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공단이 외국계 빌딩을 샀다가 백지화하는 등 곤욕을 치루고 있다.

국민연금은 최근 호주 금융그룹인 맥쿼리그룹 산하 맥쿼리센트럴 오피스기업구조조정부동산투자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서울 충무로 극동빌딩을 사들이기로 가계약을 맺었다.

국민연금은 극동빌딩 1순위 우선협상대상자가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이유로 인수를 포기하자, 맥쿼리측이 4천억원을 희망하던 이 빌딩을 3천250억 원에 사들이기로 계약을 맺었다. 외형상으로는 20% 가까이 싼값에 산만큼 국민연금은 극동빌딩 매입에 만족해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비난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맥쿼리측이 서둘러 극동빌딩을 판 것은 본국의 유동성 때문. 극동빌딩이 국내 투자가 투자분도 모아 함께 산 건물이나 극동빌딩 매각대금중 맥쿼리 지분은 곧바로 달러화로 바뀌어 반출될 게 불을 보듯 훤했다. 환율 방어에 총력전을 펴고 있는 외환당국과 금융계 등에서 국민연금에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국내 기업들의 불만도 터져나왔다. 유동성 우려때문에 부동산을 매각하고자 하는 기업은 한둘이 아니다. 한 예로 미래에셋만 해도 마포사옥을 내놓았으나 매입희망자와의 현격한 가격차로 거래가 성사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밖에 벼랑끝 위기에 몰린 건설회사 등도 부동산 매각을 갈망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국민연금이 외국계 빌딩을 덜컥 사주니, 재계로부터 좋은 소리를 들을 리 만무했다.

비난여론이 비등한 결과인지, 국민연금은 21일 극동빌딩 매매계약을 백지화했다.

맥쿼리센트럴 오피스기업구조조정부동산투자회사는 "경영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출자를 약속했던 국민연금공단에서 출자를 안하겠다는 공문을 받아 매매계약서상 거래 완결의 선행조건을 이행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매매계약을 해제했다"며 극동빌딩 계약 백지화를 이날 공시했다.

외국계는 IMF사태후 헐값에 나온 빌딩들을 대거 매입한 뒤 국내 부동산값이 폭등하면서 거액의 차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위기로 신용경색이 극심해지자, 한국에서 주식을 무더기 매도하는 동시에 보유 부동산도 서둘러 팔려하고 있다.

3분기 실적이 전년동기보다 38% 급감한 GE캐피탈의 경우 GE리얼이스테이트가 강남의 N빌딩과 T빌딩, 분당 소재 C빌딩을 매물로 내놓았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흡수된 메릴린치 역시 SK 서린동 빌딩을 SK그룹에 되사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파산한 리먼브러더스가 보유중인 명동 유투존, 동대문상가의 쇼핑몰 라모도, AIG의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도 매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오피스 빌딩의 가격 급락을 예고하는 신호탄인 셈.

부동산업계에서는 아파트거품이 급속 파열되면서 오피스 빌딩 값도 크게 떨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국민연금은 요즘 줄어 주가 방어를 위한 주식매입, 은행 유동성 위기 해소를 위한 10조원대 은행채 매입 등 전방위로 동원되는 느낌이다. 이에 최근 들어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참여하려다가 불참하기로 하는 등, 재정 건전성 관리에 초비상이 걸린 상태다. 이런 측면에서 극동빌딩 매입 백지화는 뒤늦게나마 바람직한 결론이나, 애당초 환율이나 국내기업 사정 등을 감안하지 않고 내린 결정은 국민연금의 근시안을 드러낸 사례라는 게 정부와 재계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