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지금 유럽 상황, 생각보다 심각"
'드라크마게돈' 공포 점점 현실로, 한국 '제2의 스페인'될 수도
20여일간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을 돌아보고 23일 귀국한 김종인 전 수석의 전언이다.
"독일은 중장기적으로는 차라리 이번에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그리스가 이탈하면 단기적으로는 엄청난 혼란이 몰아닥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그리스, 프랑스 모두 6월에 재총선과 총선을 앞두고 있는 등 정치적 불확실성이 크다. 게다가 미국 경제도 생각보다 시원찮은 것 같고...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사태 진전 여부에 따라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상의 쓰나미가 우리 경제를 강타할 것이란 경고였다.
실제로 이날 밤 유럽 증시는 재차 폭락했다. 영국 런던 증시의 FTSE 100 지수는 2.53%,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시의 DAX 30 지수는 2.33%, 프랑스 파리 증시의 CAC 40 지수 역시 2.62% 급락했다. 또한 그리스 불똥이 튈 것으로 우려되는 이탈리아 밀라노 증시의 FTSE Mib 증시는 3.68%나 폭락했고, 스페인 마드리드 증시도 3.31%나 떨어져 2003년 5월 이후 최저치에 근접했다.
주가와 함께 유로화 가치도 동반 급락했다. 달러화 대비 1유로는 이날 2010년 8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인 1.2613 달러까지 떨어졌다가 오후 들어 1.2643 달러에 거래됐다.
유럽발 2차 쇼크에 따른 세계경제 재침체 우려로 국제유가도 급락했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7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전날 종가보다 1.95달러(2.1%) 떨어진 배럴당 89.90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WTI 선물 가격이 배럴당 90달러 아래로 내려간 것은 지난해 10월 이후 처음이다.
이날 유럽 주가 폭락은 루카스 파파데모스 전 그리스 총리가 이날 CNBC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는 유로존에서 탈퇴하더라도 그 대책은 전혀 마련해 놓지 않았다"고 "유럽중앙은행 등 기관이나 유럽 국가 역시 구체적인 준비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폭로하면서 촉발됐다. 유럽중앙은행(ECB) 전 부총재이기도 했던 그의 폭로는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할 경우 패닉적 상황이 도래할 것이란 공포를 확산시켰다. 그리스의 유로존 퇴출 시 금융시장 손실과 유로존에 파급효과 등을 고려한 총 손실 규모는 5천억∼1조유로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그리스가 유로화 대신에 과거 그리스 화폐인 드라크마를 다시 사용할 경우 화폐가격이 급락하면서 수입품의 가격이 치솟아 그리스의 물가상승률은 30∼50%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전체적으로 보면 경제는 끝장날 것이고, 이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오랫동안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국제경제계에 나도는 신조어 '드라크마게돈'의 재앙이 현실화될 것이란 경고였다. 드라크마는 그리스가 유로존에 가입하기 이전에 사용하던 화폐 명칭이고, 아마게돈은 영화로 유명해진 최후의 결전을 가리킨다. '드라크마게돈'이란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한 이후 예상되는 대혼란상을 의미한다.
그리스는 이미 최악이다.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는 홈리스 숫자가 1년새 두배로 늘어났다. 국민의 절반 가량이 실업자다. 전문가들은 그리스가 드라크마를 재사용할 경우 화폐가치가 종전보다 70% 폭락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인플레가 진행되고 금융기관이 파산하며 무역도 붕괴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그리스는 식량의 4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석유와 천연가스, 의료품의 수입의존도도 대단히 높다. 그리스 중앙은행의 브로보보라스 총재는 "연료가 끊기면 군과 경찰은 차량을 움직일 수도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고, 바반토니우 전 재무장관은 "1천100만 그리스 국민을 먹여살릴 수 없어 대량의 이민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럽 경제상황은 점점 패닉적 위기에 근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정치는 위기관리 능력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유럽연합(EU) 정상들은 23일 브뤼셀에서 비공식 정상회담을 가졌으나 우려했던대로 독일과 프랑스간 대립으로 아무런 합의도 도출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만찬 형식으로 이뤄진 이날 회동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성장과 긴축의 균형을 어느 수준까지 조율할지'를 놓고 설전만 벌이다가 끝냈다.
그리스보다 더 큰 걱정은 유럽에서 4번째로 덩치가 큰 스페인이다.
스페인의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는 23일 "스페인은 긴급 재정자금과 유동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며 "유럽중앙은행(ECB)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가의 국채매입을 통해 지원에 나서야 한다"며 사실상 SOS를 보냈다. 그는 또한 현재와 같이 높은 채권금리로는 더 이상 자금을 조달할 수 없다면서 ECB가 나서 조달금리를 안정화시켜 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스페인 총리가 이처럼 절규하고 나선 것은 스페인이 직면한 상황도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스페인 일부 은행에서는 그리스에서 목격된 뱅크런(대량인출사태)이 시작됐다. 국제신용평가사들은 스페인 은행과 지방자치단체들의 신용등급을 앞다퉈 내리고 있다. 이유는 '부동산거품' 때문이다. 같은 재정위기를 겪는 나라지만 이탈리아는 부동산거품이 없는 반면, 스페인은 부동산거품 투성이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스페인쪽의 전망을 더 어둡게 본다.
국제금융협회(IIF)는 21일 스페인 은행 대출부실이 최대 2천600억유로(우리돈 390조원)에 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IIF는 특히 긴축으로 인해 부동산거품 파열 속도가 빨라지면서 정부가 다수 은행에 600억유로의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쯤 되면 스페인 자력으로는 해결불가능해, 결국 스페인 총리가 유럽중앙은행에 유동성 지원을 호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부동산거품이 우리나라도 스페인 못지 않다는 데 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신호탄으로 전세계 부동산거품은 터졌지만, 우리나라와 중국 등 극소수 아시아국가는 예외였다. 정부가 통화정책, 부동산규제 완화 등을 총동원해 필사적으로 거품 파열을 막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한 거품은 없다는 게 경제학의 기본이다. 지금 우리가 어느 나라보다 철저히 벤치마킹해야 할 국가는 스페인인지도 모른다. 우리도 '제2의 스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쓰나미가 다시 발생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나라도 정권교체기를 맞아 온통 관심은 정치로 쏠리고 있다. 정치권도 권력 쟁탈에만 여념 없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지겠다고 하면 우리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한 쓰나미에도 주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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