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마지막 어른' 강원용 목사의 유훈
[전문] 두 이야기 '바이체커에게 배울 점' '김대중 구명사'
우리 시대의 '마지막 어른'이 17일 우리 곁을 떠나셨다. '큰 어른'이 너무나 드문 시대이기에, '큰 어른'의 가르침이 너무나 절실히 필요한 분열의 시대이기에 그 분의 떠남은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
그 분은 '보수'였다. 그러나 '합리적 보수'였다. 그 어떤 '진보'보다 민생과 인권과 평화와 환경을 중시했고, 무엇보다 '평화통일'을 최고의 지상가치로 삼았던 이 시대의 진정한 '보수'였다. 진보세력이 존경한 드문 보수였다. 가인 김병로 선생이래 거의 없는 예다.
그 분은 역대의 모든 권력과 만났고, 그들에게 쓴소리를 마다 안했다. 철권정치 시절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서 "김대중을 살려달라"고 했고, 취임한 지 얼마 안돼 "재신임" 운운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헌법에도 없는 그런 경박한 결정을 하다니 대단히 잘못됐다. 바르게 말하는 참모를 두라.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어떤이는 생전의 고인을 "이 시대의 현실적 원로"라고까지 칭송하기도 했다.
그 분은 독실한 목회자이자 민중의 혁명가였고 평화와 환경을 수호하는 시민운동가였고, 인터넷 혁명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새 시대의 도래를 예견했던 선각자이기도 했다. 그 분은 단순한 '원로'가 아니라 실로 이 땅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1917년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난 간고한 일제 강점기를 거쳐 삼엄한 철권통지 시절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은 사건과 만난 사람은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그 분은 자신이 떠날 때가 임박했음을 알았는지 3년전인 2003년 6월 5권의 자서전 <역사의 언덕에서>(한길사 간)를 펴내기도 했다. 그 분은 우리 현대사를 만든 핵심적인 사람들과 안팎으로 연계돼있고 역사의 진실을 증언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는 분이셨다. 자서전에 언급된 '이름 있는' 사람들을 따로 묶은 인명록만 70쪽이 넘을 정도로 그 분의 교우는 두텁고 광대했다.
그 분이 자서전을 쓴 것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해서였다. 자서전의 부제도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 체험'이었다.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민족숙원인 통일을 달성해 주기를 바라는 바람에서였다. 그 분은 "아직 뇌 세포가 건전하게 활동하는 동안" 자신이 겪은 모든 체험을 전하고 싶었다고 자서전을 쓴 이유를 밝히기도 하셨다.
"나는 독선적이고 폐쇄적으로 대립하는 역사속에서 양극을 넘어선 제3지대에 내가 설 자리를 마련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Between and Beyond)' 살고자 했던 나는 항상 양극 사이에서 좁고 험한 길을 걸어야 했다. 나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중간파, 때로는 회색분자 취급도 받았다.
그러나 어느 편은 '절대 선'이고 그 반대편은 '절대 악'이란 사고방식에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밝은 햇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이 세상에 완전한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의 현대사와 그 현대사에 연관된 사람들을 평가할 때도 나는 이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그 분이 자서전에서 밝힌 자신의 삶의 궤적이다.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유훈이기도 하다.
그 분의 큰 뜻, 큰 유훈을 알기 위해선 그 분이 남기신 말과 글들을 보는 게 첩경일 것이다. 여기에 그 분의 <자서전> 중에서 이야기 두토막을 전제하도록 한다. 하나는 5권에 나오는 폰 바이체커 전 독일대통령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4권에 나오는 김대중 구명 비사이다.
바이체커에게 배울 점
내가 바이체커를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모인 WCC 총회때였다. 이후 1975년까지 그와 나는 함께 WCC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년에 적어도 두번씩은 만났다. 1975년도에 그가 정치에 전력하기 위해 WCC를 그만 둘 때도 우리는 가급적 계속해서 만날 기회를 만들자고 약속했고, 그후 내가 유럽에 갈 때면 빠짐없이 만났다.
그는 한국에 왔을 때 나의 소개로 김대중을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대중이 정치탄압을 받고 있을 때 빌리 브란트 당수와 함께 석방을 위해 크게 노력하기도 했다.
정치인으로 그가 걸어온 행적을 지켜보아온 나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닌 민족지도자로서 그의 면모에 평소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21세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정치적 지도자를 갈망하는 우리 국민들과 특히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점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리하프트 폰 바이체커는 1920년 독일 귀족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뿐만 아니라 형과 동생도 정치활동을 펼쳤는데, 세 형태의 정치노선은 조금씩 다르다.
우선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그의 형 카를은 1957년 서둑 핵무장 반대운동을 했으며 '괴팅겐 선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 형은 사회민주당(SPD) 대통려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동생은 자유독일당(FDP)의 지도자, 그리고 리하르트는 기독교민주당동맹(CDU)에 속하며 10년동안 대통령을 지냈다.
바이체커는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과 역사학을 공부했고, 옥스퍼드 대학과 그로노블 대학에서도 공부했다. 1969년 연방의회 의원에 당선되기까지 그는 평신도로서 독일 개신교연합회의 의장, 개신도 신도연합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그 당시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중앙위원, 실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나와 가까이 지냈다.
정치계에 본격 진출하면서 연방의회 부의장, 베를린 시장을 거쳐 1984년 7월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이후 10년동안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독일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는 대통령 임기가 끝난 뒤에도 유럽공동체 형성에 노력을 기울였고, 유엔의 '미래를 연구하는 모임(IWG)' 공동의장을 지냈다. 그는 지금도 다방면으로 활동을 하며 한시도 사회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외국인 정치가인 바이체커를 특별히 지면을 할애하면서 소개하는 것은,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 그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독일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하기까지 지도자로서 그가 지켜오고 실천해온 정치철학과 행동에서 우리는 통일에 도움이 되는 뭔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바이체커는 1985년 5월8일 독일 패전 40주년이 되는 날, 정부와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모인 국회에서 '광야 40년'이라는 제목으로 기념연설을 했다. "오늘은 독일의 패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슬픈 날이지만, 우리 독일민족이 히틀러 정권에서 해방된 날이다"로 시작되는 이 연설은 20여개국에 번역됐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강연 내용 중에서 특히 나의 가슴을 두드린 구절이 있다.
"우리는 과거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고 그런 슬픈 역사는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덮어두게 되면 우리는 오늘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프더라도 과거의 쓰라린 역사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겨서 그것이 확실하게 기억되도록 합시다. 그러면 거기서 화해라는 것이 나옵니다. 과거 청산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 독일과 적대관계를 가졌던 나라들이 있는데, 이들 앞에서 우리는 잘못된 우리의 과거를 마음이 아프더라도 되새기고 청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와 화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의 뼈아픔은 절대로 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이체커는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히틀러 정권의 최초의 피해자가 폴란드였는데,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폴란드를 방문한 일이었다. 당연히 폴란드에서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대접받으려고 간 것이 아니라, 폴란드 국민에게 사과하러 간 것이었기에 폴란드 국민들의 태도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폴란드를 유럽공동체(EU)에 가입하도록 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독일 정치인 중 바이체커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당인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도 수상이 되자마자 폴란드의 유대인 묘지에 가서 무릎 꿇고 앉아 주먹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브란트나 바이체커의 행동은 결국 지금 독일이 유럽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전후 아시아에서 일본이 취해온 태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체커는 정치인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정치가(stateman)이고, 다른 하나는 정략가(politician)이다. 정치가는 민족과 다음 세대에 미칠 영향을 먼저 생각하지만, 정략가는 민족보다 자신의 정치적 이해와 소속정당의 이익부터 챙긴다.
내가 본 바이체커는 진정한 정치가였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예는 반대당인 빌리 브란트가 수상이 되어서 이른바 '동방정책'이라는 것을 국회에 내놓았을 때였다.
야당인 바이체커가 속한 기독교민주동맹에서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것을 반대했다. 그런데 바이체커만이 민족문제를 먼저 생각해서 빌리 브란트를 지지했다. 그 일로 기민당은 바이체커를 협박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회유책을 썼지만, 그는 끝까지 빌리 브란트를 지지하여 동방정책이 인준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이 동방정책이 독일이 통일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하나, 그의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예가 동서독이 통일되었을 때였다. 같은 정당에 속하면서도 콜 수상과 의견이 달랐던 바이체커는 이런 주장을 했다.
"동서독이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동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동포로서 대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헌법도 동독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동독 사람들을 못한다고 무시하고, 급이 낮은 국민으로 대하면 안된다. 동독의 어려운 경제를 돕는 것도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말고, 서독민의 애국심, 동포애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바이체커는 정부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 어디까지나 국민 모두가 함께 나누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없이는 진정한 통일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치가가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적은 것은 수많은 일화중 한 예일 뿐이다. 그른 평소 소신대로 자신이나 자기 정당의 이해보다 민족의 이해를 먼저 생각한 정치가였다. 물론 독일에도 이런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 특히 이런 정치가가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바이체커를 특별하게 얘기하는 것은, 그의 이런 자세를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나와서 남북문제, 여야문제, 지역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정치가는 찾기 힘들고 정략가들만 많다. 민족의 장래와 다음 세대를 먼저 생각하는 정치가, 그리고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소속 정당의 정략을 거부하고 반대당과 협력할 수도 있는 정치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지난 2002년 2월2일, KBS1 텔레비전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큰 정치인 바이체커의 선택'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정치철학을 심도있게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그의 나이는 올해 여든두 살인데 아직 건강하니, 앞으로도 오래 살아서 우리나라의 통일이나 세계평화를 위해 큰 일을 해주기를 바란다.
바이체커에 대한 소개와 아울러 그의 부인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 바이체커가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 크리스찬 아카데미 초청으로 서울에 왔었는데 그의 부인이 아파서 예정보다 더 오래 우리 아카데미 하우스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그 부부와 우리 부부, 이렇게 넷이 저녁 식사를 한 일이 있다.
나의 아내가 식사 도중 바이체커 부인에게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고 물었다.
"중학생때 적성검사를 해보니까 가정일과 사회봉사가 적성이라고 나와서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가지 않았어요."
그 부인은 독일에서 남편 못지않게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내가 독일에 갈 때면 거의 예외없이 그 집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는데, 일정이 맞지 않으면 조반을 함께 하기도 한다. 아침에 그 집에 가면 부인은 벌써 봉사활동을 하러 나가고 바이체커가 직접 조반을 준비해서 우리 둘이 함께 먹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 부인은 대통령 관저에서 생활할 때도 손수 시장에 가 장을 보곤 하여 경호원들이 당황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나는 34년간 형식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그와 친구로 지내며 우정을 나누어온 점을 다시 한번 감사하게 생각한다.
미완성의 민주화
1980년 9월7일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나는 그 무렵 이명하로부터 김대중에 대한 사형 집행이 조만간 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정보까지 듣게 되었다. 우리 정치사에서 조봉암 사형만으로도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을 겪었는데, 또다시 그런 비극적이고 어리석은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아래 나는 NCC회장 자격으로 전두환대통령에게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말아달라는 호소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도 카톨릭 신자인 유학성 정보부장을 통해 김대중 구명운동을 벌이느라 애를 많이 썼으나 그 역시 별 신통한 반응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무렵 나는 정일형 박사를 문병하러 그의 집에 들렀다. 중병에 걸려 몸도 잘 가누지 못하고 누워있던 정박사는 나를 보더니 내 손목을 꼭 잡고 내 손등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간절히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대중이를 살려줘. 대중이를 살려줘."
그 말을 들으면서 나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구할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가슴만 아플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였다.케네스 포게슨이 갑자기 내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서 만났더니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김대중의 사형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요. 하지만 어떻게든 그런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미국도 애를 쓰고는 있습니다만 전대통령은 외국사람들 의견이나 외국압력 같은 데는 거부감이 강하니까 역시 내부에서 나서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한번 나서주시오."
"나도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애가 타는 사람입니다만 내가 무슨 힘이 있어 그를 살리겠습니까?"
"청와대의 허화평씨에게 들으니 당신이 국정자문위원 자리를 거절해서 전대통령이 당신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 자리를 수락하면서 조건부로 개인면담을 신청하고 전대통령을 설득해보면 어떻겠소?"
나는 포게슨을 만난 후 그가 한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면서 크나큰 고민에 빠졌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제의를 듣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해버렸다. 무엇보다 광주를 직접 방문하고 제네바에서 본 취재필름을 통해 그 비극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던가를 아는 내가 그런 일을 자행한 군부세력이 탈취한 정권에 협력한다는 사실 자체가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었다.
내 개인적 명예의 손익계산에서도 그것은 완전한 적자였다. 국내에서 쏟아질 비난은 물론, 전두환 정권에 대한 세계여론으로 보아 내가 국정자문위원이 된다면 WCC등 국제사회에서도 나에 대한 평가가 여지없이 실추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내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해도 김대중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시도해보고 노력해 보아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전두환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로 하고 김옥진 국정자문회의 사무총장을 만나 내 의사를 전달했다.
"국정자문위원이 되는 것이 나로서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만약 두가지 전제조건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제의를 수락하겠습니다. 우선 전대통령과 한시간동안 단독면담을 하고 싶고, 그리고 이 일을 신문에는 절대로 보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언론이야 우리 마음대로 하는 거니까 신문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는 건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 각하와 한시간 단독면담은 직접 여쭤봐야 하니까 좋다고 하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연락이 왔다.
"각하께서 두가지 다 좋다고 하십니다. 곧 청와대로 오셔야 할 겁니다."
이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나는 1980년 11월25일 오전, 청와대에 들어가 전대통령으로부터 국정자문위원 위촉장을 받았다. 공식적인 절차가 끝난 후 전대통령은 약속대로 "들어가서 차나 한잔하자"며 나를 자기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김대중 얘기를 꺼냈다. 그의 얼굴은 김대중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이미 굳어져 있었다.
"저는 김대중은 물론 그의 부인과도 수십년동안 알고 지내왔습니다. 그런 제가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씀드리는데, 그는 정치가로서 결점도 있지만 절대로 공산주의자는 아닙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전대통령은 화를 벌컥내며 말했다.
"내가 언제 김대중을 공산주의자라고 했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용공주의자이고 선동정치가예요."
"저 역시 선동정치가를 싫어합니다. 용공주의자도 싫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군 형법 어디에 선동주의자나 용공주의자는 사형시켜야 한다는 조문이 있습니까? 국제적 차원에서나 현정부를 위해서도 그를 죽이는 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는 광주사태로 전세계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데, 이제 김대중까지 죽인다면 그 들끓는 여론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새 정부의 첫 출발을 사형으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명분과 실리를 다 동원하여 전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의 얼굴이 처음보다는 많이 풀어져 있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취지는 잘 알겠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고려해서 내가 잘 알아서 할 테니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고 화제를 딴 데로 돌리지요."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말과 분위기로 보아 나는 '성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것처럼 내 어깨도 가벼워졌다.
청와대를 나온 나는 정박사를 찾아가 전대통령을 만난 얘기를 하고 그를 안심시켰다.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대중이 사형은 면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그 마른 나뭇가지 같은 노인은 너무 흥분해서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는 부인인 이태영 여사를 불러 "대중이가 살 수 있데"라고 말하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가 김대중 구명에 실제로 얼마만큼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전대통령은 1981년 1월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조봉암의 사형에 이어 우리 정치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뻔했던 비극적인 일이 미연에 방지됐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은 '보수'였다. 그러나 '합리적 보수'였다. 그 어떤 '진보'보다 민생과 인권과 평화와 환경을 중시했고, 무엇보다 '평화통일'을 최고의 지상가치로 삼았던 이 시대의 진정한 '보수'였다. 진보세력이 존경한 드문 보수였다. 가인 김병로 선생이래 거의 없는 예다.
그 분은 역대의 모든 권력과 만났고, 그들에게 쓴소리를 마다 안했다. 철권정치 시절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서 "김대중을 살려달라"고 했고, 취임한 지 얼마 안돼 "재신임" 운운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헌법에도 없는 그런 경박한 결정을 하다니 대단히 잘못됐다. 바르게 말하는 참모를 두라.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어떤이는 생전의 고인을 "이 시대의 현실적 원로"라고까지 칭송하기도 했다.
그 분은 독실한 목회자이자 민중의 혁명가였고 평화와 환경을 수호하는 시민운동가였고, 인터넷 혁명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새 시대의 도래를 예견했던 선각자이기도 했다. 그 분은 단순한 '원로'가 아니라 실로 이 땅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1917년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난 간고한 일제 강점기를 거쳐 삼엄한 철권통지 시절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은 사건과 만난 사람은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그 분은 자신이 떠날 때가 임박했음을 알았는지 3년전인 2003년 6월 5권의 자서전 <역사의 언덕에서>(한길사 간)를 펴내기도 했다. 그 분은 우리 현대사를 만든 핵심적인 사람들과 안팎으로 연계돼있고 역사의 진실을 증언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는 분이셨다. 자서전에 언급된 '이름 있는' 사람들을 따로 묶은 인명록만 70쪽이 넘을 정도로 그 분의 교우는 두텁고 광대했다.
그 분이 자서전을 쓴 것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해서였다. 자서전의 부제도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 체험'이었다.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민족숙원인 통일을 달성해 주기를 바라는 바람에서였다. 그 분은 "아직 뇌 세포가 건전하게 활동하는 동안" 자신이 겪은 모든 체험을 전하고 싶었다고 자서전을 쓴 이유를 밝히기도 하셨다.
"나는 독선적이고 폐쇄적으로 대립하는 역사속에서 양극을 넘어선 제3지대에 내가 설 자리를 마련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Between and Beyond)' 살고자 했던 나는 항상 양극 사이에서 좁고 험한 길을 걸어야 했다. 나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중간파, 때로는 회색분자 취급도 받았다.
그러나 어느 편은 '절대 선'이고 그 반대편은 '절대 악'이란 사고방식에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밝은 햇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이 세상에 완전한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의 현대사와 그 현대사에 연관된 사람들을 평가할 때도 나는 이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그 분이 자서전에서 밝힌 자신의 삶의 궤적이다.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유훈이기도 하다.
그 분의 큰 뜻, 큰 유훈을 알기 위해선 그 분이 남기신 말과 글들을 보는 게 첩경일 것이다. 여기에 그 분의 <자서전> 중에서 이야기 두토막을 전제하도록 한다. 하나는 5권에 나오는 폰 바이체커 전 독일대통령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4권에 나오는 김대중 구명 비사이다.
바이체커에게 배울 점
내가 바이체커를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모인 WCC 총회때였다. 이후 1975년까지 그와 나는 함께 WCC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년에 적어도 두번씩은 만났다. 1975년도에 그가 정치에 전력하기 위해 WCC를 그만 둘 때도 우리는 가급적 계속해서 만날 기회를 만들자고 약속했고, 그후 내가 유럽에 갈 때면 빠짐없이 만났다.
그는 한국에 왔을 때 나의 소개로 김대중을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대중이 정치탄압을 받고 있을 때 빌리 브란트 당수와 함께 석방을 위해 크게 노력하기도 했다.
정치인으로 그가 걸어온 행적을 지켜보아온 나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닌 민족지도자로서 그의 면모에 평소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21세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정치적 지도자를 갈망하는 우리 국민들과 특히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점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리하프트 폰 바이체커는 1920년 독일 귀족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뿐만 아니라 형과 동생도 정치활동을 펼쳤는데, 세 형태의 정치노선은 조금씩 다르다.
우선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그의 형 카를은 1957년 서둑 핵무장 반대운동을 했으며 '괴팅겐 선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 형은 사회민주당(SPD) 대통려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동생은 자유독일당(FDP)의 지도자, 그리고 리하르트는 기독교민주당동맹(CDU)에 속하며 10년동안 대통령을 지냈다.
바이체커는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과 역사학을 공부했고, 옥스퍼드 대학과 그로노블 대학에서도 공부했다. 1969년 연방의회 의원에 당선되기까지 그는 평신도로서 독일 개신교연합회의 의장, 개신도 신도연합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그 당시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중앙위원, 실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나와 가까이 지냈다.
정치계에 본격 진출하면서 연방의회 부의장, 베를린 시장을 거쳐 1984년 7월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이후 10년동안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독일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는 대통령 임기가 끝난 뒤에도 유럽공동체 형성에 노력을 기울였고, 유엔의 '미래를 연구하는 모임(IWG)' 공동의장을 지냈다. 그는 지금도 다방면으로 활동을 하며 한시도 사회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외국인 정치가인 바이체커를 특별히 지면을 할애하면서 소개하는 것은,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 그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독일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하기까지 지도자로서 그가 지켜오고 실천해온 정치철학과 행동에서 우리는 통일에 도움이 되는 뭔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바이체커는 1985년 5월8일 독일 패전 40주년이 되는 날, 정부와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모인 국회에서 '광야 40년'이라는 제목으로 기념연설을 했다. "오늘은 독일의 패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슬픈 날이지만, 우리 독일민족이 히틀러 정권에서 해방된 날이다"로 시작되는 이 연설은 20여개국에 번역됐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강연 내용 중에서 특히 나의 가슴을 두드린 구절이 있다.
"우리는 과거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고 그런 슬픈 역사는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덮어두게 되면 우리는 오늘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프더라도 과거의 쓰라린 역사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겨서 그것이 확실하게 기억되도록 합시다. 그러면 거기서 화해라는 것이 나옵니다. 과거 청산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 독일과 적대관계를 가졌던 나라들이 있는데, 이들 앞에서 우리는 잘못된 우리의 과거를 마음이 아프더라도 되새기고 청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와 화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의 뼈아픔은 절대로 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이체커는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히틀러 정권의 최초의 피해자가 폴란드였는데,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폴란드를 방문한 일이었다. 당연히 폴란드에서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대접받으려고 간 것이 아니라, 폴란드 국민에게 사과하러 간 것이었기에 폴란드 국민들의 태도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폴란드를 유럽공동체(EU)에 가입하도록 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독일 정치인 중 바이체커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당인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도 수상이 되자마자 폴란드의 유대인 묘지에 가서 무릎 꿇고 앉아 주먹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브란트나 바이체커의 행동은 결국 지금 독일이 유럽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전후 아시아에서 일본이 취해온 태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체커는 정치인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정치가(stateman)이고, 다른 하나는 정략가(politician)이다. 정치가는 민족과 다음 세대에 미칠 영향을 먼저 생각하지만, 정략가는 민족보다 자신의 정치적 이해와 소속정당의 이익부터 챙긴다.
내가 본 바이체커는 진정한 정치가였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예는 반대당인 빌리 브란트가 수상이 되어서 이른바 '동방정책'이라는 것을 국회에 내놓았을 때였다.
야당인 바이체커가 속한 기독교민주동맹에서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것을 반대했다. 그런데 바이체커만이 민족문제를 먼저 생각해서 빌리 브란트를 지지했다. 그 일로 기민당은 바이체커를 협박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회유책을 썼지만, 그는 끝까지 빌리 브란트를 지지하여 동방정책이 인준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이 동방정책이 독일이 통일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하나, 그의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예가 동서독이 통일되었을 때였다. 같은 정당에 속하면서도 콜 수상과 의견이 달랐던 바이체커는 이런 주장을 했다.
"동서독이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동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동포로서 대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헌법도 동독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동독 사람들을 못한다고 무시하고, 급이 낮은 국민으로 대하면 안된다. 동독의 어려운 경제를 돕는 것도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말고, 서독민의 애국심, 동포애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바이체커는 정부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 어디까지나 국민 모두가 함께 나누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없이는 진정한 통일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치가가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적은 것은 수많은 일화중 한 예일 뿐이다. 그른 평소 소신대로 자신이나 자기 정당의 이해보다 민족의 이해를 먼저 생각한 정치가였다. 물론 독일에도 이런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 특히 이런 정치가가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바이체커를 특별하게 얘기하는 것은, 그의 이런 자세를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나와서 남북문제, 여야문제, 지역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정치가는 찾기 힘들고 정략가들만 많다. 민족의 장래와 다음 세대를 먼저 생각하는 정치가, 그리고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소속 정당의 정략을 거부하고 반대당과 협력할 수도 있는 정치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지난 2002년 2월2일, KBS1 텔레비전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큰 정치인 바이체커의 선택'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정치철학을 심도있게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그의 나이는 올해 여든두 살인데 아직 건강하니, 앞으로도 오래 살아서 우리나라의 통일이나 세계평화를 위해 큰 일을 해주기를 바란다.
바이체커에 대한 소개와 아울러 그의 부인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 바이체커가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 크리스찬 아카데미 초청으로 서울에 왔었는데 그의 부인이 아파서 예정보다 더 오래 우리 아카데미 하우스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그 부부와 우리 부부, 이렇게 넷이 저녁 식사를 한 일이 있다.
나의 아내가 식사 도중 바이체커 부인에게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고 물었다.
"중학생때 적성검사를 해보니까 가정일과 사회봉사가 적성이라고 나와서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가지 않았어요."
그 부인은 독일에서 남편 못지않게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내가 독일에 갈 때면 거의 예외없이 그 집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는데, 일정이 맞지 않으면 조반을 함께 하기도 한다. 아침에 그 집에 가면 부인은 벌써 봉사활동을 하러 나가고 바이체커가 직접 조반을 준비해서 우리 둘이 함께 먹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 부인은 대통령 관저에서 생활할 때도 손수 시장에 가 장을 보곤 하여 경호원들이 당황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나는 34년간 형식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그와 친구로 지내며 우정을 나누어온 점을 다시 한번 감사하게 생각한다.
미완성의 민주화
1980년 9월7일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나는 그 무렵 이명하로부터 김대중에 대한 사형 집행이 조만간 있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정보까지 듣게 되었다. 우리 정치사에서 조봉암 사형만으로도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을 겪었는데, 또다시 그런 비극적이고 어리석은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아래 나는 NCC회장 자격으로 전두환대통령에게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말아달라는 호소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도 카톨릭 신자인 유학성 정보부장을 통해 김대중 구명운동을 벌이느라 애를 많이 썼으나 그 역시 별 신통한 반응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무렵 나는 정일형 박사를 문병하러 그의 집에 들렀다. 중병에 걸려 몸도 잘 가누지 못하고 누워있던 정박사는 나를 보더니 내 손목을 꼭 잡고 내 손등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간절히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대중이를 살려줘. 대중이를 살려줘."
그 말을 들으면서 나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구할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가슴만 아플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였다.케네스 포게슨이 갑자기 내게 만나자는 연락을 해서 만났더니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김대중의 사형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요. 하지만 어떻게든 그런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미국도 애를 쓰고는 있습니다만 전대통령은 외국사람들 의견이나 외국압력 같은 데는 거부감이 강하니까 역시 내부에서 나서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한번 나서주시오."
"나도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애가 타는 사람입니다만 내가 무슨 힘이 있어 그를 살리겠습니까?"
"청와대의 허화평씨에게 들으니 당신이 국정자문위원 자리를 거절해서 전대통령이 당신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 자리를 수락하면서 조건부로 개인면담을 신청하고 전대통령을 설득해보면 어떻겠소?"
나는 포게슨을 만난 후 그가 한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면서 크나큰 고민에 빠졌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제의를 듣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해버렸다. 무엇보다 광주를 직접 방문하고 제네바에서 본 취재필름을 통해 그 비극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던가를 아는 내가 그런 일을 자행한 군부세력이 탈취한 정권에 협력한다는 사실 자체가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었다.
내 개인적 명예의 손익계산에서도 그것은 완전한 적자였다. 국내에서 쏟아질 비난은 물론, 전두환 정권에 대한 세계여론으로 보아 내가 국정자문위원이 된다면 WCC등 국제사회에서도 나에 대한 평가가 여지없이 실추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내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해도 김대중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시도해보고 노력해 보아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전두환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로 하고 김옥진 국정자문회의 사무총장을 만나 내 의사를 전달했다.
"국정자문위원이 되는 것이 나로서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만약 두가지 전제조건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제의를 수락하겠습니다. 우선 전대통령과 한시간동안 단독면담을 하고 싶고, 그리고 이 일을 신문에는 절대로 보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언론이야 우리 마음대로 하는 거니까 신문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는 건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 각하와 한시간 단독면담은 직접 여쭤봐야 하니까 좋다고 하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연락이 왔다.
"각하께서 두가지 다 좋다고 하십니다. 곧 청와대로 오셔야 할 겁니다."
이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나는 1980년 11월25일 오전, 청와대에 들어가 전대통령으로부터 국정자문위원 위촉장을 받았다. 공식적인 절차가 끝난 후 전대통령은 약속대로 "들어가서 차나 한잔하자"며 나를 자기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김대중 얘기를 꺼냈다. 그의 얼굴은 김대중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이미 굳어져 있었다.
"저는 김대중은 물론 그의 부인과도 수십년동안 알고 지내왔습니다. 그런 제가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씀드리는데, 그는 정치가로서 결점도 있지만 절대로 공산주의자는 아닙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전대통령은 화를 벌컥내며 말했다.
"내가 언제 김대중을 공산주의자라고 했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용공주의자이고 선동정치가예요."
"저 역시 선동정치가를 싫어합니다. 용공주의자도 싫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군 형법 어디에 선동주의자나 용공주의자는 사형시켜야 한다는 조문이 있습니까? 국제적 차원에서나 현정부를 위해서도 그를 죽이는 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는 광주사태로 전세계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데, 이제 김대중까지 죽인다면 그 들끓는 여론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새 정부의 첫 출발을 사형으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명분과 실리를 다 동원하여 전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의 얼굴이 처음보다는 많이 풀어져 있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취지는 잘 알겠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고려해서 내가 잘 알아서 할 테니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고 화제를 딴 데로 돌리지요."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말과 분위기로 보아 나는 '성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것처럼 내 어깨도 가벼워졌다.
청와대를 나온 나는 정박사를 찾아가 전대통령을 만난 얘기를 하고 그를 안심시켰다.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대중이 사형은 면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그 마른 나뭇가지 같은 노인은 너무 흥분해서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는 부인인 이태영 여사를 불러 "대중이가 살 수 있데"라고 말하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가 김대중 구명에 실제로 얼마만큼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전대통령은 1981년 1월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조봉암의 사형에 이어 우리 정치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뻔했던 비극적인 일이 미연에 방지됐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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