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2008 체제'하 한국이 살 길은?
<뷰스칼럼> 월가 붕괴후 다극시대에 자칫하면 '왕따' 될 판
현대경제연구원의 유병규 본부장이 8일 글로벌 금융패닉이 언제쯤에나 진정 국면에 들어설 것이냐는 질문에 한 답이다. 세계 금융패닉의 진앙인 미국이 조금이라도 진정돼야 세계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작금의 패닉적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섞인 전망이다.
김종인 "앞으로 과연 미국이 뭘 먹고 살아갈지..."
김종인 전 경제수석도 9일 비슷한 전망을 했다. 이미 미 국민의 신뢰를 완전 상실한 조지 W. 부시 미대통령이 아닌 '새 지도자'가 나와야 향후 미국이 어떻게 위기를 해소해 나갈 것인지 방향성이 분명해지고, 패닉 심리가 다소 진정될 것이란 판단에서다.
김 전수석은 그러나 "현재로서는 매케인보다는 오바마가 미국경제 위기 해소의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는 것 같으나 누가 되더라도 미국이 과연 과거처럼 회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 전 수석은 "미국은 오래 전부터 제조업이 붕괴된 상태"라며 "제조업 없이 산업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금융만 갖고서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이번에 금융마저 붕괴됐으니 앞으로 미국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역시 김 전수석다운 날카로운 지적이다. 국제경제전문가들은 미국의 제조업 패권이 1985년 붕괴된 것으로 분석한다. 2차 세계대전후 미국은 세계최강의 제조업 대국이었다. 1945년 종전후 미국은 혼자서 전세계 GDP의 40%를 차지하던 절대 강국이자 세계최대 제조업국가였다.
그러던 것이 1985년, 일본에게 제조업 최강국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당시 미국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 일본 자동차 등 제조업체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미국 노동자들과 극우 쇼비니스트들이 길거리에서 해머로 일본 차를 부수는 '저팬 배씽(일본 두들기기)'였다.
미국은 이에 그해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엔화 환율을 인위적으로 두배나 절상시키고 미국 재무채권을 강제매입토록 하는 등 일본을 전방위로 압박했으나, 일본은 이 모든 압박을 뚫고 세계 최강의 제조업국가로 자리매김했다.
'포스트 1985 미국'의 생명선 금융
미국이 이때 제조업의 대안으로 찾은 것이 '금융'이었다. 월가는 이때부터 미국의 전진기지가 됐다. BIS 비율, 시가평가 방식 등 온갖 금융-회계 건전성 규제로 일본 제조업의 생명선 역할을 해온 일본 금융을 옥조였다. 그러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규제 완화'라는 미명아래 투기적 헤지펀드, 투자은행 등의 무한 팽창을 용인했다.
조지 소로스 등 헤지펀드가 1992~1993 유럽통화 위기때 유럽 중앙은행들을 유린하고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때 한국 등을 초토화하자 '토빈세 도입' 등 핫머니를 규제하자는 국제여론이 빗발쳤으나 미국 정부(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와 미연준은 월가를 철저히 감쌌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린턴 정권의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이나 현재의 헨리 폴슨 모두가 월가 출신으로, 양자 사이엔 '재무부-월가 동맹'이 체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은 흔히 '승수 효과'의 산업이라 불린다. 잘 나갈 때는 번 돈이 또 돈을 벌면서 2의 2배 식으로 엄청나게 부를 불려 나간다. 그러다가 반대 경우에는 말 그대로 초토화된다. 지금 월가 상황이 그렇다.
이렇듯 수십년간 미국의 전진기지 역할을 해온 월가가 이번에 붕괴된 것이다. "미국의 심장이 멈췄다"고 루비니 뉴욕대교수가 표현할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 미국을 밑둥채 뒤흔들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포스트 2008' 체제는?
훗날 역사가들은 2008년을 세계권력 지도가 바뀐 해로 기록할 것이다. 문제는 아직 '포스트 2008 체제'의 윤곽이 안개속이라는 데 있다.
미국은 일단 '금융 복원'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부실자산을 사들이는 데 쓰일 7천억달러 갖고 미국 금융위기가 진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전무하다. IMF사태때 우리가 1차에 이어 2차 공적자금이 투입돼야 했듯, 미국도 2차, 3차로 천문학적 추가비용이 필요할 것이다.
이미 미국정부는 서방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거센 압력에 6천억달러 이상의 증자가 필요한 미국 금융회사들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일시적으로 국영화시키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미국의 차기대통령도 월가와의 동맹을 깨지 못할 것이다. 금융위기로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오바마 후보는 벌써부터 워런 버핏을 '재무장관'으로 영입하겠다고 공개리에 밝힌 상태다.
그러나 어찌어찌 해서 월가를 되살린다 해도 이제 더이상 월가는 어제의 월가일 수 없다. 미국도 어제의 미국일 수 없다. 신뢰는 부서졌고 늘어난 건 천문학적 국가부채뿐이다.
다극시대의 도래? 한국은...
국제전문가들은 이에 '다극체제'의 도래를 전망한다. 하지만 과연 다극체제가 존재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자본주의는 출생이래 일극체제였다. 영국이 지배했었고, 그 뒤를 이어 미국이 지배했다. 다극시대에는 언제나 세계적 차원의 전쟁이 일어났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이 세계패권을 상실한 이후 주인없는 다극체제 시대가 낳은 산물이었다.
'포스트 2008'은 벌써부터 쇼비니즘, 국익우선 등 각종 불길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미국의 새 지도자 역시 국익우선의 정책을 펼칠 게 분명하며, 이 과정에 국가간 숱한 분쟁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도 그 소용돌이에서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벌써부터 자동차시장 추가개방 등 각종 압력이 예고된 상태다. 자칫 잘못하다간 다극시대의 왕따, 희생양이 되기 십상이다. 벌써부터 글로벌 금융위기에 한국만 왕따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원-달러 폭등도 왕따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이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부시 추종적 외교노선'의 전면 수정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그래서 유의미하다. 지금은 경제 위기뿐 아니라, 외교 위기, 생존 위기까지 함께 총체적으로 고심해야 할 중차대한 시점이지, 아무도 안믿는 '보랏빛 낙관론'을 펼칠 때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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