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사물을 지속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과격화는 독재로 이끈다. 그렇다면 참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사회민주주의 체질이라고 느낀다. 즉, 나는 개혁이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하면 절대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어느 노르웨이 여기자에게 자신의 대통령직에 대해 갖기를 바라는 이미지를 그 어느 때보다 잘 요약해 주었다:

“내가 1981년 당선되고 난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사회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진보세력들이 이끈 프랑스가 체험한 가장 오랜 경험입니다. 그것은 혁명은 아니고 국제적이며 국가적인 가치와 우선권의 진정한 재분배입니다. 그 안에서 지식과 연구의 발전, 남녀의 더욱 심화되고 방법론적인 교육, 배제의 거부, 자유의 보장, 문화의 확산, 복지 권리의 활성화, 책임의 분산, 지방화, 현대의 정글인 야만적 자유주의의 중지를 모색할 것입니다.”

아탈리의 신간 <이것이 프랑스와 미테랑이었다>의 원문 표지. ⓒ에디터


통치하다

정치는 그가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문인이 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다른 일을 못했다고 후회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그는 1960년대 초반 별다른 의욕도 없이 몇 년 동안 변호사 생활을 했다. 단 한 번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참사원이 되려고 했을 거요. 그렇지만 나는 통치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정치가 진정한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정치 아마추어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민간사회’와 같은 말을 하면 그는 역정을 냈다:

“‘민간사회’라뇨? 민간에 관계되지 않은 사회가 있다는 말이오? 직업정치인들은 군인입니까?”

그는 권력은 정치에 맛들인 사람에게 마약이며, 정치에 안주하는 사람을 타락시키고, 정치에 만족하는 사람을 파괴할 뿐 아니라 명망과 평판, 영예와 유명, 인정과 존경, 호기심과 경탄을 혼동하도록 부추긴다는 말을 즐겨 했다. 그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의심을 멈추게 하고, 모든 비판적 생각을 가시게 하며,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게 하고, 무언가 영속적인 담보, 즉 면책을 가졌다는 환상을 믿게 한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 말의 본래 의미에서 “자신과 다르게, 이반되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록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여기는 것이 가끔 타당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멀찍이 물러서 있었지만, 이 같은 특징들이 자신에게 적용된다고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기회주의자인 데다 권력을 정복하고 유지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평하는 것을 몹시 기분 나쁘게 생각했다:

“나는 7년 반 동안 장관이었고… 그리고 24년 동안 내각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관청에 발을 붙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나를 기회주의자라고 물고 늘어지면….”

그가 언젠가는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며 아주 오랜 고행을 통해서였다:

“1961년 드골이 공화국 대통령선거는 직접선거로 치를 것이라고 발표한 때부터 - 당시 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한 채 상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 언젠가는 내가 출마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기댈 곳도, 지원자도, 돈도 없었고 친구보다 적이 더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러기를 바랐다. 1965년,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아무도 나를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선거가 있기 전 단지 두 달을 남기고 출마를 선언했다. 아무도 감히 드골을 상대로 출마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을 강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없다.”

1987년 어느 날 내가 그에게 다음해에 출마하지 않고 글쓰기를 재개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우리에게 책임질 일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이오. 하지만 그것들이 없으면 얼마나 지겨울까?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는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권에 속하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만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좌우동거체제 - 1986년 시작되어 그의 두 번째 임기 말까지 실제로 끊이지 않고 반복된 - 는 그로 하여금 국방, 대외정책, 헌법과 제도의 존중 등 그 한계를 명확히 하도록 만들었다. 그 외의 나머지 모든 것은 국회 다수당과 거기서 나온 내각에 달렸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장관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었다.

“내각은 통치하고, 엘리제궁은 물러난 채 있어야 한다. 나는 모루아 총리가 소신껏 하도록 두었다. 장관들은 그들이 맡은 행정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절대 환상을 품지 않았다:

“훌륭한 장관은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만 해도 상당한 것이다…. 사회당 원내에는 교수가 너무 많다. 그들은 프랑스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

자신의 총리들 중 그가 누구보다 높이 평가한 총리는 피에르 모루아였고 그 다음이 피에르 베레고부아, 로랑 파비우스였다.

그는 국회가 여전히 제1의 권력이며, 내각의 정당성은 거기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그는 국회는 나라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겼다.

정보수집

통치를 위한 그의 강박관념은 끊임없이 정보를 모으는 것이었다. 그가 친구들을 맞을 때 종종 맨 처음 하는 말은 “자네 주변 사람들이 요즈음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더냐?”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아는 것을 생존의 조건으로 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비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비밀도 알고 싶어 했다. 메모와 만남, 신문 등 그의 정보원(情報源)은 무수히 많았다. 그는 아침 일찍 라디오를 조금 들었지만, 텔레비전은 전혀 보지 않았다. 그는 모든 방면의 사람을 엄청나게 많이 만났다.

그는 일단 당선되고 나자 오후 늦게 하루에 2시간을 대통령 관저에서 받은 외교전문을 읽으며 보냈다. 그 중에는 장관과 보좌관들로부터 올라오는 메모와 같이 그에게 직접 보낸 것이 아닌 것들도 포함됐다. 그리고 그는 종종 그것들에 한 줄 한 줄 주석을 달았다.

그는 다른 장관들보다 내무부장관에게 특히 관심을 가졌다. 그가 관장하는 모든 것을 잘 알았고, 아주 작은 시골 군수의 임명이나 모든 기관이 작성한 메모를 - 그 중에는 도청파일도 포함해서 - 자세히 살폈다. 나는 가끔 밀봉되지 않은 큰 봉투 속에 든 도청파일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봉투 위에는 프랑수아 미테랑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가끔 그 안에 색깔 있는 종잇장들이 들었다는 것을 분별할 정도였을 뿐, 나는 그것들을 절대 열어 보지 않았다. 거기에 도청보고서가 끼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어느 날 그가 그 중의 하나를 나에게 보여주었을 때였는데, 그 속의 대화 당사자 중 한 명- 테러리스트 -이 내 이야기를 했다. 이런 도청들이 부처의 공공부서와 그들의 요청에 의한 합법적인 방법 이외의 방법으로 이뤄졌다는 생각은 조금도 해본 적이 없다.

결정 방식

그는 절대로 회의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독대에서조차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혼자 집무실에서 글로 써서 결정을 내렸다.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접견의 방향을 이 방법으로 미리 확인해야만 했다. 그의 보좌관과 장관들 중 상당수는 미리 정해진 지침을 놓고 대화를 주고받은 것을 후회해야 했다.

그의 권력의 핵심은 매일 기록하는 수십 개의 수결&#8231;메모&#8231;편지&#8231;초청&#8231;조례&#8231;법률&#8231;감사장&#8231;의견서&#8231;연구서&#8231;경찰보고서&#8231;제안서&#8231;요구서 등이었다. 이들은 각계각층에서 온 것이며, 보좌관과 비서들이 검토한 것들,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그는 메모가 길다고 불평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가 쓴 기록은 결정과 같은 효력을 갖는데, 보통 ‘예’와 ‘아니오’로 아주 명료했다. 그가 ‘보았음’으로 대답하면, 이것은 ‘아니오’를 의미했다. 가끔 대답에 아주 자세한 분석을 첨부하였다. 그의 대답이 모호한 경우는 드물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부처 예산 일부를 지역으로 보내는 지방분권화 법률에 항의하는 자크 랑에게 대답할 때에도 그랬다:

“예, 하지만 유연하게, 법이 있으니까요. 국가를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되찾는 것은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신중하게 움직이시오.”

또 다른 결정 방식은 장관들에게 - 언제나 글로 쓴 - 편지를 써서 지침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었다. 종종 장관 중 한 명을 만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편지 내용을 실행하는 일이 어떻게 되어 가나요?”

가끔 그는 내각의 권한에 관한 문제에 개입했다. 그 문제는 그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로 그 확실한 해결책을 행사했다. 이를테면 (루브르미술관&#8231;재무부청사의 베르시 지역 이전, 바스티유오페라, 라데팡스의 신개선문, 톨비약도서관) 같은 대규모 공사는 그 자세한 진척 상황을 직접 살폈다. 가끔 그를 만나 우연히 알려준 작은 문제에 관해서도 같은 식으로 행동했다. 예를 들면 파리 근교에서 점심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이런 글을 써 보냈다:

“나는 앞으로 이블린을 통과할 테제베 서부선 노선에 관심이 많소. 그 노선은 여러 마을의 평온을 무시하고 있어요. 라보스 평야가 시작되는 곳에 마땅한 자리가 있는데도 말이오. 장 아르노에게 빨리 알려 내가 바라는 바에 맞도록 해결책을 제안하도록 하시오. 자세한 내용을 알려 주겠소.”

고속도로가 통과할 위협을 받고 있는 생제르맹 숲도 똑같이 고집스럽고 구원을 베푸는 배려의 대상이 되었다. 같은 방식으로 시리아의 할라브시에 있는 프랑스영사관의 예산배정, 어느 군청과 어느 농촌지역에 있는 기념물의 예산배정을 옹호했다. 그리하여 좌우동거체제 하의 장관인 알뱅 샬랑동으로부터 교도소를 세워 베즐레 성당에서 바라보이는 시야를 망치는 일은 없게 하겠노라는 다짐을 얻어냈다. 그곳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경치 중 하나였다.

결정짓고 나면 집행이 최대한 신속히 이뤄지도록 독려했다. 하지만 위기가 생기면 그것을 지속되게 두었다 절정에 도달했을 때 최선의 해결책을 끌어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국가원수의 중요한 자질은 용기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인기의 미덕과 위기의 미덕을 믿었다.

“프랑스인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것을 구체적으로 재 보아야 한다.”

하지만 또한 꿈꾸게 할 필요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희망을 주는 것이다.”

비록 예부터 임명권이 수장의 중심이 되는 특권이었지만, 그는 내무부의 모든 보직과 국방부&#8231;외무부&#8231;문화부의 중요한 보직을 제외하면 거의 관심이 없었다. 경제와 복지에 관한 보직 임명은 그와 무관했다. 그는 고위 공무원을 거의 알지 못했고, 그들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비록 자신의 중요한 보좌관과 대부분의 총리가 ENA 출신이었지만, 그는 ENA를 싫어한다고 말했다.

경제&#8231;사회 문제에서 그는 협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노조나 기업체 사장단과도 아무런 친밀감을 갖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역대 내각에 노사협상 주체들과 협상하기를 종용했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되풀이했다:

“내각의 담론은 정보제공, 협상, 혁신이라는 세 가지 주도적 이념에 기대야 한다. 협상을 모든 단계의 프랑스식 집단생활의 새로운 스타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충분히 느끼지 않는다. 정부는 노동자들을 결정과정에 참여시킬 줄 몰랐다.”

반면 국제문제에서 그는 열정과 천재적 협상기술을 가졌다. 유럽연합과 G7 정상회의에서는 동맹을 맺고, 시간을 벌고, 단절을 인정하고, 타협 조건을 내세울 줄 알았다. 그는 “사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싼 값에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정치와 마찬가지로 국제정치에서도 국가원수는 여러 수를 내다보는 장기선수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가오는 연도의 가상 시나리오를 그려 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81년 5월29일부터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7년 임기는 세 가지 국면으로 진행될 것이오. 짧은 환희의 시대, 긴 어려움의 시대 그리고 더욱 쉬운 말기시대. 위기가 7년 내내 지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오!”

그날부터 그는 자신이 좌우동거체제에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말했다:

“1986년 우파의 승리 다음에 사회당을 중심으로 결집할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1988년 사회당 후보의 당선도 가능해요. 1986년 우리의 패배는 하나의 돌발적 사고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려면, 승리자의 사기를 가져야 합니다.”

1988년, 그는 자신과 경쟁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차례로 따돌리는 데 총력을 기울여 자기 다음 세대(미셸 로카르 세대)의 모든 유망주를 그 다음 세대(로랑 파비우스 세대)의 힘을 빌려 와해시켰다.

돈과의 관계

말하기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것과 반대로, 그는 돈을 밝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이런 비방에 대해 불평했다:

“사람들은 내가 돈을 밝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 내가 돈을 밝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쓴 모든 책의 저작권 10%만 받았더라면!”

그는 돈을 버는 것은 천박한 일이지만, 돈을 가진 것은 존경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대 귀족들과 같았다. 그는 변호사 개업 중이던 짧은 몇 년 동안 가장 돈 많은 고객들로부터 변호사 수임료를 받지 못했던 자신의 무능함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종종 해주었다. 특히 그가 감옥에서 구해준 이탈리아인을 잘 기억했다. 그 이탈리아인은 사무실로 와 울면서 수임료 계산을 늦춰 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함께 나왔는데 그 이탈리아인이 그를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차는… 롤스로이스였다!

그는 낡은 책 제본, 낡은 곳간 수리, 연못 보수, 질긴 옷 등 오래 남는 것 외에는 돈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돈을 싫어하는 것은 경제적 속박을 거부하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경제문제에 관해 수치(數値)와 사실, 추론을 쉽게 암기하지만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그에게 경제학은 부수적 자료일 뿐 정확한 학문이 아니었다. 그것으로는 모든 것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 말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경제학이 우파나 보수적인 고위 공무원이 정치권력의 운신의 폭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졌다. 그것은 그가 로카르를 싫어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로카르는 이 분야의 능력을 지나친 정치무기로 삼았다. 뒤에 가서 보겠지만, 일방적으로 주장만 하는 이 능력은 그의 행동 속에서 검증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친분 있는 기업주가 거의 없었고, 그들과 교류하는 것도 거절했다. 그저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기업주인 장 리부와는 유일하게 친했다. 다른 기업주들에 대해 그는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많은 사람은 실직이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에 해당하는 자본을 보전하기 위한 일종의 사혈(瀉血) 같은 것이다.”

CNPF(프랑스의 전경련) 회장들은 그가 의무적으로 만났을 뿐 좋아서 만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업체 간부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들을 비판하면서, 기술과 사회의 발전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조직으로서 기업 활동을 촉진하고, 기업을 영예롭게 하는 길로 재빨리 들어섰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가졌지만, 정신 속에는 상상력이 없고, 행동 속에는 과감성이 없다. 기업 활동을 하지 않는 기업가가 많다! 찬사를 받을 만한 크고 작은 기업은 극소수다.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 언론은 정부를 비판한다. 하지만 물건을 만드는 것은 정부가 아니고, 파는 것도 정부가 아니다! 애프터서비스를 보장해 주는 곳도 정부가 아니다. 이 분야가 우리가 가장 떨어지는 분야다. 머리만 굴리고 있다. 우물 안에만 있다. 떠나더라도 주말을 프랑스에서 조용히 보내기 위해 돌아오기가 바쁘다. 그런데 나에 대해서는 여행을 많이 한다고 비난한다. 나는 매번 여행이 지겹다. 하지만 결국 나는 판매원이 아니다. 그것은 내 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가 정당의 자금조달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 문제는 사회당도 다른 당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고 말하기 위한 것 빼고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결해야 했다.

“정치 주변에는 언제나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나는 40년 전부터 이들을 가까이하는 것을 피했다.”

더욱 안 좋은 것은, 그는 친한 사람들 중 자신과의 관계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이들을 증오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가장 오래된 동료 중 하나인 로제-파트리스 플라를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전쟁 중에 만난 전직 노동자인 이 사람은 같은 레지스탕스 조직의 대원이었는데, 미테랑에게 장래의 부인이 될 다니엘 구즈를 만나게 해 준 것도 바로 이 사람이었다.
도서출판 에디터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0 0
    sprite1001

    이 글을 보시는 님께 호소합니다!!
    요즘 수도권 시내 버스에서도 광고하고 있는 유투브 컨텐츠에요.
    부디 짬을 내셔서 확인하시고 바른 판단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눅17:26~30).
    https://youtu.be/2QjJS1Cnr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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