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본다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본다. 거울은 나를 투명하게 비춰준다. 거울 속에 내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 없다. 거울은 그렇게 보는 나를 배반한다. 그럼 거울 속에 비친 나는 누구일까?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거울은 수면 같아서 다만 허상을, 환영을 보여줄 뿐이다. 깊이 없는 표면에 순간 매달렸다 사라지는 얼굴이다. 거울을 오랫동안 응시한다는 것은 자기애의 과도한 욕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손거울을 들고 사는 이나 틈만 나면 콤팩트를 꺼내 눈언저리와 볼을 살피는 여자, 주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투명한 매개만 있다면 언제라도 그 앞에 멈춰 서서 들여다보는 이들은 그만큼 타자의 시선에 비친 내가 궁금한 이들이자 그 시선의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일종의 환자들이다. 나의 특정한 얼굴만이 보여 져야지 다른 얼굴, 다른 측면이 보여 지면 안된다. 늘 관리되고 포장되어 매력적이랄까, 마치 소비사회의 매끈한 상품처럼 존재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그런 시선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해 불안해한다. 그래서 악착같이 내 얼굴이 보이는 표면을 찾아 헤매는 것 같기도 하다. 비로소 그 앞에서 잠시 안도의 숨을 내쉰다. 타자들의 시선에 의해 무참히 뜯어 먹히는 내 얼굴이 최소한 흠 잡힐 구석은 없나를 살핀다. 거울은 심리적 위안을 주는 표면이다. 거울을 보았을 때 비로소 타자의 시선은 사라지고 오로지 나를 보는 나의 시선만이 가득하다. 거울을 유독 좋아하는 이들은 타자의 시선이 그만큼 두려운 이들은 아닐까? 나를 독대하고 있는 나라는 자폐적 관계는 나와 거울의 관계이기도 하다.
김송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안에 자신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라고 말하기 어렵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한참 보다가 이내 거울 표면에 비친 모습이 낯설어졌다. 내가 나에게 이질감을 느낀다. 이제 그 이미지는 거울에 비친 상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시선-응시에 잔혹하게 노출된 피학 대상처럼 변해버렸다고 느낀다. 그렇다. 거울은 나를 응시하고 조롱하고 빤하게 들여다본다. 그 응시의 시선이 두렵다.
가장 무서운 것은 누군가의 시선이다. 특히 독점적인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거울은 나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작가는 거울을 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죄다 들춰내는 거울을 만났다. 그것은 기억이자 악몽이고 숨기고 싶기도 하고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이기도 하다. 거울을 보면서 트라우마적 고통을 맛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가에게 거울을 앨범과도 같다.
김송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다가 자신을 보는 거울의 시선을 만났다. 나의 모습은 결코 거울을 피해갈 수 없다. 거울은 내 모든 모습을 보았고 기억하고 있다. 이 거울이라는 완강한 타자의 시선 속에 걸려든 자신의 모습은 비처럼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물에 번진 잉크가 되어 퍼지고 적셔져 있다.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지워지고 흐려진 얼굴, 두상들이 얽혀 있다. 이 복수화 된 자화상은 단일한 하나의 모습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백이자 거울이 보고만 ‘나의 무수한 나’들이다. 불확실한 형상으로 등장하는 이 자화상은 주체이자 동시에 낯선 타자로 분열된 그녀 자신의 얼굴이다.
종이에 잉크, 혹은 먹물을 이용해 그린 이 자화상은 그린 것이자 동시에 지운 것이기도 하다. 그리면서 지우고 지우면서 그려나가는 자화상은 무엇일까? 쉽게 지울 수 있으며, 동시에 지워지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 수용성 매체를 사용해 자신의 얼굴을 반복해서 그리는 것은 기억과 소멸 속에 진동하는 자신의 모습이거나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나의 얼굴이기에 그럴 것이다.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온 자신의 그간의 생의 이력이 중첩되어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잉크로 이루어진 이 섬세한 선묘는 여러 재료를 만나서 효과적으로 번진다. 작가는 수채화 종이 위에 수용성 흑연, 수성 크레용, 커피물이나 차(茶)와 찻잎을 이용해 독특한 연출을 한다.
“수용성 흑연, 잉크 등으로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을 수없이 반복해 그린다. 겹쳐지고 지워지고 번지고 뭉개진 이미지는 순간이 무상함에 대한 은유인 동시에 순간에 대한 집요한 기록이다. 나의 그리기는 순간(ephemeral)과 지속(endurance)의 역설적 관계이다. 이렇게 나 자신을 그리는 두려움, 혹은 그리고 그려지지 않는 자아 혹은 그가 속한 세계에 대한 좌절감이 내 작품을 관통하는 주된 정서이다.”(작가노트)
비처럼 흘러내리는 먹물과 피처럼 흐르는 잉크들이 뒤섞여서 혼돈스러운 나의 내면세계를 암시한다. 아무리 정교하고 명확하게 그리려 해도 내 얼굴은 자꾸 지워지고 사라진다. 나는 나를 그릴 수 없다. 나는 나의 모습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리다가 흘리고 지우고 다시 그 위에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중첩되어 떠오르는 자화상이다.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러한 물리적 변화 속에서, 의도한 것과 의도하지 않는 것들이 혼재되면서 또 다른 이미지로 출몰한다. 그것은 분명 나의 얼굴이지만 동시에 나로부터 불현듯 출현한 또 다른 나의 얼굴이다. 무수한 시간의 축적 속에 잠겨 있던 내가 떠오르고 그와 함께 모호한 기억의 편린들이 부유한다. 심리적 동요와 신경증적 불안의 상태를 암시하는 자화상들이다.
액체성으로 무수히 몰려다니고 비가 되어 흘러내리는 이 무수한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하루 종일 손거울을 들고 사는 이나 틈만 나면 콤팩트를 꺼내 눈언저리와 볼을 살피는 여자, 주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투명한 매개만 있다면 언제라도 그 앞에 멈춰 서서 들여다보는 이들은 그만큼 타자의 시선에 비친 내가 궁금한 이들이자 그 시선의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일종의 환자들이다. 나의 특정한 얼굴만이 보여 져야지 다른 얼굴, 다른 측면이 보여 지면 안된다. 늘 관리되고 포장되어 매력적이랄까, 마치 소비사회의 매끈한 상품처럼 존재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그런 시선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해 불안해한다. 그래서 악착같이 내 얼굴이 보이는 표면을 찾아 헤매는 것 같기도 하다. 비로소 그 앞에서 잠시 안도의 숨을 내쉰다. 타자들의 시선에 의해 무참히 뜯어 먹히는 내 얼굴이 최소한 흠 잡힐 구석은 없나를 살핀다. 거울은 심리적 위안을 주는 표면이다. 거울을 보았을 때 비로소 타자의 시선은 사라지고 오로지 나를 보는 나의 시선만이 가득하다. 거울을 유독 좋아하는 이들은 타자의 시선이 그만큼 두려운 이들은 아닐까? 나를 독대하고 있는 나라는 자폐적 관계는 나와 거울의 관계이기도 하다.
김송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안에 자신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라고 말하기 어렵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한참 보다가 이내 거울 표면에 비친 모습이 낯설어졌다. 내가 나에게 이질감을 느낀다. 이제 그 이미지는 거울에 비친 상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시선-응시에 잔혹하게 노출된 피학 대상처럼 변해버렸다고 느낀다. 그렇다. 거울은 나를 응시하고 조롱하고 빤하게 들여다본다. 그 응시의 시선이 두렵다.
가장 무서운 것은 누군가의 시선이다. 특히 독점적인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거울은 나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작가는 거울을 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죄다 들춰내는 거울을 만났다. 그것은 기억이자 악몽이고 숨기고 싶기도 하고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이기도 하다. 거울을 보면서 트라우마적 고통을 맛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가에게 거울을 앨범과도 같다.
김송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다가 자신을 보는 거울의 시선을 만났다. 나의 모습은 결코 거울을 피해갈 수 없다. 거울은 내 모든 모습을 보았고 기억하고 있다. 이 거울이라는 완강한 타자의 시선 속에 걸려든 자신의 모습은 비처럼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물에 번진 잉크가 되어 퍼지고 적셔져 있다.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지워지고 흐려진 얼굴, 두상들이 얽혀 있다. 이 복수화 된 자화상은 단일한 하나의 모습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백이자 거울이 보고만 ‘나의 무수한 나’들이다. 불확실한 형상으로 등장하는 이 자화상은 주체이자 동시에 낯선 타자로 분열된 그녀 자신의 얼굴이다.
종이에 잉크, 혹은 먹물을 이용해 그린 이 자화상은 그린 것이자 동시에 지운 것이기도 하다. 그리면서 지우고 지우면서 그려나가는 자화상은 무엇일까? 쉽게 지울 수 있으며, 동시에 지워지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 수용성 매체를 사용해 자신의 얼굴을 반복해서 그리는 것은 기억과 소멸 속에 진동하는 자신의 모습이거나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나의 얼굴이기에 그럴 것이다.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온 자신의 그간의 생의 이력이 중첩되어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잉크로 이루어진 이 섬세한 선묘는 여러 재료를 만나서 효과적으로 번진다. 작가는 수채화 종이 위에 수용성 흑연, 수성 크레용, 커피물이나 차(茶)와 찻잎을 이용해 독특한 연출을 한다.
“수용성 흑연, 잉크 등으로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을 수없이 반복해 그린다. 겹쳐지고 지워지고 번지고 뭉개진 이미지는 순간이 무상함에 대한 은유인 동시에 순간에 대한 집요한 기록이다. 나의 그리기는 순간(ephemeral)과 지속(endurance)의 역설적 관계이다. 이렇게 나 자신을 그리는 두려움, 혹은 그리고 그려지지 않는 자아 혹은 그가 속한 세계에 대한 좌절감이 내 작품을 관통하는 주된 정서이다.”(작가노트)
비처럼 흘러내리는 먹물과 피처럼 흐르는 잉크들이 뒤섞여서 혼돈스러운 나의 내면세계를 암시한다. 아무리 정교하고 명확하게 그리려 해도 내 얼굴은 자꾸 지워지고 사라진다. 나는 나를 그릴 수 없다. 나는 나의 모습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리다가 흘리고 지우고 다시 그 위에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중첩되어 떠오르는 자화상이다.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러한 물리적 변화 속에서, 의도한 것과 의도하지 않는 것들이 혼재되면서 또 다른 이미지로 출몰한다. 그것은 분명 나의 얼굴이지만 동시에 나로부터 불현듯 출현한 또 다른 나의 얼굴이다. 무수한 시간의 축적 속에 잠겨 있던 내가 떠오르고 그와 함께 모호한 기억의 편린들이 부유한다. 심리적 동요와 신경증적 불안의 상태를 암시하는 자화상들이다.
액체성으로 무수히 몰려다니고 비가 되어 흘러내리는 이 무수한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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