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펴본 <1997년 비망록>, 다섯 토막
[1997 비망록] 외환관리 실패, 구조조정 지연, 부도유예협약...
우리나라가 IMF구제금융을 신청한 1997년 12월 <관료망국론...>이란 졸저를 서둘러 쓴 적이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이던 재정경제원에 대한 비판서였다. 수치의 기록을 남겨놓기보다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1년후 먼지가 쌓인 책을 찾아 다시 펴보니 만감이 교차하며 가슴이 답답했다. 외환위기 관리 실패, 부실 기업-금융기관 정리 실패, 대주단협약의 원조인 부도유예협약, 기업의 중복과잉투자...요즘과 비슷한 사례들이 많이 발견되서다. 몇몇 기록을 다시 싣는다.
[비망록 1] 재경원 보도자료 "일본계 은행들이 자금회수 않기로 했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는 1997년 9월8일 <격진(激震) 아시아경제>라는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시리즈 첫회를 '동남아의 금융위기, 한국에도 비화'로 잡았다.
"9월3일, 우리나라 은행(일본계 은행)의 서울 지점장들이 재정경제원에 불려가 자금을 일본으로 회수해가지 않도록 요청받았다. 두달 전에 태국의 중앙은행이 변동환율제를 실시하기 직전에 우리나라 은행의 지점장들을 소집했던 것과 똑같은 광경이었다."
외국인 주식투자자금 이탈을 시작으로 외환위기가 본격 시작된 그해 9월초 재경원이 취한 대책은 일본계 은행 서울지점장들을 불러 자금회수 자체를 당부한 게 고작이었다. 재경원은 이들과 모임 직후 "일본계 은행들이 자금 회수를 하지 않기로 자체 결의했다"는 낯 뜨거운 보도자료를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계는 재경원의 호소를 묵살하고 계속 돈을 빼내갔다.
당시 한국에 적색경보를 보낸 곳은 <니혼게이자이>뿐만이 아니었다. 홍콩 페레그린그룹의 필립 토즈 회장은 그해 9월10일 방한해 행한 강연에서 "현재 한국경제는 분명한 경기침체 신호를 보내고 있으며, 소비, 투자, 지출 추이를 보면 향후 GDP 증가세는 상당히 저조한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단언컨대 후세의 사가들은 1997년을 한국경제 발전의 분수령이었다고 평가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강도높은 기업-은행 구조조정을 촉구했다. 세계은행(IBRD), 국제경제연구소(IIE)도 같은 시기 한국에 마찬가지 경고를 했다.
그러나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우리 경제의 펀더맨털은 굳건하며 경기저점을 이미 통과해 조만간 경기회복이 예상된다"고 일축했다. 지독한 위기 불감증이었다.
[비망록 2] 경제관료 "숫자를 숨긴 건 애국심 때문"
1997년 7월15일 기아사태 발생이후 우리나라 외환시장은 전무후무한 환율 폭등을 경험해야 했다. '과연 환율이 어디까지 오를 것인지'가 경제계의 최대 관심사였다. 환율 전망을 제대로 해야 당장의 수출입 결제는 물론, 다음해 투자 및 사업계획을 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해 9월 외환은행의 외환전문가는 향후 환율전망 리포트를 작성했다. 시뮬레이션 결과 도달한 결론은 "연말 환율이 달러당 1천원까지 폭등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이 언론에 유출돼 보도됐다.
그러자 그 무렵 환율 상승을 막기 위해 연일 한국은행이 보유중이던 얼마 남지 않은 달러화를 시장에 무차별적으로 쏟아부으며 안간힘을 쓰던 재경원이 발칵 뒤집혔다. 재경원 책임자는 즉각 문제 리포트를 작성한 외환전문가에 전화를 걸어 호통을 쳤다. "나라를 망칠 일이 있냐"
외환은행은 홍보실을 통해 언론에 뿌려진 문제 리포트를 회수하느라 난리법석을 치러야 했고, 문제의 외환 전문가에겐 언론 등이 환율 전망 질의를 해와도 입을 다물라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결국 환율은 정부의 온갖 개입에도 그해 11월초 마침내 1천원에 도달했고, 여러 기관 예측 가운데 외환은행 전망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입증됐다.
그러나 IMF사태 발발한 후에도 재경원은 자신들의 은폐가 "애국심에 따른 것이었다"며 끝내 반성하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외환보유고 조작'에 따른 재경원 문책론이 한창일 때 재경원 금융정책실의 한 관료는 방송과 인터뷰에서 "도대체 우리가 잘못한 게 뭐냐"고 항변할 정도였다. 그는 '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외환보유고가 거의 바닥이 났다는 사실을 숨겼느냐'는 질문에 "진실을 알리면 외국돈이 더 빨리 빠져 나갔을 것 아니냐"고 반문한 뒤, "애국적 차원에서 진상을 알리지 않은 것"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 등 외국 유수언론은 이미 그해 9월부터 "현재 한국이 환율 방어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외환보유고는 한국정부 발표와 달리 200억달러도 채 안되며, 연말이 되면 그나마 바닥이 날 것"이라는 기사를 잇따라 내보냈었다. 재경원은 자기 혼자 똑똑한 줄 아는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비망록 3] 대주단 협약의 원조 '부도유예협약'
1997년말 IMF구제금융 신청직후 한국은행 고위임원의 증언.
"한국은행 자금부는 한보 부도에 이어 삼미, 한신공영 등의 부도가 잇따르면서 종금사 부실이 심화되자, 5월께 종금사를 조기에 정리해야만 더이상의 대기업 연쇄도산을 막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경식 한은 총재도 공감했다.
한은은 이에 재경원과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수차례 종금사 정리대책을 세우라고 제언했으나 강경식 경제부총리에게 복종하던 김인호 경제수석의 거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1994년과 1996년 지방 투신사들을 종금사로 전환시켜 주었던 재경원 금융정책실은 한은의 경고를 철저히 무시했다. 대신 금정실이 생각해낸 게 '부도유예협약'이었다.
강경식 부총리는 재임기간 내내 '부도유예협약은 은행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진실은 그렇지 않다. 부도유예협약은 재경원 창작품이다. 재경원 금정실의 모 과장이 아이디어를 냈으며, 이 협약을 발표하기 직전 강경식 부총리와 이수휴 은행감독원장, 이동호 은행연합회장 등이 모였을 때 강 부총리가 이 협약안을 직접 전달해 이동호 은행연합회장이 발표토록 했다.
편법적으로 대기업의 부도를 연장해 준 부도유예협약으로 인해 기아 사태 등이 장기화하면서 우리나라 대외신인도는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었다."
"재경원은 기아사태 발발 직후인 8월초 국제신용평가기관 S&P가 제일은행 등 국내 금융기관 신용등급을 낮추려 하자, S&P에 편지를 써 제발 시간을 달라고 간청했다. S&P는 이에 한달간 재경원에 시간을 줬다. 그러나 재경원이 기아사태를 풀지 못하고 시간만 질질 끌고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도 재경원 눈치만 보는 등 우리나라 정부와 금융기관의 '위기관리 능력'이 전무하다는 판단이 서자 가차없이 국내 모든 금융기관과 국가의 신용등급을 깎아내렸다."
[비망록 4] 부실상호금고 하나 정리할 수 없었던 이유
우리나라는 정치권의 개입 때문에 하다못해 그 흔한 부실 상호신용금고 하나도 마음대로 정리하지 못한 희안한 나라다. 1997년말 현재 전국에 230여개의 상호신용금고가 있다. 총 자산규모는 35조원. 그런데 각 지역 상권 및 기업의 주요자금줄인 이 상호신용금고들 가운데 상당수가 개인오너들의 전횡적 자금운용으로 존립이 위태로울만큼 크게 부실화돼 있다. 하지만 지난 수십년간 정부는 부실 상호신용금고 하나 제대로 강제 폐쇄시키지 못했다. 정치권의 개입 때문이었다.
상호신용금고의 사장은 대부분 지역에서 내로라 하는 '지역유지'들이다. 이들은 지역 국회의원의 후원회를 비롯해, 관공서 후원 활동에 적극적이다. 상당수는 역대 집권당의 재정 후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부실 금고를 정리하려고 해도 정치권 등을 통해 들어오는 압력이 워낙 거세 번번이 실패했다.
재경원의 모 국장의 경우 부산의 한 부실 상호신용금고에 대한 지원을 끊고 정리하려다가 "가족들에게 보복을 하겠다"는 극단적인 협박을 받기까지 했다. 문제 금고의 오너는 당시 부산지역 정치권 실세들과 두터운 연을 맺고 있었을뿐 아니라, 지하 주먹세계에도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었던만큼 무시할 수 없는 협박이었다. 그후 이 국장은 한동안 근무시간 중에 집에 전화를 걸어 가족의 안부를 묻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정치금융'이 정부 정책을 왜곡시킨 대표적 사례다.
[비망록 5] "미 투(Me too)주의가 경제를 망쳤다"
1997년초 한보 부도후 청와대 경제수석실 고위관계자 증언. 그는 당시 대기업 연쇄도산의 주범인 '과잉중복투자'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우리나라 10대 재벌이하의 공통점은 '5대 재벌 흉내내기'에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외없이 모두가 지난 1970년대초 조선소도 없이 해외에서 선박수주 계약서 한 통을 들고와 울산 백사장 한켠에 조선소를 세우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수십만톤급 유조선을 건조했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백사장 신화'를 자신도 재현하고 싶어한다.
실제로 정태수 한보 회장의 경우 아파트 건설에서 크게 한몫을 챙기자 곧바로 5대 재벌 진입을 목표로 외형 키우기에 들어갔다. '제2의 정주영', '제2의 박태준'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정태수는 이를 위해 정치실세들과 줄을 대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이렇게 맺은 정치실세들과의 친분을 무기로 은행장들을 닦달해 끌어낸 빚으로 제철소를 짓고 닥치는대로 계열사를 늘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정태수 회장의 놀라운 수완으로 한보는 욱일승천, 10대 재벌군까지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냉엄한 현실은 개발연대에나 가능했던 백사장 신화의 재현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았고, 한보는 끝내 좌초하고 말았다.
이처럼 정태수 회장은 자신만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하기보다는 자신보다 앞서 5대 재벌을 흉내내기에 급급하다가 좌초했으며, 한보와 비슷한 길을 걸어온 나머지 후발 재벌들 또한 무더기 좌초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미 투(Me too) 주의가 패인인 셈이다. '정태수는 실패한 박태준'이라는 세간의 풍자도 이래서 나오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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