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의 '2000~01년 인터뷰 5건' 내용
4번 "BBK는 내가 세운 회사" vs 1번 "BBK는 나와 무관한 회사"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7일 긴급 해명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옛 사업동업자 김경준 씨가 사장으로 있던 BBK 투자자문에 대해 자신의 연루설을 강력 부인했다.
이명박, 당시 4차례 인터뷰 걸쳐 'BBK 연관' 시인
현재까지 본지가 파악한 바로는 2000~2001년 두 해에 걸쳐 이 전 시장이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BBK를 자신의 회사라고 규정한 대목은 ▲2000년 10월 16일자 <중앙일보> ▲2000년 10월 22일 <이코노미스트> ▲2000년 11월 12일 <일요신문> ▲2001년 3월 <월간중앙> 등 총 4차례에 걸쳐서다. 반면 이 전 시장이 BBK가 자신이 아닌 김 씨의 회사임을 명시한 인터뷰는 2000년 10월 16일자 <동아일보> 인터뷰에서다. 의원직을 상실하고 재계로 컴백한 이 전 시장이 두 해에 걸쳐 BBK와 자신의 연관성을 총 4차례 긍정하고 1차례 부정한 셈이다.
먼저 이 전 시장이 언론을 통해 BBK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2000년 10월 16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다.
당시 <“외국인 큰손 확보... 첫해부터 수익 내겠다”>는 기사에서 이 전 시장은 BBK와 자신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국내 증권사들은 사이버 트레이딩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생소한 증권업 투신을 통해 첨단기법의 증권업무를 보여줄 작정이다. 올초 이미 새로운 금융상품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LK이뱅크와 자산관리회사인 BBK를 창업한바 있다. 이뱅크증권중개는 이 두회사를 이용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주로 외국인을 큰 고객으로 삼을 작정이다. BBK를 통해 이미 외국인 큰 손들을 확보해 둔 상태다. 물론 사이버 트레이딩도 한다. 국내 기관들에 대한 파생상품 활용 조언업무도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위험관리 프로그램도 제공하는 전략으로 나갈 계획이다.”(<중앙일보> 2000년 10월 16일자)
이 전 시장은 이어 일주일 뒤인 2000년 10월 22일 <중앙일보>가 발행하는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도 BBK와 자신과의 관계를 언급한다. 당시 이 전 시장과 조선호텔에서 만나 인터뷰를 한 <이코노미스트> 기자는 인터뷰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이 전 시장을 당시 근황을 소개했다.
“李 회장은 98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년여 동안 낭인(浪人)생활을 하다가 올 1월 귀국했다. 귀국 직후 그는 금융상품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인 LK이뱅크와 자산관리회사인 BBK를 창업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증권중개회사인 ‘e뱅크’를 설립, 증권업에까지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경제계 복귀를 선언한 것이다”
이 전 시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미국에서는 워싱턴DC에 머물렀습니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기업과 공기업과의 연관성을 공부했죠. 이 때부터 인터넷산업에 조금씩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라고 말한 뒤, “귀국하고 보니 벤처 산업은 20, 30대만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국내에 퍼져 있었습니다. 40, 50대는 마치 벤처가 자기 분야가 아닌 양 뒤로 물러서 있더라구요. 우리가 팔짱끼고 있으면 인력손실이자 국력낭비예요. 인터넷 비즈니스도 경험 많은 50대가 참여해야 합니다. 첨단 증권·금융업을 통해 ‘노병의 성공신화’를 다시 보여 주겠습니다”라고 앞으로의 각오를 밝혔다.
2000년 이명박, "1년전 BBK란 투자자문사를 세웠는데..."
이 전 시장은 이어 2000년 11월 12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BBK와 자신의 관계성을 3번째 언급하게 된다. <“인터넷에서 다시 ‘첫삽’ 뜹니다”>라는 제하의 인터뷰에서 이 전 시장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뱅크를 통해 낙후된 국내 금융시장에 새로운 금융기업을 선보일 것이다. 1년전 BBK란 투자자문사를 세웠는데 투자자문사에게 증권사는 꼭 필요하다. 이뱅크는 첫해부터 이익을 낼 것이다”(<일요신문> 2000년 11월 12일)
해를 넘겨 2001년 3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 나선 이 전 시장은 4번째 BBK에 대한 언급을 한다.
“나는 어차피 정치방학이 2~3년 갈 것으로 보고 그 기간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새로운 금융기법을 내가 익혀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치를 하더라도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지난해 초에 벌써 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해 펀드를 뭍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자문회사가 필요로하는 것이 증권회사입니다. 그래서 설립한 것입니다”
2000년 이명박, 인터뷰 자리에서 김경준 어깨 토닥거리며 신뢰 표시
반면 이 전 시장은 2000년 10월 16일자 <중앙일보> 기사가 나간 같은 날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BBK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타 언론 인터뷰와는 사뭇 다르게 밝히고 있다. 주목할 점은 당시 인터뷰 내용을 뜯어보면 김경준 씨가 배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감독당국에선 ‘첫해 흑자’를 근거로 사업계획서를 냈더니 ‘현실적인 계획’을 내라고 하더군요. 2001년 말이면 누가 맞는지 드러납니다. 물론 통상적인 사이버거래에 치중하면 초기 투자 때문에 당연히 적자죠.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업을 벌일 겁니다. 현대시절에도 그랬지만 3, 4년 지나서야 흑자를 낸다고 생각한다면 사업을 중단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동아일보> 기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기록했다.
이 대표(이명박)가 꼽는 흑자비법은 아비트리지(차익) 거래. 미국계 살로먼스미스바니에서 99년 초 연 수익률 120%대를 기록한 김경준 BBK 투자자문 사장(34)을 영입했다. 이 대표는 김사장에 대한 기대가 몹시 큰 눈치다. “김 사장(김경준)이 지난해 BBK 설립 이후 한국증시의 주가가 60% 빠질 때 아비트리지 거래로 28.8%의 수익률을 냈다”고 소개하면서 연방 김 사장의 어깨를 토닥였다.
김경준 씨는 당시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한국금융시장이 외국인의 텃밭이 돼버렸어요. 우리는 일본 대만 자본시장에 진출합니다. 필요한 라이선스를 따 뒀습니다.”(김사장)
이명박, 당시 4차례 인터뷰 걸쳐 'BBK 연관' 시인
현재까지 본지가 파악한 바로는 2000~2001년 두 해에 걸쳐 이 전 시장이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BBK를 자신의 회사라고 규정한 대목은 ▲2000년 10월 16일자 <중앙일보> ▲2000년 10월 22일 <이코노미스트> ▲2000년 11월 12일 <일요신문> ▲2001년 3월 <월간중앙> 등 총 4차례에 걸쳐서다. 반면 이 전 시장이 BBK가 자신이 아닌 김 씨의 회사임을 명시한 인터뷰는 2000년 10월 16일자 <동아일보> 인터뷰에서다. 의원직을 상실하고 재계로 컴백한 이 전 시장이 두 해에 걸쳐 BBK와 자신의 연관성을 총 4차례 긍정하고 1차례 부정한 셈이다.
먼저 이 전 시장이 언론을 통해 BBK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2000년 10월 16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다.
당시 <“외국인 큰손 확보... 첫해부터 수익 내겠다”>는 기사에서 이 전 시장은 BBK와 자신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국내 증권사들은 사이버 트레이딩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생소한 증권업 투신을 통해 첨단기법의 증권업무를 보여줄 작정이다. 올초 이미 새로운 금융상품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LK이뱅크와 자산관리회사인 BBK를 창업한바 있다. 이뱅크증권중개는 이 두회사를 이용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주로 외국인을 큰 고객으로 삼을 작정이다. BBK를 통해 이미 외국인 큰 손들을 확보해 둔 상태다. 물론 사이버 트레이딩도 한다. 국내 기관들에 대한 파생상품 활용 조언업무도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위험관리 프로그램도 제공하는 전략으로 나갈 계획이다.”(<중앙일보> 2000년 10월 16일자)
이 전 시장은 이어 일주일 뒤인 2000년 10월 22일 <중앙일보>가 발행하는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도 BBK와 자신과의 관계를 언급한다. 당시 이 전 시장과 조선호텔에서 만나 인터뷰를 한 <이코노미스트> 기자는 인터뷰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이 전 시장을 당시 근황을 소개했다.
“李 회장은 98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년여 동안 낭인(浪人)생활을 하다가 올 1월 귀국했다. 귀국 직후 그는 금융상품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인 LK이뱅크와 자산관리회사인 BBK를 창업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증권중개회사인 ‘e뱅크’를 설립, 증권업에까지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경제계 복귀를 선언한 것이다”
이 전 시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미국에서는 워싱턴DC에 머물렀습니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기업과 공기업과의 연관성을 공부했죠. 이 때부터 인터넷산업에 조금씩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라고 말한 뒤, “귀국하고 보니 벤처 산업은 20, 30대만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국내에 퍼져 있었습니다. 40, 50대는 마치 벤처가 자기 분야가 아닌 양 뒤로 물러서 있더라구요. 우리가 팔짱끼고 있으면 인력손실이자 국력낭비예요. 인터넷 비즈니스도 경험 많은 50대가 참여해야 합니다. 첨단 증권·금융업을 통해 ‘노병의 성공신화’를 다시 보여 주겠습니다”라고 앞으로의 각오를 밝혔다.
2000년 이명박, "1년전 BBK란 투자자문사를 세웠는데..."
이 전 시장은 이어 2000년 11월 12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BBK와 자신의 관계성을 3번째 언급하게 된다. <“인터넷에서 다시 ‘첫삽’ 뜹니다”>라는 제하의 인터뷰에서 이 전 시장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뱅크를 통해 낙후된 국내 금융시장에 새로운 금융기업을 선보일 것이다. 1년전 BBK란 투자자문사를 세웠는데 투자자문사에게 증권사는 꼭 필요하다. 이뱅크는 첫해부터 이익을 낼 것이다”(<일요신문> 2000년 11월 12일)
해를 넘겨 2001년 3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 나선 이 전 시장은 4번째 BBK에 대한 언급을 한다.
“나는 어차피 정치방학이 2~3년 갈 것으로 보고 그 기간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새로운 금융기법을 내가 익혀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치를 하더라도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지난해 초에 벌써 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해 펀드를 뭍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자문회사가 필요로하는 것이 증권회사입니다. 그래서 설립한 것입니다”
2000년 이명박, 인터뷰 자리에서 김경준 어깨 토닥거리며 신뢰 표시
반면 이 전 시장은 2000년 10월 16일자 <중앙일보> 기사가 나간 같은 날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BBK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타 언론 인터뷰와는 사뭇 다르게 밝히고 있다. 주목할 점은 당시 인터뷰 내용을 뜯어보면 김경준 씨가 배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감독당국에선 ‘첫해 흑자’를 근거로 사업계획서를 냈더니 ‘현실적인 계획’을 내라고 하더군요. 2001년 말이면 누가 맞는지 드러납니다. 물론 통상적인 사이버거래에 치중하면 초기 투자 때문에 당연히 적자죠.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업을 벌일 겁니다. 현대시절에도 그랬지만 3, 4년 지나서야 흑자를 낸다고 생각한다면 사업을 중단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동아일보> 기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기록했다.
이 대표(이명박)가 꼽는 흑자비법은 아비트리지(차익) 거래. 미국계 살로먼스미스바니에서 99년 초 연 수익률 120%대를 기록한 김경준 BBK 투자자문 사장(34)을 영입했다. 이 대표는 김사장에 대한 기대가 몹시 큰 눈치다. “김 사장(김경준)이 지난해 BBK 설립 이후 한국증시의 주가가 60% 빠질 때 아비트리지 거래로 28.8%의 수익률을 냈다”고 소개하면서 연방 김 사장의 어깨를 토닥였다.
김경준 씨는 당시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한국금융시장이 외국인의 텃밭이 돼버렸어요. 우리는 일본 대만 자본시장에 진출합니다. 필요한 라이선스를 따 뒀습니다.”(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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