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유근택의 '가학적 자화상'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유근택은 흔히 동양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내 기억 속에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목판화가로 자리하고 있다. 그는 부드러운 모필과 함께 날카롭고 견고한 칼을 참 잘 다룬다.
무릇 화가란 존재는 연장을 기가 막히게 다루는 이다. 나는 작가들의 작업실을 다니면서 그들의 작품을 보기 이전에 연장, 도구를 먼저 본다. 붓과 나이프, 먹과 벼루, 물감과 목탄, 주걱과 카메라 등 그들의 육체와 함께 동거하고 있고 그네들의 손길에 의해 마모되고 반질거리는 그 연장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들이 다루는 도구나 재료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무수한 시간을 그것과 함께 생활해 왔는지 가늠할 수 있다. 오래 않자 가운데 부분이 움푹 들어간 의자도 그렇고 다 써서 한 곳에 버려진, 쌓아둔 물감통 등이 그렇다. 작업은 무엇보다도 엉덩이의 힘에서 나온다!
수묵화를 주로 그렸던 유근택은 틈나는 대로 목판작업을 병행했다. 모필과 칼은 다르면서도 같다. 부드럽고 강직하게, 유연하면서도 날카롭게 긋고 파고 깎고 칠해나가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이다. 그는 모필을 다루다가 지루해지면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칼을 세운다. 목판의 표면을 파 들어가는 칼은 정직하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일 획의 긴장이 한 번에 파 들어가는 칼에도 예외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목판작업이 대부분 그의 자화상이란 점이다. 물론 모필로 격렬하게 자신의 포상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지만 역시 그의 자화상은 목판이 제맛이다. 유근택은 목판에 자신의 얼굴을 새겼다.
그러나 목판의 표면과 내부는 날카로운 칼질에 의해 파헤쳐지고 결국은 잉크를 묻힌 시커먼 배경 속에 몇 개의 선/나무의 속살이 최소한의 이미지만을 남겼다. 얼굴을 새기고자 한 칼들은 얼굴을 지워내고 온전한 얼굴 이미지를 부재시켰다. 그래서 목판의 나뭇결들은 무참하게 짓이겨지고 긁혀지고 파헤쳐지면서 자신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버렸다.
유근택의 칼질은 자기 얼굴을 새겨 가다가 결국은 이를 포기하고 자신을 은영중 무화시키고 지워버린 것이다. 표현하려는 칼들은 표현을 지우고 이미지를 드러내려는 판은 그 자체의 물성만을 적나라하게 안긴다. 그 안에서 최소한의 이미지만이 살아남아 누군가의 얼굴을 상상케한다. 그것은 텅 빈 얼굴이기도 하다. 얼굴인 동시에 나무의 속살, 나무의 재질, 물성이 자리했다.
원래 자화상(self-portrait)이란 화가가 자신(self)을 재현의 대상으로 하여 그리는(portray) 것이다. 여기서 ‘portray’는 끄집어내다, 발견하다 라는 뜻의 라틴어 ‘portrahery’에 어원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자화상은 자신의 초상을 그리는 것을 넘어 또 하나의 자신을 만나고 내면의 자신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유근택의 자화상은 기존의 자화상과는 무척 다르다. 자신의 얼굴을 선명하게 재현하고 기록한다기 보다는 자기 얼굴을 다소 가학적으로 다룬다. 칼로 긋고 파고 덜어낸다. 목판의 내부로 파고들어 자기 얼굴을 거둬가 버린 듯하다. 결국 자시를 그리고자 하다가 끝내 그리지 못하고 지워내고 경우 남은 흔적이다.
따라서 그의 이 칼질은 표현의 불구성에 대한 자괴감과 자멸감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모든 이미지는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금기의 위반 위에 놓여 있다. 그 금기를 위반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미술행위일 젓이다. 그릴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나 어떻게든지 표현하고 그려내야 하는 미술의 운명, 그 딜레마 속에서 몸을 내민 그런 자화상인 셈이다. 또한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단일한 이미지로 쉽게 표상되기 어렵다는 그런 전언이 담겨있는 듯도 하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무릇 화가란 존재는 연장을 기가 막히게 다루는 이다. 나는 작가들의 작업실을 다니면서 그들의 작품을 보기 이전에 연장, 도구를 먼저 본다. 붓과 나이프, 먹과 벼루, 물감과 목탄, 주걱과 카메라 등 그들의 육체와 함께 동거하고 있고 그네들의 손길에 의해 마모되고 반질거리는 그 연장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들이 다루는 도구나 재료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무수한 시간을 그것과 함께 생활해 왔는지 가늠할 수 있다. 오래 않자 가운데 부분이 움푹 들어간 의자도 그렇고 다 써서 한 곳에 버려진, 쌓아둔 물감통 등이 그렇다. 작업은 무엇보다도 엉덩이의 힘에서 나온다!
수묵화를 주로 그렸던 유근택은 틈나는 대로 목판작업을 병행했다. 모필과 칼은 다르면서도 같다. 부드럽고 강직하게, 유연하면서도 날카롭게 긋고 파고 깎고 칠해나가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이다. 그는 모필을 다루다가 지루해지면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칼을 세운다. 목판의 표면을 파 들어가는 칼은 정직하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일 획의 긴장이 한 번에 파 들어가는 칼에도 예외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목판작업이 대부분 그의 자화상이란 점이다. 물론 모필로 격렬하게 자신의 포상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지만 역시 그의 자화상은 목판이 제맛이다. 유근택은 목판에 자신의 얼굴을 새겼다.
그러나 목판의 표면과 내부는 날카로운 칼질에 의해 파헤쳐지고 결국은 잉크를 묻힌 시커먼 배경 속에 몇 개의 선/나무의 속살이 최소한의 이미지만을 남겼다. 얼굴을 새기고자 한 칼들은 얼굴을 지워내고 온전한 얼굴 이미지를 부재시켰다. 그래서 목판의 나뭇결들은 무참하게 짓이겨지고 긁혀지고 파헤쳐지면서 자신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버렸다.
유근택의 칼질은 자기 얼굴을 새겨 가다가 결국은 이를 포기하고 자신을 은영중 무화시키고 지워버린 것이다. 표현하려는 칼들은 표현을 지우고 이미지를 드러내려는 판은 그 자체의 물성만을 적나라하게 안긴다. 그 안에서 최소한의 이미지만이 살아남아 누군가의 얼굴을 상상케한다. 그것은 텅 빈 얼굴이기도 하다. 얼굴인 동시에 나무의 속살, 나무의 재질, 물성이 자리했다.
원래 자화상(self-portrait)이란 화가가 자신(self)을 재현의 대상으로 하여 그리는(portray) 것이다. 여기서 ‘portray’는 끄집어내다, 발견하다 라는 뜻의 라틴어 ‘portrahery’에 어원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자화상은 자신의 초상을 그리는 것을 넘어 또 하나의 자신을 만나고 내면의 자신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유근택의 자화상은 기존의 자화상과는 무척 다르다. 자신의 얼굴을 선명하게 재현하고 기록한다기 보다는 자기 얼굴을 다소 가학적으로 다룬다. 칼로 긋고 파고 덜어낸다. 목판의 내부로 파고들어 자기 얼굴을 거둬가 버린 듯하다. 결국 자시를 그리고자 하다가 끝내 그리지 못하고 지워내고 경우 남은 흔적이다.
따라서 그의 이 칼질은 표현의 불구성에 대한 자괴감과 자멸감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모든 이미지는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금기의 위반 위에 놓여 있다. 그 금기를 위반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미술행위일 젓이다. 그릴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나 어떻게든지 표현하고 그려내야 하는 미술의 운명, 그 딜레마 속에서 몸을 내민 그런 자화상인 셈이다. 또한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단일한 이미지로 쉽게 표상되기 어렵다는 그런 전언이 담겨있는 듯도 하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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