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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반도체의 '백혈병 괴담'

<현장> 백혈병 사망노동자 故 황유미씨 추모제

‘기흥공장 설비 엔지니어 이상훈씨 1997년 사망, 황민웅씨 2005년 사망, 기흥공장 3라인 이수경씨 2006년 사망, 황유미씨 2007년 사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어 죽어간 노동자들이다. 지난 10년 사이 확인된 사망자만 6명, 투병 중인 노동자를 합하면 11명이 유사 공정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었다. 신원이 파악되지 않았거나 연락이 두절된 노동자들까지 더하면 피해자는 더 늘어난다.

한국타이어 노동자들의 집단 돌연사를 방불케하는 이른바 ‘삼성 반도체 백혈병 괴담’이다.

한국타이어와 삼성전자의 사례는 여러 측면에서 닮은 꼴이다. 우선 노동자들이 동일 질환으로 사망했지만 뒤늦게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뚜렷한 사망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산재를 신청하는 과정에서 회사가 산재 처리를 꺼려 결국 노동부와 산업안전관리공단이 실태조사와 역학조사를 벌이는 것까지도 비슷하다.

유족 “회사에서 얻은 병을 개인 질병으로 몰아가”

6일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앞에서는 시민사회단체 회원 50여명이 참가해 1년 전 이날 20개월의 투병 끝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황씨가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한 것은 속초상고 졸업반이던 지난 2003년 10월. 황씨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2년간 반도체 공정 3라인에서 일하다 구토와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2005년 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급성골수성백혈병. 황씨는 그해 12월 골수 이식 수술을 받고 기나긴 투병 생활을 시작했지만 결국 2007년 3월 사망했다. 그 사이 황씨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추모제에 참석한 아버지 황상기씨는 “유미의 병을 걱정하던 할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유미 엄마는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난 딸을 살리기 위해 그동안 모았던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며 “그런데도 삼성은 반성하지 않고 내 딸의 죽음을 개인적 질병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황씨는 또 “건강하던 어린 딸들을 데려다가 죽도록 일을 시켜놓고 딸의 죽음 앞에서 삼성은 사과 한 마디 없이 ‘아버님이 이 큰 회사를 이길 수 있겠냐, 이길 수 있다면 이겨보라’는 말만 했다”며 삼성측의 태도에 분통을 터뜨렸다.

7일 삼성 본관 앞에서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다니다 지난 해 3월 급성백혈병으로 숨진 故황유미씨의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최병성 기자

대책위 “화학물질 노출에 의한 명백한 산재”, 삼성 “우연의 일치”

백혈병 괴담은 11월 민주노총 등 13개 시민사회단체가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발족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책위는 반도체 공정 특성상 일상적으로 화학물질을 접하고 1일2교대의 과중한 노동시간이 겹치면서 백혈병이 발병한 것이라며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한 명백한 산재”라고 주장했다. 반면 삼성전자측은 유가족과 대책위의 주장에 대해 “반도체 생산 과정에 백혈병 유발 물질은 사용되지 않았고 백혈병 발병률도 일반 통계에 비해 높은 수치가 아니”라고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대책위는 최근 2년새 연이어 사망한 황유미씨와 이숙영씨가 현장내 동일라인 동일공정에서 일해 온 점을 주목했다.

두 노동자가 배치된 곳은 기흥공장의 3라인으로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를 세척하는 일을 했다. 세척 과정은 불산, 황산암모늄, 과산화수소 등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이 혼합된 물에 원판을 담갔다 빼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숙영씨는 황씨가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1년 뒤인 2006년 7월 급성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8월 17일 사망했다. 불과 2년새 동일 라인에서 일한 노동자 2명이 비슷한 시기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대책위는 또 최근까지 두 노동자와 비슷한 경험을 토로하는 노동자들의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피해 확산을 우려하고 있다.

대책위 대표를 맡고 있는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소 공유정옥 산업의학과 전문의는 “사망노동자 사례 외에도 유산, 불임, 근골격계 질환, 자녀들의 선천성 질환 등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며 “피해가 확산되기 전에 삼성을 비롯한 반도체 회사 전반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공은 지난 한국타이어 사례와 마찬가지로 노동부와 산업안전관리공단으로 넘어갔다. 노동부는 백혈병 논란이 확산되자 지난 1월 31일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13개 반도체업체를 대상으로 근로자 건강실태조사에 들어갔다.

1997년 이후 11명의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사망하거나 투병 중인 삼성반도체는 올해 1년동안 한국산업안전공단의 역학조사를 받게 된다.ⓒ최병성 기자

노동부, 삼성전자 역학조사 결과 2009년 초 발표

한국산업안전공단도 황씨 유가족들의 산재 신청을 접수한 근로복지공단의 의뢰에 따라 역학조사를 실시, 이르면 2008년 말, 늦어도 2009년 초까지는 최종 조사 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집단 발병의 업무연관성을 구체적으로 밝혀내지 못해 피해자와 사측의 갈등 장기화를 야기하고 있는 한국타이어 사례에서 보듯 정부의 역학조사가 사망 원인을 얼마나 명확히 규명할 수 있을 지는 불투명하다.

대책위는 따라서 노동부와 산업안전공단의 역학조사와 별도로 삼성전자를 비롯한 반도체 제조업체 노동자들의 피해사례를 지속적으로 모아 열악한 작업환경의 실태를 알려나갈 예정이다.

공유정옥 대책위 대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죽지 않고 다치지 않는 일터, 설령 다쳐도 회사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민주적인 일터를 만드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삼성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운동에 연대하는 활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병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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