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취약계층, '맹추위'에 동사-자살-구걸...
<현장> 핵실험후 인도지원 끊겨 '꽃제비' 등 최악의 생존위기
12월 들어 한파가 본격적으로 밀어닥치면서 북한에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꽃제비를 비롯한 취약계층의 겨울살이가 갈수록 힘겨워지고 있으며, 평남 신양군에서는 최근 노부부가 추위로 얼어죽고 가족생계를 책임지지 못한 한 농부가 자살하는 등 사고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한파 속에 꽃제비들 동냥 얻으러 다니느라 분주
대북 지원 민간단체인 <좋은 벗들>은 6일자 북한소식지 <오늘의 북한소식>을 통해 "최근 맹추위가 본격화되면서 저녁만 되면 김책시 성진제강소의 재무지에는 13-16세 사이의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온기를 찾아 모여들고 있으며, 김책-고원행 열차와 청진-평양행 24열차 등에는 노래를 부르거나 심부름으로 살아가는 꽃제비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좋은 벗들>에 따르면, 성진제강소를 찾은 올해 열 세 살 된 한 남자아이의 경우“여름에는 그런대로 먹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추워서 잠자는 것이 제일 힘들다. 며칠 전에는 신발을 하나 얻자고 도적질하다 붙잡혀 매만 맞았다. 역 대합실도 들여놓지 않으니 어디서 자겠는가? 여기 재무지가 우리에겐 집과 같다”라고 말했다. 열차원들은 “저 아이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만 든다. 부모들은 저 자식들을 한번 봐야 한다. 열한 살 먹은 애가 무슨 철이 있다고 어린 동생을 먹여 살리며 이 열차안에서 세 달째나 살고 있겠는가, 이 열차 칸이 저 아이들의 집이고 식당 칸으로 되고 있다”고 측은해했다.
<좋은 벗들>은 "고원 역과 시장 주변에도 여전히 꽃제비 아이들과 노인들이 세숫물이나 비누, 수건, 양칫물 등을 팔며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열차를 기다리거나 정차하는 동안 열차 승객들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한 사람당 보통 1백-1백50원을 받고 있으며 어디에서든 “세수하세요, 더운 물입니다”고 외치며 다니는 아이들과 노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또 고원역에 상주하는 한 14살 여자 아이는 새까만 얼굴에 두 눈만 반짝이는데 보기에도 시릴 정도로 종아리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바지에 반팔 상의를 입고, 맨발에 다 헤진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이 키 작은 아이는 "가만히 서 있으면 춥다"며 힘이 없는데도 부지런히 걷고 뛰면서 심부름과 동냥을 얻으러 다니느라 바빴다.
고원역의 한 관리원은 "꽃제비들이 역 대합실에 드나들면 도적질을 하니 어서 내쫓으라"고 소리치는 손님들에게 “자식 가진 부모들이 그런 말을 하면 되겠는가. 이 애들을 내 쫓으면 아이들이 어디서 잠을 자겠소. 제 새끼로 생각하고 여기서 바람이라도 막게 내버려 두시오”라며 만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손님들은 "스무 명 넘는 꽃제비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합실 아무데서나 잠을 자는 바람에 몸에 가득한 이가 옮는다"며 여전히 불만이 높다고 <좋은 벗들>은 전했다.
노부부, 강추위 못이기고 남조선에서 보내온 모포 2장 덮은 채 사망
또 지난 11월 10일에는 신양군에 인접한 거흥골에서 수해 피해로 초막에 임시거처를 마련했던 한 노부부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목숨을 잃었던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군대를 갓 제대하고 돌아온 아들은 신양읍의 집 건설 노력 동원에 나가있었고, 역시 군에서 제대한 딸은 어떻게든 하루빨리 집을 마련해보려고 평성에 가는 등 자녀들이 집을 비운 동안 노인들끼리 수재민 구제미를 받아 간신히 굶주림은 면해왔으나 본격적으로 영하로 뚝 떨어진 추위에는 꼼짝하지 못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지원해 준 모포 두 장으로 추위를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들과 딸은 집을 떠나기 전에 “이 땅에서 최하층으로 살면서 한 생을 땅과 씨름해온 우리이지만 생전에 마지막으로 저 남조선 사람들이 보내준 구제미 덕에 밥을 먹으며 살아보고 모포라도 덮어보게 되였으니 잊어지지가 않는다. 국가에서 집을 지어 준다지만 언제 제 집에 가겠느냐. 너희들은 제 손만 믿고 서로 도와가며 살아라”고 했던 부모님의 말씀이 이제는 유언이 되고 말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 손만 믿고 살라”는 말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대량아사를 겪으면서 주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진 말이라고 <좋은 벗들>은 전했다.
가족 생계 걱정에 굶주림과 한파를 못 이긴 채 음독자살도
또 역시 최근 평안남도 신양군 인평에서 수해를 입고 산중 밭에 초막을 짓고 살던 한 농장원이 계속되는 굶주림과 한파를 못 이겨 서슬(간수)을 마시고 자살한 사건도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좋은 벗들>에 따르면, 올해 57세인 이 농장원이 아내와 딸이 밖에 일하러 나간 사이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서슬을 먹고 자살을 감행했으며, 마침 초막에 돌아온 딸이 아버지를 발견하고 급히 흔들어 깨우자, 아버지는 “미안하다. 나 혼자 이렇게 가서. 식량도, 덮을 것도 없이 너희들 앞날이 어떻게 되겠는지 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나를 욕 많이 해라. 앞으로 제 손만 믿고 살아라. 나처럼 시키는 대로 머저리처럼 살지 말고”라는 유언을 남긴 뒤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
그는 그동안 "집이 언제 복구될 지 기약 없이 초막에서 기다리다가는 산중 강추위에 얼어 죽을 것이 뻔하다"며 가족들의 생계에 시름이 매우 깊었다. 딸은 "세대주로서 가족을 보살필 능력이 안 된다는 자괴감에 빠진 아버지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 것 같다"며 울먹였다.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집안에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몰라 술을 잘 못 마셔 목숨을 잃은 것으로 마을에 알렸으나 마을 주민 중에 사정을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좋은 벗들>은 전했다.
한파 속에 꽃제비들 동냥 얻으러 다니느라 분주
대북 지원 민간단체인 <좋은 벗들>은 6일자 북한소식지 <오늘의 북한소식>을 통해 "최근 맹추위가 본격화되면서 저녁만 되면 김책시 성진제강소의 재무지에는 13-16세 사이의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온기를 찾아 모여들고 있으며, 김책-고원행 열차와 청진-평양행 24열차 등에는 노래를 부르거나 심부름으로 살아가는 꽃제비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좋은 벗들>에 따르면, 성진제강소를 찾은 올해 열 세 살 된 한 남자아이의 경우“여름에는 그런대로 먹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추워서 잠자는 것이 제일 힘들다. 며칠 전에는 신발을 하나 얻자고 도적질하다 붙잡혀 매만 맞았다. 역 대합실도 들여놓지 않으니 어디서 자겠는가? 여기 재무지가 우리에겐 집과 같다”라고 말했다. 열차원들은 “저 아이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만 든다. 부모들은 저 자식들을 한번 봐야 한다. 열한 살 먹은 애가 무슨 철이 있다고 어린 동생을 먹여 살리며 이 열차안에서 세 달째나 살고 있겠는가, 이 열차 칸이 저 아이들의 집이고 식당 칸으로 되고 있다”고 측은해했다.
<좋은 벗들>은 "고원 역과 시장 주변에도 여전히 꽃제비 아이들과 노인들이 세숫물이나 비누, 수건, 양칫물 등을 팔며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열차를 기다리거나 정차하는 동안 열차 승객들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한 사람당 보통 1백-1백50원을 받고 있으며 어디에서든 “세수하세요, 더운 물입니다”고 외치며 다니는 아이들과 노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또 고원역에 상주하는 한 14살 여자 아이는 새까만 얼굴에 두 눈만 반짝이는데 보기에도 시릴 정도로 종아리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바지에 반팔 상의를 입고, 맨발에 다 헤진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이 키 작은 아이는 "가만히 서 있으면 춥다"며 힘이 없는데도 부지런히 걷고 뛰면서 심부름과 동냥을 얻으러 다니느라 바빴다.
고원역의 한 관리원은 "꽃제비들이 역 대합실에 드나들면 도적질을 하니 어서 내쫓으라"고 소리치는 손님들에게 “자식 가진 부모들이 그런 말을 하면 되겠는가. 이 애들을 내 쫓으면 아이들이 어디서 잠을 자겠소. 제 새끼로 생각하고 여기서 바람이라도 막게 내버려 두시오”라며 만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손님들은 "스무 명 넘는 꽃제비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합실 아무데서나 잠을 자는 바람에 몸에 가득한 이가 옮는다"며 여전히 불만이 높다고 <좋은 벗들>은 전했다.
노부부, 강추위 못이기고 남조선에서 보내온 모포 2장 덮은 채 사망
또 지난 11월 10일에는 신양군에 인접한 거흥골에서 수해 피해로 초막에 임시거처를 마련했던 한 노부부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목숨을 잃었던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군대를 갓 제대하고 돌아온 아들은 신양읍의 집 건설 노력 동원에 나가있었고, 역시 군에서 제대한 딸은 어떻게든 하루빨리 집을 마련해보려고 평성에 가는 등 자녀들이 집을 비운 동안 노인들끼리 수재민 구제미를 받아 간신히 굶주림은 면해왔으나 본격적으로 영하로 뚝 떨어진 추위에는 꼼짝하지 못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지원해 준 모포 두 장으로 추위를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들과 딸은 집을 떠나기 전에 “이 땅에서 최하층으로 살면서 한 생을 땅과 씨름해온 우리이지만 생전에 마지막으로 저 남조선 사람들이 보내준 구제미 덕에 밥을 먹으며 살아보고 모포라도 덮어보게 되였으니 잊어지지가 않는다. 국가에서 집을 지어 준다지만 언제 제 집에 가겠느냐. 너희들은 제 손만 믿고 서로 도와가며 살아라”고 했던 부모님의 말씀이 이제는 유언이 되고 말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 손만 믿고 살라”는 말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대량아사를 겪으면서 주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진 말이라고 <좋은 벗들>은 전했다.
가족 생계 걱정에 굶주림과 한파를 못 이긴 채 음독자살도
또 역시 최근 평안남도 신양군 인평에서 수해를 입고 산중 밭에 초막을 짓고 살던 한 농장원이 계속되는 굶주림과 한파를 못 이겨 서슬(간수)을 마시고 자살한 사건도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좋은 벗들>에 따르면, 올해 57세인 이 농장원이 아내와 딸이 밖에 일하러 나간 사이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서슬을 먹고 자살을 감행했으며, 마침 초막에 돌아온 딸이 아버지를 발견하고 급히 흔들어 깨우자, 아버지는 “미안하다. 나 혼자 이렇게 가서. 식량도, 덮을 것도 없이 너희들 앞날이 어떻게 되겠는지 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나를 욕 많이 해라. 앞으로 제 손만 믿고 살아라. 나처럼 시키는 대로 머저리처럼 살지 말고”라는 유언을 남긴 뒤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
그는 그동안 "집이 언제 복구될 지 기약 없이 초막에서 기다리다가는 산중 강추위에 얼어 죽을 것이 뻔하다"며 가족들의 생계에 시름이 매우 깊었다. 딸은 "세대주로서 가족을 보살필 능력이 안 된다는 자괴감에 빠진 아버지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 것 같다"며 울먹였다.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집안에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몰라 술을 잘 못 마셔 목숨을 잃은 것으로 마을에 알렸으나 마을 주민 중에 사정을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좋은 벗들>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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