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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왜 근로기준법 지키라 목숨 걸어야 하나"

<현장> 분신 고 정해진 조합원, 19일만에 장례식

“정해진 열사, 어떻게 살아 오셨나. 산재가 만연한 현장에서, 폭염과 혹한 속에서 하루 8시간 노동 보장 받지 못하고 팽팽한 긴장감으로 전깃줄에 매달렸다. 노동자 탄압을 일삼던 사측에 대한 분노가 깊으셨다. 고생하는 동지들을 쉬게 하려고 천막농성장을 지키던 열사가 그립다”(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조사)

부당노동행위 중단과 성실한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인천지역 배전업체 소속 고 정해진 조합원의 전국노동자장이 14일 열렸다.

파업 1백30일째를 맞은 지난달 27일 집회 도중 ‘인천전기원파업 정당하다’, ‘단체협약체결하라’고 절규하며 분신 사망한지 19일만의 뒤늦은 영결식이었다.

고 정해진 조합원 장례식, 14일 전국노동자장으로 치러져

이날 오전 8시, 서울 한강성심병원 앞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유가족들과 고개를 떨군 조합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인이 시작됐다. 하얀 광목천으로 둘러싸인 정씨의 관이 빈소로 운구되면서 유가족들의 오열은 통곡으로 변했고 조합원들은 눈물을 훔쳤다.

짧은 제배를 마치고 장례행렬은 영결식장이 마련된 영등포 대영빌딩 민주노총 앞으로 이동했다. 민주노총 깃발을 선두로 ‘파업투쟁 승리!, 노동열사 정해진’이라고 글귀가 박힌 만장과 영정그림, 운구차량이 행진을 시작했다.

유가족들과 장례위원들, 그리고 정씨가 생전에 외쳤던 ‘인간답게 살고싶다’, ‘노동시간 단축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십수개의 만장이 뒤를 따랐다.

오전 8시 50분, 민주노총 앞에서 영결식이 시작됐다. 고인의 약력과 투쟁경과 보고에 이어 장례대책위원장인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의 조사가 시작됐다.

지난 10월 27일 분신 사망한 고 정해진 조합원의 장례식이 14일 열렸다.ⓒ민주노총

이석행 “왜 우리는 주44시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목숨을 던져야 하나”

이 위원장은 “정해진 열사, 산재가 만연한 현장에서 폭염과 혹한 속에서 하루 8시간 노동 보장 받지 못하고 팽팽한 긴장감으로 전깃줄에 매달렸다”며 “한전과 하도급 업체의 비열한 착취와 탄압은 더욱 열악한 환경으로 몰아넣었다”고 말했다.

그는 “파업투쟁이 정당하다는 동지의 마지막 절규가 안타깝다”며 “노동자는 생산 주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 44시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목숨을 던져야 하단 말인가”라고 비통해했다.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는 “열사가 가신 자리, 그 뒷자리에서 단체협약이 체결됐다. 정 동지가 그렇게 피눈물 흘리며 요청했던 요구사항”이라며 “세상에 이런 것 하나도 해주지 않으면서, 법에도 있는 근로기준법을 37년 전 전태일 열사가 요구하면서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것인데, 지금 정 열사가 다시 자신의 몸을 불태워서야 저들은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고인의 부친 정윤성씨는 “수 일전 제 자식이 세상을 떠났다. 악덕업자들이 하는 행태를 견디다 못해 고귀한 생명을 잃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며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어야한다”고 애통한 마음을 기도로 대신했다.

고인의 영정에서 오열하는 유가족들.ⓒ민주노총

“정해진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은 한전, 배전업체, 노동청”

조합원들의 헌화를 끝으로 영결식을 마치고 장례행렬은 다시 고인의 분신 장소인 인천 부평 영진전업사로 노제를 치르기 위해 출발했다.

11시 10분, 굳게 닫혀있는 영진전업 공장 앞에 장례행렬이 도착했다. 노제는 공장 70m 앞 고인이 분신했던 현장에서 진행됐다.

이영규 민주노동당 인천시당 위원장은 조사를 통해 “정 동지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들이 있다”며 “하도급 업체의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고 원청의 본분을 망각한 한전, 근로감독은 않고 사업주 편에 섰던 노동청, 노조파괴에만 몰두했던 배전업체와 대표 유해성 이들이 정해진 열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비판했다.

이 위원장은 “한국전력과 같은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는 공공기업, 노사 평등 관리행정을 책임져야 할 노동행정이 바뀌지 않는 한 현실은 바뀌어 지지 않는다”며 “박성수같은 악덕자본이 있는 한 열사정신을 구현할 수 없다. 더 이상의 열사가 없으려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 정해진 조합원의 장례식은 이날 전국노동자장으로 치러졌고 고인은 마석 모란 민주열사묘역에 안치됐다.ⓒ민주노총

동료 조합원 “형의 마음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

130일간의 파업투쟁을 함께 했던 나상준 인천전기원 조합원은 “해진 형, 이렇게 부르면 저 뒤 어디선가 나오실 것 같은데 먼저 하늘로 가버려서 마음이 아프다”며 “꼭 우리가 형을 그렇게 만든 것 같아, 그렇게 등 떠민 것 같아 미안하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형 마음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절규했다.

그는 “하늘나라에서 꼭 지켜봐주시라. 우리들 인천에서, 아니 전국에서 인천전기원들 일하는 배전현장 하면 노동자들이 정말로 일하기 좋은 현장이 되도록 열심히 싸워서 꼭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오후 1시 20분께 노제를 마친 장례행렬은 고인을 안치할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으로 출발, 오후 5시 30분께 하관식을 끝으로 전국노동자장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한편, 인천 배전업체 노사는 지난 12일 ▲노동조합 인정 ▲임금하락 없는 주 44시간 노동 및 토요 격주 휴무제 실시 등 고인이 죽어가면서 절규했던 요구안을 전격 합의했다.

사측, 고인 사망 17일만에 노조 요구안 수용

사측은 유족 위로금 및 장례비와 조합원 격려금 지급을 약속했고 파업을 이유로 조합원에 대한 불이익 및 차별을 금지하고 파업 기간에 발생한 민.형사상 고소.고발 취하하기로 했다.

또 노사합의와는 별도로 인천지역 전기공사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강화하고 그간의 노조탄압 폭력행위는 형사 처벌키로 했다.

노조의 요구안을 지난 2월부터 20여 차례 진행된 교섭에서 6월부터 1백30일 가까이 진행된 파업에서 외면해 온 사측이 정씨의 죽음 이후 전격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고 정해진 조합원이 함께 싸워 온 동료들에게 남기고 간 유산이기도 했다.
최병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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