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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수령 이승만

위대한수령
조회: 297

위대한수령

朝鮮人民共和國 = 主席 李承晩 文敎部長 金性洙

1945.9.

[ 朝鮮人民共和國 = 主席 李承晩 文敎部長 金性洙 ]

인공의 정부부서 발표

연월일1945년 09월 14일
출전매일신보 1945년 09월 15일

인공의 정부부서 발표

朝鮮人民共和國에서는 지난 6日 全國人民代表會議에서 선출된 인민대표들이 그동안 연일 정부조각에 주력한 결과 다음과 같은 부서를 결정 14日 政府로부터 발표하다.

◊ 朝鮮人民共和國政府 部署

主席 李承晩

副主席 呂運亨
國務總理 許憲
內部部長 金九
(臨時代理 許憲)
外交部長 金奎植
(臨時代理 呂運亨)
軍事部長 金元鳳
(臨時代理 金世鎔)

財政部長 曹晩植
保安部長 崔容達
司法部長 金炳魯
(臨時代理 許憲)

文敎部長 金性洙
(臨時代理 李萬珪)
宣傳部長 李觀述
經濟部長 河弼源
農林部長 康基德
保健部長 李萬珪

遞信部長 申翼熙
(臨時代理 李康國)
交通部長 洪南杓
勞動部長 李胃相
書記長 申康玉
法制局長 崔益翰
企劃局長 鄭栢

*

김성수를 친일파라 보았다면 인공이 문교부장으로 선정했을 리가 없습니다.

주목할 점은 빨갱이들이 뽕가는 "위대한 수령"은 인공 명단에 없으며

인공도 추대한 우리민족의 "위대한 수령"은 이승만이란 사실입니다.

*

1945.10.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 ......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의 추대는 조선인민 총의이며 ........

......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 ........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이승만 귀국환영 담화 발표

매일신보
1945년 10월 18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제1차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는 동시에 환영준비위원을 선출하고 환영회 준비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이승만박사는 드디어 귀국하였다. 3천만 민중의 경앙대망이었던 만큼 전국은 환호에 넘치고 있다. 우리 해방운동에 있어서의 박사의 위공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의 추대는 조선인민 총의이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해방 조선은 독립조선으로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치는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17일 오후 2시 부주석 呂運亨, 국무총리 許憲 양씨가 崔容達, 李康國 양씨를 대동하고 조선호텔로 이박사를 방문하여 환영의 인사를 드린 다음 8월 15일 이후 경과에 대한 보고로 문서와 참고자료를 수교하였다. 원로여정에 피로하실 터이므로 후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일행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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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 32%, 김구 22%, ......

..... 박헌영 10%, 김일성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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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지도자 지지도를 묻는 조사에서는 이승만 32%, 김구 22%, 김규식 9% 등 우파 쪽이 72%인 반면, 여운형 13%, 박헌영 10%, 김일성 3% 등 좌파 쪽은 28%에 그쳤다. 같은 해 “미국인이 소련인보다 더 심한가”란 질문에는 ‘아니다’(68%)가 ‘그렇다’(16%)를 압도했다(전상인, ‘고개숙인 수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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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朴憲永 84인 1% 强 ........ ]

동아일보 1946년 07월 23일

한국여론협회, 초대 대통령과 식량정책 등에 대한 여론조사결과

韓國與論協會는 (略) 17일 서울시내 鍾路 南大門 鍾路 4정목의 3개소 통행인 6,671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문으로 여론조사를 하였다는데 그 結果는 다음과 같다.

(問) 第 1次 大統領은 누구인가

李承晩 博士 1,916인 29% 弱

金九 主席 702인 11% 弱

金奎植 博士 694인 10% 强

呂運亨 689인 10% 弱

朴憲永 84인 1% 强

其他 110인 2% 弱

모르겠다 2,476인 37% 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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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정보보고서는 조봉암이 1946년 9월 신당 창당과 관련된 집회에서 5퍼센트밖에 지지층을 가지지 못한 공산당이나 극우세력이 정권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나는 95퍼센트의 중간층을 중핵으로 한 정당을 조직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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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 ......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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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산주의는 공산국가 소련과 결부되어 폭동, 혁명, 테러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공산당 대신 영국의 노동당(勞動黨)과 같은 온건한 복지정당으로 위장하는 것이 편했다. 그 때문에 김일성은 자신의 조직을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바꾸고, 남한에서도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의 좌파 3당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통합하게 했던 것이다.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 사건에서 많은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고 다치자, 김일성은 현지로 찾아가 유감을 표시하면서,“우리 노동당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지,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요”라고 자신을 감추었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 위장한 김일성의 전술은 성공했다. 그러므로 그는“그때에(해방 직후에) 우리가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만족스럽게 회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 혁명’도 ‘민주적 개혁’으로 둔갑했다. 그리하여 토지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몰수된 지주들의 토지에 대한 경작권이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화폐 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상인들의 자본이 몰수되었다. 그 결과로 기득권을 가진 식자층과 유산계급은 뿌리가 뽑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 사회에 인재 부족의 재앙을 가져 왔다. 이른바‘민주개혁’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사라졌는가는 김일성대학을 비롯한 대학들의 이공계(理工系) 신입생이 부족한 사실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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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1002&num=390

2010년 여름호
[특집] 이승만 시기의 보수세력과 민주제도
[이주영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 김일성도 ‘전국을 통치할 분은 이 박사밖에 없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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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촉에는 누가 참여했습니까.

“정확한 기억은 못하는데 대부분 참여했지.”

―이 박사가 만든 단체에 어떻게 공산당까지 참여했습니까.

“당시 이 박사는 민족의 어른이었어. 임시정부 대통령을 했고 대한제국 때부터 독립운동을 한 분이니 다들 이 박사를 모시려했지. 건준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에 주석으로 추대됐고, 북의 김일성도 ‘전국을 통치할 분은 이 박사밖에 없다’고 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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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8200508070248.html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이야기]6 당시 이승만박사, 백범과 소홀했다고 친형제 같았어

이을식옹이 말하는 이승만과 '독촉'
요즘 사람들 건준만 알고 독촉은 몰라… 해방정국 주도했지

입력 2005.08.07

*

1919.

[......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

....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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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40대 중반에 이른 李承晩과 金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李承晩은 3·1 운동 이후에 국내외에서 선포되거나 논의되던 예닐곱 개의 臨時政府에서 실질적인 정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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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外地의 인심이 李承晩에게 瀑注해』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추이가 오직 李承晩에게 폭주하였었다〉는 현순의 표현대로 이때는 이미 李承晩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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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31. 임시정부 국무총리 李承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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