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 日王 "A급전범 야스쿠니 합사 불쾌해 참배 안해"
일왕의 신사 참배 압박해온 日극우들 '머쓱'
고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A급전범의 야스쿠니(靖國)신사 합사를 크게 못마땅해 했으며 합사후 참배중단을 결심했다는 기록이 발견돼, 일왕에게까지 신사 참배를 압박해온 일본 극우들을 머쓱하게 만들고 있다.
천황 메모로 고이즈미 등의 향후 야스쿠니 참배 여부 관심
일본의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입수해 20일 보도한 도미다 아사히코(富田朝彦) 당시 궁내청 장관(고인)의 1988년 4월28일치 메모에 따르면, 히로히토 일왕은 A급전범 합사에 강한 불쾌감을 표명한 후 "그래서 나는 그 이후 참배하지 않았다. 그게 내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고 히로히토 일왕은 A급전범이 합사된 1978년 이후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았다. 그는 2차대전후 A급전범 합사전까지 야스쿠니를 8번 참배했다. 마지막 참배는 1975년 11월이었다. 현 아키히토(明人) 일왕도 1989년 즉위 이래 한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히로히토 일왕의 참배중단 이유로는 그동안 ▲A급전범 합사 ▲미키(三木) 전 총리의 참배가 '공인자격인지, 사인자격인지'를 놓고 정치문제화됐기 때문이라는 두가지 분석이 제기돼 왔다.
이날자 메모 앞부분에는 일왕이 자신의 생일(4월29일)을 앞두고 한 기자회견에서 전쟁에 대한 생각을 질문받고 "가장 싫은 기억"이라고 말한 내용도 적혀있다.
도미다 전 장관은 히로히토 일왕과 주고받은 대화를 일기와 수첩에 꼼곰히 기록해 남겼다. 그는 궁내청 차장시절을 포함해 1975-1986년까지 일기 각 1권, 1986-1997년분 수첩 20여권을 남겼다.
도미다 전 장관과 생전 친교가 깊었던 작가 마루야(丸谷才一)씨는 "그는 독실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일상대화에서나 글에서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민다거나 과장 같은 건 절대로 못하는 사람이었다"면서 "그런 사람이 쓴 수첩인 만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이와 관련, 일왕의 야스쿠니참배 중단 이유가 문서로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 문건은 사료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보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가 공개한 야스쿠니 부분 메모 전문에는 "나는 어느 때 A급전범이 합사되고 게다가 마쓰오카(松岡), 시라토리(白取)까지... 쓰쿠바(筑波)는 신중히 대처해 달라고 말했다고 들었는데. 마쓰다이라는 평화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 참배하지 않았다. 그게 내 마음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 등 '극우' 머쓱
이같은 히로히토 일왕의 메모는 그동안 아키히토 현 일왕에 대해서까지 신사 참배를 압박해온 일본 극우들을 머쓱하게 만들고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 등 일본의 극우들은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황도 신사 참배를 해야 마땅하다"며 일왕의 신사참배를 압박해왔다. 그러나 이번 메모 발견으로 왜 고 히로히토 일왕은 물론, 현재의 아키히코 일왕까지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았는가가 밝혀짐에 따라 이들의 신사참배 정당화 논리는 크게 위축될 전망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원래 도쿄 초혼사(招魂社)였으나 1879년 현재의 야스쿠니신사로 개칭된 뒤 각종 침략전쟁을 주도한 일본 '국가신도'의 정신적 지주로서, "죽어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고 옛 일본군들이 약속하고 전장으로 달려갈 정도로 군국주의의 온상으로 꼽혀왔으며, 1978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A급 전범 14명이 비밀리에 합사되면서 한국, 중국의 거센 반발을 낳았다.
특히 야스쿠니신사의 합사자는 대부분 태평양전쟁 때 사망한 군인과 군속으로 2백50여만명에 달한다. 일본정부는 비밀 합사에 앞서 1954년에 은급법을 개정해 전범도 '공무사(公務死)'에 포함시켰고, 이어 은급법 대상인 전몰자를 '제신명표(祭神名票)'라는 명부에 게재해 야스쿠니신사로 보냈고, 그 과정에서 A급 전범은 1966년 '제신명표'에 게재돼 1978년 10월 후쿠다(福田) 내각 때 합사된 뒤 국제사회에서 비난의 표적이 돼왔다.
그동안 한국.중국 등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주변국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해온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참배의 정당성을 “개인의 자유”라고 꾸준히 강변해왔고 최근 중동 순방 당시에는 야스쿠니에서 열린 ‘미타마마츠리’에 제등을 봉납(捧納)해 주변국의 반발을 사왔다.
천황 메모로 고이즈미 등의 향후 야스쿠니 참배 여부 관심
일본의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입수해 20일 보도한 도미다 아사히코(富田朝彦) 당시 궁내청 장관(고인)의 1988년 4월28일치 메모에 따르면, 히로히토 일왕은 A급전범 합사에 강한 불쾌감을 표명한 후 "그래서 나는 그 이후 참배하지 않았다. 그게 내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고 히로히토 일왕은 A급전범이 합사된 1978년 이후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았다. 그는 2차대전후 A급전범 합사전까지 야스쿠니를 8번 참배했다. 마지막 참배는 1975년 11월이었다. 현 아키히토(明人) 일왕도 1989년 즉위 이래 한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히로히토 일왕의 참배중단 이유로는 그동안 ▲A급전범 합사 ▲미키(三木) 전 총리의 참배가 '공인자격인지, 사인자격인지'를 놓고 정치문제화됐기 때문이라는 두가지 분석이 제기돼 왔다.
이날자 메모 앞부분에는 일왕이 자신의 생일(4월29일)을 앞두고 한 기자회견에서 전쟁에 대한 생각을 질문받고 "가장 싫은 기억"이라고 말한 내용도 적혀있다.
도미다 전 장관은 히로히토 일왕과 주고받은 대화를 일기와 수첩에 꼼곰히 기록해 남겼다. 그는 궁내청 차장시절을 포함해 1975-1986년까지 일기 각 1권, 1986-1997년분 수첩 20여권을 남겼다.
도미다 전 장관과 생전 친교가 깊었던 작가 마루야(丸谷才一)씨는 "그는 독실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일상대화에서나 글에서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민다거나 과장 같은 건 절대로 못하는 사람이었다"면서 "그런 사람이 쓴 수첩인 만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이와 관련, 일왕의 야스쿠니참배 중단 이유가 문서로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 문건은 사료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보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가 공개한 야스쿠니 부분 메모 전문에는 "나는 어느 때 A급전범이 합사되고 게다가 마쓰오카(松岡), 시라토리(白取)까지... 쓰쿠바(筑波)는 신중히 대처해 달라고 말했다고 들었는데. 마쓰다이라는 평화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 참배하지 않았다. 그게 내 마음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 등 '극우' 머쓱
이같은 히로히토 일왕의 메모는 그동안 아키히토 현 일왕에 대해서까지 신사 참배를 압박해온 일본 극우들을 머쓱하게 만들고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 등 일본의 극우들은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황도 신사 참배를 해야 마땅하다"며 일왕의 신사참배를 압박해왔다. 그러나 이번 메모 발견으로 왜 고 히로히토 일왕은 물론, 현재의 아키히코 일왕까지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았는가가 밝혀짐에 따라 이들의 신사참배 정당화 논리는 크게 위축될 전망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원래 도쿄 초혼사(招魂社)였으나 1879년 현재의 야스쿠니신사로 개칭된 뒤 각종 침략전쟁을 주도한 일본 '국가신도'의 정신적 지주로서, "죽어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고 옛 일본군들이 약속하고 전장으로 달려갈 정도로 군국주의의 온상으로 꼽혀왔으며, 1978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A급 전범 14명이 비밀리에 합사되면서 한국, 중국의 거센 반발을 낳았다.
특히 야스쿠니신사의 합사자는 대부분 태평양전쟁 때 사망한 군인과 군속으로 2백50여만명에 달한다. 일본정부는 비밀 합사에 앞서 1954년에 은급법을 개정해 전범도 '공무사(公務死)'에 포함시켰고, 이어 은급법 대상인 전몰자를 '제신명표(祭神名票)'라는 명부에 게재해 야스쿠니신사로 보냈고, 그 과정에서 A급 전범은 1966년 '제신명표'에 게재돼 1978년 10월 후쿠다(福田) 내각 때 합사된 뒤 국제사회에서 비난의 표적이 돼왔다.
그동안 한국.중국 등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주변국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해온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참배의 정당성을 “개인의 자유”라고 꾸준히 강변해왔고 최근 중동 순방 당시에는 야스쿠니에서 열린 ‘미타마마츠리’에 제등을 봉납(捧納)해 주변국의 반발을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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