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카메라만 떠나면 무차별 폭행 당해”
<인터뷰> 포항건설노조 김남근 조합원
“포항에서 집회를 하면 전국에서 내려온 경찰들이 아스팔트에 방패를 박박 가는 소리가 울린다. 그러다 충돌과정에서 흥분한 일부 조합원이 만장 막대기라도 뽑아들면 그날 방송에는 하루 종일 그 장면만 나온다.”
“한 두명이 막대기를 들면 5천명 전원이 쇠파이프로 무장한 폭도가 된다. 그리고 방송 카메라가 떠나면 우리는 저들의 방패에 무방비로 내몰린다. 덕분에 우리가 수없이 맞고 병원에 실려가고 목숨을 잃어도 우리는 폭도로 비쳐질 뿐이다.”
포항건설노동자들이 15일과 16일, 다시 상경투쟁에 나섰다. 투쟁이라기보다는 포항에서 벌어진 일들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선전전에 가까웠다. 그들은 많이 지쳐있었다.
15일 새벽 5시에 올라와 이틀째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는 그들의 투쟁은 이제 두 달을 넘어서고 있다. 그동안 2백80명이 다쳤고 63명이 구속됐고 2명이 사망했다. 더 이상 수용할 공간이 없다는 병원에서는 여전히 수십명의 노동자들이 신음하고 있고 한 노동자는 사경을 헤매고 있다.
어떤 생명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숨을 거두기도 했다. 30대 중반, 결혼 7년만에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는 시험관 시술을 몇 차례 거쳐 어렵게 가진 아이였다.
"7년간 몇 차례의 시험관 시술 끝에 얻은 아이가..."
아이의 엄마는 남편이 포스코 본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자 집에서 김밥을 만들어 현장에 나갔다가 경찰과의 마찰 과정에서 쓰러져 일주일 뒤 아이를 유산했다.
16일 오후 5시 30분 을지로 1가. 16일 오후 5시30분 을지로 1가. 김남근(37) 포항건설노조 배관분회 조합원은 포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같은 일들을 절박하게 호소했다.
“결혼하고 7년만에 그것도 시험관 아기 시술로 어렵사리 성공해서 가진 아이였다. 오죽 기뻤겠나. 그런데 경찰은 음식이라도 들여보내달라며 항의하는 부인을 확 잡아끌고 군화발로 밟아 안타까운 생명을 죽였다.”
김씨의 입에서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 나왔다. 그는 하중근 열사 외에도 목숨을 잃은 사람이 또 있다고 했다.
“50대 한 배관공은 포스코 본사 점거 중 시름시름 앓다가 나간 지 이틀만에 숨을 거뒀다. 그분은 경찰이 약의 투입만 허용했어도 죽지 않았을 분이다.”
지난 7월 16일과 8월 9일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피해사례도 언급했다. 특히 시민마저 경찰을 막고 나선 9일은 30초에 한번씩 응급차가 들어올 정도로 아비규환이었다고 그는 전했다.
실제 이날 포항 형산로 전국노동자대회에서는 노동자와 시민을 포함, 1백50명이 넘는 부상자가 속출했다.
"경찰은 안전모를 쓰지 않은 노동자들의 머리만을 노렸다"
“집회 당시 포항건설노조 조합원들은 안전모를 쓰지 않았다. 당일 안전모를 쓴 사람들은 포항이 아닌 타 지역에서 연대집회에 참석한 이들 뿐이다. 그런데 안전모가 없으니까 경찰들은 집중적으로 머리 쪽을 노려 방패를 휘둘렀다. 하중근씨의 죽음도 여기서 비롯됐다.”
“우리는 언론이 보도하는 것처럼 폭도가 아니다. 그렇다고 싸움을 잘하는 투사들도 아니다. 우리는 평범한 노동자다. 경찰과 물리적으로 맞서게 될 때는 겁이 덜컥 나고 가족이 생각나는 평범한 가장들이다. 우리가 왜 이렇게 다쳐 나가야 하나.”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큰 딸과 다섯 살배기 작은 딸을 둔 평범한 가장으로서 김씨의 말은 ‘상식’이었지만 지난 7월 1일 본격적인 파업 투쟁 이후 포항건설노조의 수많은 김씨들은 폭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고질적인 불법 다단계 하도급의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모서리’를 찾아 포스코 본사로 향했지만 일반 시민들은 그들이 왜 고용관계도 아닌 그 곳에 갔는지를 알지 못했다.
“15년간 일하면서 7개월 이상 일해본 적이 없다. 365일 일할 수 있다면 이렇게 데모 안한다. 거의 대부분 두 달 일하면 다른 일터를 찾거나 낮은 임금으로 다니던 회사와 재계약을 한다. 도대체 우리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임금은 줄어들고 노동 강도는 높아지고 있다. 주 8시간 근무, 토요유급휴가제, 이런 것들이 어떻게 무리한 요구일 수 있나.”
“사용자측은 언제든지 대체인력을 투입할 수 있다며 노동자들을 대거 해고시키고 전국에서 일할 만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언론에서 타결 운운했지만 사용자 측의 최종안은 기존의 임단협을 오히려 후퇴시킨 최악의 내용들이었다.”
"포항에서 너무 많이들 다쳤다. 목숨을 잃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30대 후반의 아직은 젊은 나이지만 그가 포스코 현장에서 배관공을 일한 것이 올해로 15년째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큰 딸과 다섯 살배기 작은 딸을 키우는 그는 요즘 집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아주 죽을 지경이다. 집에서는 돈이 없다고 난리인데 이렇게 일을 못하고 있으니...우리 건설노동자들에게 퇴직금이 있나, 전문교육을 받기를 하나, 4대 보험? 우리 같은 건설노동자들은 위험한 일 한다고 잘 안 받아준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다.”
5시 50분. 남대문 경찰서장과 경비과장이 연방 경고방송을 하더니 1천5백여명 가까운 경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송으로 미란다 원칙을 고시하고는 당장 연행에 나설 태세였다.
불가피하게 인터뷰를 중단하게 될 시점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빨리 해결되야 한다. 많은 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포항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교섭은 체결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을거다. 정말 회사가 폐업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포항에서 발생한 죽음에 대해 정부가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게 안되면 우리가 현장으로 돌아간다해도 마음이 편치 못할 거다. 반드시 해결되야 한다.”
“한 두명이 막대기를 들면 5천명 전원이 쇠파이프로 무장한 폭도가 된다. 그리고 방송 카메라가 떠나면 우리는 저들의 방패에 무방비로 내몰린다. 덕분에 우리가 수없이 맞고 병원에 실려가고 목숨을 잃어도 우리는 폭도로 비쳐질 뿐이다.”
포항건설노동자들이 15일과 16일, 다시 상경투쟁에 나섰다. 투쟁이라기보다는 포항에서 벌어진 일들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선전전에 가까웠다. 그들은 많이 지쳐있었다.
15일 새벽 5시에 올라와 이틀째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는 그들의 투쟁은 이제 두 달을 넘어서고 있다. 그동안 2백80명이 다쳤고 63명이 구속됐고 2명이 사망했다. 더 이상 수용할 공간이 없다는 병원에서는 여전히 수십명의 노동자들이 신음하고 있고 한 노동자는 사경을 헤매고 있다.
어떤 생명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숨을 거두기도 했다. 30대 중반, 결혼 7년만에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는 시험관 시술을 몇 차례 거쳐 어렵게 가진 아이였다.
"7년간 몇 차례의 시험관 시술 끝에 얻은 아이가..."
아이의 엄마는 남편이 포스코 본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자 집에서 김밥을 만들어 현장에 나갔다가 경찰과의 마찰 과정에서 쓰러져 일주일 뒤 아이를 유산했다.
16일 오후 5시 30분 을지로 1가. 16일 오후 5시30분 을지로 1가. 김남근(37) 포항건설노조 배관분회 조합원은 포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같은 일들을 절박하게 호소했다.
“결혼하고 7년만에 그것도 시험관 아기 시술로 어렵사리 성공해서 가진 아이였다. 오죽 기뻤겠나. 그런데 경찰은 음식이라도 들여보내달라며 항의하는 부인을 확 잡아끌고 군화발로 밟아 안타까운 생명을 죽였다.”
김씨의 입에서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 나왔다. 그는 하중근 열사 외에도 목숨을 잃은 사람이 또 있다고 했다.
“50대 한 배관공은 포스코 본사 점거 중 시름시름 앓다가 나간 지 이틀만에 숨을 거뒀다. 그분은 경찰이 약의 투입만 허용했어도 죽지 않았을 분이다.”
지난 7월 16일과 8월 9일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피해사례도 언급했다. 특히 시민마저 경찰을 막고 나선 9일은 30초에 한번씩 응급차가 들어올 정도로 아비규환이었다고 그는 전했다.
실제 이날 포항 형산로 전국노동자대회에서는 노동자와 시민을 포함, 1백50명이 넘는 부상자가 속출했다.
"경찰은 안전모를 쓰지 않은 노동자들의 머리만을 노렸다"
“집회 당시 포항건설노조 조합원들은 안전모를 쓰지 않았다. 당일 안전모를 쓴 사람들은 포항이 아닌 타 지역에서 연대집회에 참석한 이들 뿐이다. 그런데 안전모가 없으니까 경찰들은 집중적으로 머리 쪽을 노려 방패를 휘둘렀다. 하중근씨의 죽음도 여기서 비롯됐다.”
“우리는 언론이 보도하는 것처럼 폭도가 아니다. 그렇다고 싸움을 잘하는 투사들도 아니다. 우리는 평범한 노동자다. 경찰과 물리적으로 맞서게 될 때는 겁이 덜컥 나고 가족이 생각나는 평범한 가장들이다. 우리가 왜 이렇게 다쳐 나가야 하나.”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큰 딸과 다섯 살배기 작은 딸을 둔 평범한 가장으로서 김씨의 말은 ‘상식’이었지만 지난 7월 1일 본격적인 파업 투쟁 이후 포항건설노조의 수많은 김씨들은 폭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고질적인 불법 다단계 하도급의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모서리’를 찾아 포스코 본사로 향했지만 일반 시민들은 그들이 왜 고용관계도 아닌 그 곳에 갔는지를 알지 못했다.
“15년간 일하면서 7개월 이상 일해본 적이 없다. 365일 일할 수 있다면 이렇게 데모 안한다. 거의 대부분 두 달 일하면 다른 일터를 찾거나 낮은 임금으로 다니던 회사와 재계약을 한다. 도대체 우리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임금은 줄어들고 노동 강도는 높아지고 있다. 주 8시간 근무, 토요유급휴가제, 이런 것들이 어떻게 무리한 요구일 수 있나.”
“사용자측은 언제든지 대체인력을 투입할 수 있다며 노동자들을 대거 해고시키고 전국에서 일할 만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언론에서 타결 운운했지만 사용자 측의 최종안은 기존의 임단협을 오히려 후퇴시킨 최악의 내용들이었다.”
"포항에서 너무 많이들 다쳤다. 목숨을 잃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30대 후반의 아직은 젊은 나이지만 그가 포스코 현장에서 배관공을 일한 것이 올해로 15년째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큰 딸과 다섯 살배기 작은 딸을 키우는 그는 요즘 집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아주 죽을 지경이다. 집에서는 돈이 없다고 난리인데 이렇게 일을 못하고 있으니...우리 건설노동자들에게 퇴직금이 있나, 전문교육을 받기를 하나, 4대 보험? 우리 같은 건설노동자들은 위험한 일 한다고 잘 안 받아준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다.”
5시 50분. 남대문 경찰서장과 경비과장이 연방 경고방송을 하더니 1천5백여명 가까운 경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송으로 미란다 원칙을 고시하고는 당장 연행에 나설 태세였다.
불가피하게 인터뷰를 중단하게 될 시점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빨리 해결되야 한다. 많은 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포항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교섭은 체결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을거다. 정말 회사가 폐업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포항에서 발생한 죽음에 대해 정부가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게 안되면 우리가 현장으로 돌아간다해도 마음이 편치 못할 거다. 반드시 해결되야 한다.”
<저작권자ⓒ뷰스앤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