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묘한 '껍딱 자화상'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이 얼굴은 무척 묘하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고 희화적인가 하면 더러 무섭고 흉측하고 낯설다. 동일한 감정이나 느낌 대신에 복합적이고 상반된 감정들이 공시에 공존하는 그런 얼굴이다. 사실 인간의 얼굴은 지구상의 현존하는 인구의 수보다 더 많다. 개인들마다 몇 개씩의 얼굴을 지니고 있기에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더러 낯익은 누군가의 얼굴에서 미처 보지 못한 또 다른 얼굴을 심심찮게 발견한다. 얼굴만 보아서는 알 수 없다. 사실 얼굴이 전부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얼굴만을 절대적으로 평가하면서, 오독하면서 산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이 한 개인의 모든 것을 대신한다. 그런가하면 얼굴은 시간이 지나고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대체된다. 얼굴은 고정되거나 불변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얼굴은 미지의 세계다. 한 사람에 대한 정보는 전적으로 그 얼굴이 우선한다. 그 세계는 너무 낯설다가도 이내 친숙해진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망막이 그 얼굴들을 기억하고 머리 속에 각인한다. 그러나 그 얼굴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희미해지고 눈과 코와 입술이 모두 지워져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소멸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 그/그녀의 얼굴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무수한 얼굴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 역시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나의 얼굴, 오로지 타인들의 눈에 걸려드는 얼굴 말이다. 그럴 때는 무척 낭패스럽다. 그런가하면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은 보여지는 얼굴뿐이지만 정작 그것으로는 타인을 알지 못한다.
반면 그 얼굴은 한 개인이 지내온 모든 시간의 과정과 마음의 굴곡, 정신의 주름들을 감출 수 없이 보여주는 편이다. 우리는 매번 누군가의 얼굴을 보며 산다. 얼굴을 피할 도리가 없다. 이 세상에는 그 얼굴을 보는 무수한 관점과 시선들이 있다. 착해 보이기도 하고 악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 잘 생기고 못생긴 얼굴, 젊거나 늙은 얼굴, 환한 피부와 곰보자국이나 여드름 혹은 상처가 난 얼굴, 매끈한 피부와 화상을 입은 얼굴, 큰 얼굴과 작은 얼굴도 있다. 얼굴은 단일하지 않다. 타고난 개인의 얼굴도 수시로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변형되고 성형된다.
정의철의 이 자화상은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공존하는 표정을 담고 있다. 커다란 얼굴 하나만 단독으로 설정된 화면은 오로지 그 얼굴의 전면을 보게 한다. 그의 얼굴은 화면 전체를 잠식하고 있는 쭈글쭈글한 질감과 불분명한 형상, 낯선 색감 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좀 더 지켜보면 그 얼굴/가면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친근하기도 하고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가면들은 울다가 웃기를 반복한다. 그 얼굴을 보는 내 눈과 마음도 따라서 마냥 감정들은 부침한다.
나는 정의철의 그림을 보다가 문득 그의 얼굴을 보고 눈을 보았다. 한 쪽 눈이 이상하다. 작가는 말한다. 군대에서 사고로 한 쪽 눈을 실명했단다. 그러니까 그가 만든 이 가면들은 일종의 자화상인 셈이다. 세상 사람들이 개 눈을 박은 이상한 눈, 자신의 그 한 쪽 눈을 보고 우스워하기도 하고 무서워하기도 한 그런 반응을 접하면서 이 같은 자신의 자화상을 재현한 듯 하다. 자신의 얼굴과 그 얼굴에 대한 세상의 반응에서 출발해서 본다는 것과 인식의 문제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불교적 사유로 나아가는 인식의 도정을 새삼스레 만난다. 그는 얼굴 하나를 들고 와서 우리에게 이게 어떻게 보이냐고 묻는다.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인다.
본다는 것은 의심이 많고 불확실하며 조바심을 내는 그 눈의 속성과 한계로부터 시작한다. 이 자화상은 그러니까 보는 문제와 눈의 한계와 그 한계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편견에 대해 유머스러운 조롱이며 그에 대한 따가운 일침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편견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화가란 존재는 그 편견을 부단히 해체하고 불식시키는 자들인지도 모르겠다. 정의철은 자신이 자화상을 닮은 가면/얼굴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 얼굴이 어떻게 보이느냐고 묻고 결국 본다는 것 역시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는 아닐까 하는 화두 하나를 던져준다. 나는 그 화두가 무척 흥미롭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우리는 더러 낯익은 누군가의 얼굴에서 미처 보지 못한 또 다른 얼굴을 심심찮게 발견한다. 얼굴만 보아서는 알 수 없다. 사실 얼굴이 전부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얼굴만을 절대적으로 평가하면서, 오독하면서 산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이 한 개인의 모든 것을 대신한다. 그런가하면 얼굴은 시간이 지나고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대체된다. 얼굴은 고정되거나 불변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얼굴은 미지의 세계다. 한 사람에 대한 정보는 전적으로 그 얼굴이 우선한다. 그 세계는 너무 낯설다가도 이내 친숙해진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망막이 그 얼굴들을 기억하고 머리 속에 각인한다. 그러나 그 얼굴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희미해지고 눈과 코와 입술이 모두 지워져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소멸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 그/그녀의 얼굴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무수한 얼굴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 역시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나의 얼굴, 오로지 타인들의 눈에 걸려드는 얼굴 말이다. 그럴 때는 무척 낭패스럽다. 그런가하면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은 보여지는 얼굴뿐이지만 정작 그것으로는 타인을 알지 못한다.
반면 그 얼굴은 한 개인이 지내온 모든 시간의 과정과 마음의 굴곡, 정신의 주름들을 감출 수 없이 보여주는 편이다. 우리는 매번 누군가의 얼굴을 보며 산다. 얼굴을 피할 도리가 없다. 이 세상에는 그 얼굴을 보는 무수한 관점과 시선들이 있다. 착해 보이기도 하고 악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 잘 생기고 못생긴 얼굴, 젊거나 늙은 얼굴, 환한 피부와 곰보자국이나 여드름 혹은 상처가 난 얼굴, 매끈한 피부와 화상을 입은 얼굴, 큰 얼굴과 작은 얼굴도 있다. 얼굴은 단일하지 않다. 타고난 개인의 얼굴도 수시로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변형되고 성형된다.
정의철의 이 자화상은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공존하는 표정을 담고 있다. 커다란 얼굴 하나만 단독으로 설정된 화면은 오로지 그 얼굴의 전면을 보게 한다. 그의 얼굴은 화면 전체를 잠식하고 있는 쭈글쭈글한 질감과 불분명한 형상, 낯선 색감 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좀 더 지켜보면 그 얼굴/가면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친근하기도 하고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가면들은 울다가 웃기를 반복한다. 그 얼굴을 보는 내 눈과 마음도 따라서 마냥 감정들은 부침한다.
나는 정의철의 그림을 보다가 문득 그의 얼굴을 보고 눈을 보았다. 한 쪽 눈이 이상하다. 작가는 말한다. 군대에서 사고로 한 쪽 눈을 실명했단다. 그러니까 그가 만든 이 가면들은 일종의 자화상인 셈이다. 세상 사람들이 개 눈을 박은 이상한 눈, 자신의 그 한 쪽 눈을 보고 우스워하기도 하고 무서워하기도 한 그런 반응을 접하면서 이 같은 자신의 자화상을 재현한 듯 하다. 자신의 얼굴과 그 얼굴에 대한 세상의 반응에서 출발해서 본다는 것과 인식의 문제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불교적 사유로 나아가는 인식의 도정을 새삼스레 만난다. 그는 얼굴 하나를 들고 와서 우리에게 이게 어떻게 보이냐고 묻는다.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인다.
본다는 것은 의심이 많고 불확실하며 조바심을 내는 그 눈의 속성과 한계로부터 시작한다. 이 자화상은 그러니까 보는 문제와 눈의 한계와 그 한계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편견에 대해 유머스러운 조롱이며 그에 대한 따가운 일침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편견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화가란 존재는 그 편견을 부단히 해체하고 불식시키는 자들인지도 모르겠다. 정의철은 자신이 자화상을 닮은 가면/얼굴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 얼굴이 어떻게 보이느냐고 묻고 결국 본다는 것 역시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는 아닐까 하는 화두 하나를 던져준다. 나는 그 화두가 무척 흥미롭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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