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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몸의 주인일까?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내 몸은 나의 것임과 동시에 나로부터 무척이나 낯선 기이한 존재이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일까? 그렇기도 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나는 분명 내 육체를 소유(?)하고 있고 그것을 내 의지대로 다룬다. 그러나 동시에 내 몸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작동하는 기계 같다. 먹고 싸고 배설하고 욕망하는 이 반복되는 기계는 나를, 내 존엄성을 파괴하고 인질 삼는다. 나는 이 기계가 원하는 반복되는 욕망에 한없이 끌려 다닌다. 언제나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는 이런 내 몸이 싫다.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몸 밖으로 빠져나가고 싶다는 간절함이 키를 다툴수록 더욱 더 완강하게 나를 구속하는 몸이다. 할 수 없이 나는 내 몸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해할 수 없고 결코 알 수 없는 내 몸이 나를 대신한다. 나조차 내가 누군지 모르며 죽는다. 나를 이룬 몸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슬프거나 아프거나 괴롭거나 심한 고통이 엄습할 때 내 몸은 너무 멀다.

혹은 오로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나와 아픈 몸밖에 없는 것 같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몸 안에, 의식 안에 아니면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있기나 하는 걸까? 우리는 평생 자신의 몸을 천형처럼 이끌고 살아간다. 죽음만이 비로소 그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죽음 역시도 한없이 흉측해진 그 마지막 몸을 지인들에게 보이고 가는 일이다. 결국 죽음도 의식이 빠져나간 몸이 감당할 일이다. 나보다 최후로 남아 시선을 받아들이고 죽음 이전과 이후의 그 달라진 모습을 산 자들에게 가슴 아프게 안긴다. 그리고 더 이제 그 몸은 내가 아닌 타인의 손에 의해 처리된다. 화장을 하거나 땅에 묻히면서 은닉된다. 그렇게 몸은 사라진다. 죽는 날까지 나는 내 몸에 저당잡혀있다. 인질이 되어 있다. 나는 나를 인질 삼아 산다.

천성명의 이 조각은 스스로를 인질 삼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머리를 삭발하고 줄무늬 옷을 입은 남자 둘이 마치 샴쌍둥이처럼 붙어있다. 바로 작가의 자화상이다. 흡사 죄수를 연상시킨다. 작가는 탁월한 손의 기량과 놀라운 묘사력, 연극적 상황연출을 통해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에게 조각이란 행위는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를 풍경화 하는 일이다. 그것을 연극적 장면으로 치환하는 일이다. 그에게 자화상, 자소상은 연극무대의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몸을 보여준다. 극화한다.

우리는 이 생에서 저마다의 몸을 갖고 무수한 죄를 저지른다. 몸이 없다면 죄도 없고 치욕도 없고 수치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 생에서는 결코 몸을 지니지 않고 태어나기를 빈다. 아니 몸이 없는 존재가 있을까? 바람이나 물이나 공기 같은 것으로 마냥 부유하고 그렇게 마냥 떠돌면 좋을 것이다.

다시 작품을 보자.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고 협박한다. 자해한다. 나를 죽이는 것은, 나를 죽이고자 하는 것은 결국 나다. 나는 내 몸을 인질 삼아 항거한다. 삶이란 그렇게 주어진 자신의 몸으로 세상에 대들고 악을 쓰고 죽겠다고 소리치는 일이다. 나를 조금씩 죽여 가는 일이다. 내 몸을 인질 삼아, 숙주 삼아 기생하고 그렇게 빌붙어 산다. 나는 내 몸을 살리고자 하고 더러 죽이고자 한다. 몸에 좋은 것을 먹고 찾고 애쓰지만 동시에 몸에 해로운 것에 탐닉한다. 몸을 소진한다. 어느 순간 몸을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진정 내 몸을 살기고 죽일 수가 있을까?

인체 형상의 재현을 토대로 이루어진 그의 작업은 이를 통한 하나의 상황연출을 표현한다. 그것은 실재와 가상이라는 중첩된 상황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다. 실재의 일부인 닮음의 익숙함과 가상의 이미지로서의 낯설음이 중첩되어 모호한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모방한 인형화 된 인체조각을 통해 인간이란 실재와 인간 형상으로 묘사된 가상의 실재 사이의 경계점에서 ‘자아와 합일을 꿈꾸는 욕망의 긴장감’을 도출해낸다. 이상적 인간형상에 대한 차이를 통해 형성된 것이 바로 재현된 인체형상이다. 즉 유사인간형들이다.

그것은 자기 형상의 명료함 대신에 자기의 모호함과 개방성, 그리고 자기 안의 모든 타자적 성향을 받아들이게 됨을 의미한다. 나의 동일한 반복이 아닌 나의 타자화로서의 인간형상이 바로 인형화 된 인체조각이 가지는 존재론적 딜레마다. 이 딜레마는 인형화 된 인체조각의 존재 자체가 가지는 일탈의 한 형태다.

작가는 부분적인 세밀함과 인공 안구를 통한 사실적 표현을 통해 모순되고 상반된 양자의 접면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적 표현행위를 보여준다. 그와 함께 그의 극사실적인 인체조각은 흑백으로 착색되어 있다. 흑백의 인물형상은 현실에서 결코 입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2차원의 흑백영상 이미지 속에서 존재하는 형태다.

흑백이미지로 3차원적인 조각을 표현한다는 것은 실재를 영상화한 2차원적 이미지를 3차원적 이미지로 입체화시키는, 이중재현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즉 실재를 대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재현된 모사물을 통해 다시 재현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 순환과정을 하나의 재인식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작가의 작업이다. 이러한 재인식의 의미는 허상과 실재의 공존을 그 지향점으로 한다.

아울러 그의 작업은 일종의 연극무대로 보인다. 가상이라는 의미의 가장 오래된 형식이 다름 아닌 연극이다. 연극은 삶을 바탕으로 하고 한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을 함축적으로 상징화시킨 가상적 표현을 일컫는다. 이 조각이 놓여진 설치의 공간은 이른바 연극적 의미의 무대와도 같다. 연극적 연출행위를 통해 현실을 파편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즉 인형화 된 인체조각이 설치되는 공간은 현실공간의 연장선에서 분절된 공간으로서 파편적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보편적이고 익숙한 일상 공간을 해부하여 파편화함으로써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모호함을 유발시킨다. 그러니까 현실의 유기체적 연관 성향을 파편적으로 분해함으로써 일상적 공간의 익숙함으로부터 낯설음을 드러나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실재의 현실 세계를 파편적으로 분해하고 익명화시킴으로써 그 낯설음을 표명하며 이를 통해 실재를 익숙함의 시각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고자 한다.

“나의 작업은 현실이라는 연속적 상황을 분절하여 그 일부분만을 재현하는 방법으로 표현되며, 이런 분절된 현실을 통해 감성적 욕망을 표현한다. 즉 이것은 익숙해진 일상의 현실 이면에 잠재되어 존재하는 욕망의 현실화를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표현방법이다..”(작가노트)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일상에 중독되어 버린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행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인형화 된 이 유사인간형의 존재는 자아 상실에 따른 정체성 부재의 확인과 함께 그로 인한 갈망, 자신의 투영인 인체의 형상을 통해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박영택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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