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공황은 '불신(不信) 공황'
<뷰스 칼럼> 해법은 신즉생(信卽生), 잘못하면 '진짜 위기' 도래
고위 외환당국자가 금융시장이 이틀째 극한 공황상태에 빠져든 2일 오후 한 말이다.
"이러다간 진짜 반년후 위기 올 수도"
이 당국자의 말마따나, '9월 외환위기설'은 분명 과잉공포의 측면이 강하다. 환율 방어 등으로 외환보유고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으나 9월에 외환위기가 올 리는 만무하다. 무역적자, 경상적자, 자본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으나 이 또한 9월에 나라가 절단날 정도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원-달러 환율은 연일 폭등하며 1997년 외환위기 전야를 방불케 할 만큼 아노미 상태에 빠져있다. 수입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환율 폭등을 반겨야 할 수출기업들까지 일손을 놓고 있다. 이렇게 환율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는 상황에선 수입, 수출계약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외국투자자들은 "지금 누구도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다. 한 외국투자기관은 "한국 보유 주식을 제로(0)로 만들 것"이란 얘기까지 공개리에 한다. 이렇다 보니, 우리 정부가 발행한 국채 가산금리는 급속히 높아져 어느 새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국가들 수준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앞의 외환당국자가 우려했듯, 반년뒤엔 '진짜 위기'가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심각한 상황 전개다.
재계 "나 지금 떨고 있니?"
악몽의 1997년, 한보를 신호탄으로 기아, 한라, 삼미, 진로, 해태, 대농 등등, 30대 그룹 중 무려 10개 그룹이 쓰러졌다. 그후 살아남은 기업들은 다시는 같은 위기를 맞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부채비율을 끌어내려 지금은 정부로부터 "왜 투자를 않냐"는 질타를 받을 정도로 다수 그룹이 엄청난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내로라하는 굴지의 기업들이 연일 투자가들의 심판대에 오르고 있다.금호아시아나를 시작으로 두산, STX, 코오롱, 동부, 동양, 한화 등등...
이들이 도마위에 오른 것은 '9월 외환위기설'과는 무관하다. '유동성 위기설'이다. 이들은 상당수가 지난 수년간 기업사냥에 전력투구했던 그룹들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외국투자가들 사이에서 '요주의 대상'으로 꼽혔던 그룹들이다. 그러나 당시 이들을 보던 국내시각은 정반대였다. 잘 나가는 전도양양한 그룹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갑자기 시장의 시각이 180도 바뀌었다. 시쳇말로 '건수'만 잡히면 앞다퉈 투매를 하고 있다. 해당기업 입장에서 보면 '시장의 변덕'에 환장할 일이다.
아직 도마위에 오르지 않은 그룹들도 불안하기란 마찬가지다. 한 그룹 임원은 2일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성할 기업이 어디 있겠냐"고 개탄했다. 그는 "나쁜 측면만 보면 삼성전자나 현대차, 현대중공업인들 문제가 없겠냐"며 "최악의 경제상황 속에서도 '선방'하는 측면을 봐야지, 이런 식으로 가다간 진짜 '어게인 1997'이 될 수도 있다"고 극한 우려를 토로했다.
시장이 이렇게 극도로 불안한 마당에, 미분양대란으로 극한 위기에 몰린 건설사 가운데 웬만큼 덩치 큰 회사 하나만 쓰러져도 시장은 완전 공황상태에 빠져들 삼엄한 분위기다.
건설부양책 내놓아도 건설주 폭락
일본의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지난 1일 "한국의 부동산거품이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기사를 썼다. 새로운 내용은 없다. 분양이 안되고 버블세븐 집값이 떨어지고 건설사들의 자금난이 심화되고 있다는 등등,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였다.
하지만 일본최대 경제지가 한국의 부동산거품 파열을 거론한 것 자체가 시장엔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일부 대형건설사를 뺀 건설사 주가가 연일 폭락중이다. 정부가 부동산경기 부양을 위해 26조원의 감세안을 내놓고,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재건축-재개발 촉진 지시를 내렸음에도 시장은 들은 척도 안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부양책들이 버블세븐 등 수도권 일부에 반짝 건설경기를 일으킬 지 모르나, 15만채의 미분양 아파트를 껴안고 있는 대다수 지방건설사들에겐 그림속 떡이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대책 따로, 반응 따로'다.
한 건설사 임원은 "건설사 빅3 또는 빅5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대책"이라며 "당장 죽기 직전인 건설사들은 백약이 무효인 절망적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반 잔의 물'
경제학에서 상투적으로 쓰는 비유중 하나가 '반 잔의 물'이다.
물컵에 물이 반 정도 차 있을 때, "아직 반이나 남아 있네"라고 생각하면 웬만한 악재도 맥을 못추고 모든 게 좋은 쪽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어, 반밖에 안 남아있네"라고 생각하면 모든 게 나쁜 쪽으로 돌아가며 위기가 위기를 낳으며 최악의 경우엔 공황까지 발생한다는 것이다. 지금 상황은 후자다.
관건은 어떻게 후자의 심리상태를 전자의 심리상태로 돌릴 것인가이다. 지금 공황은 '불신 공황'이기 때문이다.
해법은 하나다. 대통령이 됐든, 기업총수가 됐든, 다시 시장의 신뢰를 되찾는 길밖에 없다.
우선 솔직해야 한다. 지금 위기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시장 신뢰를 되찾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해야 한다. 시장이 불신하는 각료도 바꾸고 잘못된 정책은 즉각 폐기해야 한다.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시장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기업사냥 등은 즉각 중단하고 앞으로 어떻게 '반 잔의 물'을 가득 채울 것인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잃어버린 신뢰를 찾는 길은 물론 간단치 않다. "신뢰를 잃는 데는 5분이면 족하나, 되찾는 데는 5년이 걸린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 길밖에 없다. '신즉생(信卽生)'의 비장한 각오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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