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향수' 부활의 메시지는?
<뷰스칼럼> '이헌재 시대'는 끝났으나 그 메시지를 읽어야
왜 지금 '이헌재'가 다시 거론되나. 1차적으론, 강만수 경제팀 갖고는 현 위기를 돌파 못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론 '이헌재'란 이름이 '위기의 10년전' 워낙 강하게 각인됐기 때문이다.
이헌재는 관료로서는 불운했다. 70년대말 김용환 재무장관 시절엔 '차관급 과장'이라 불릴 정도로 잘 나갔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김용환 라인'으로 찍혀 이한구 현 한나라당 의원, 김중웅 전 현대증권 회장과 함께 옷을 벗어야 했다. 그로부터 IMF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그는 신용평가회사 등을 전전하며 장장 17년간 잊혀진 야인생활을 해야 했다.
1987년 대선때도 줄을 잘못 섰다. 그러던 그가 DJ정권이 출범하면서 구조조정을 총괄할 금감위원장으로 발탁돼 주위를 놀라게 했다. 주위의 추천을 과감히 수용한 DJ의 '통큰 결단'이었다. 이 과정에 이헌재 자신도 특유의 '정무감각'으로 DJ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DJ 대통령당선후 어렵게 줄을 잡아 하나의 보고서를 DJ 책상위에 놓는 데 성공했다. IMF사태로 향후 어떤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보고서였다. 여기서 그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어떤 위기가 순차적으로 도래할 것인가란 전망외에, 그런 위기에 정치적-사회적으로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를 기술했다. 즉 대량실업이 발생, 사회적 불안이 높아질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등, 정치인 DJ의 깊은 고뇌에 부응하는 '정무적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헌재는 그후 금융, 기업 구조조정 등 험한 일을 도맡아 처리해나갔다. 무리한 것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 상대적으로 잡음은 적었다. '이헌재'의 집요한 언론플레이 때문이었다. 그는 그 바쁜 일상속에서도 일주일에 절반은 밤마다 언론과 만났다. 정권이 추진중인 구조조정의 당위성과 어려움을 토로하고 협조를 구했다. 언론의 비판에 대해선 오프더레코드를 걸면서 실상을 소상히 밝혔다. 어떤 대기업이 정치인 누구를 통해 어떻게 저항하고 있고 등등.
그는 "오늘은 폭탄주 다섯잔만 마시고 갈께. 내일 아침 일찍 대통령께 보고해야 하는데 술냄새를 풍겨선 안되잖아"라고 했다가도 언론과 격론이 붙으면 자정 넘을 때까지 폭탄주를 돌리며 설득하고 언쟁을 벌였다. 집요할 정도로, 그는 언론을 통한 국민과 소통을 중시했고 이를 바탕으로 뚝심있게 일을 밀어붙였다.
'이헌재'는 이 과정에 '천재' 소리도 들었다. 사실상 당시 언론은 무지했다. 경제부기자들조차 태어나 처음 듣는 용어투성이였다. 부실자산을 떼어내 배드뱅크를 만들고 우량자산은 어떻게 매각하고 등등. 그러나 신용평가회사 등에 재직하며 시장을 알고 기업을 알았던 그는 자신의 방대한 지식으로 언론을 압도했다. 콧대 높은 언론들이 끽 소리 못할 밖에.
'이헌재'는 이 과정에 금융계에 세칭 '이헌재 사단'이라 불리는 방대한 라인을 구축, 일을 밑어부쳤다. 욕도 많이 먹었고 실제로 그럴만 했다. 하지만 '이헌재 사단'은 이헌재가 일을 밀어붙이는 데 일사분란한 전위 역할을 했다. KS 출신을 근간으로 하는 '이헌재 사단'은 DJ정권의 눈총도 받았다. 금감위원장은 이헌재가 맡았으나, 부위원장은 DJ정권 실세가 앉았다. "이헌재는 재임기간중 DJ와 독대를 하지 못했다"는 얘기까지 나돌 정도로 그는 견제속에 일을 했다. 그래도 그가 물러날 때, 언론과 세간으로부터 "위기때 정말 애썼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헌재'는 노무현 정권때도 위기해결사로 기용됐다. 하지만 나설 때가 아니었고 실제로 재임기간중 별로 특별한 인상도 남기지 못하고, 부동산투기 논란끝에 낙마했다. '이헌재의 황금시대'는 이미 끝났던 것이다.
지금, 다시 '이헌재' 세 글자가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이헌재 향수'가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헌재 시대'는 분명 끝났다. 그럼에도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괴롭히는 형국이다. 세간의 '이헌재 향수'는 현 경제팀 교체 요구의 또다른 표현이다.
지금 시장은 붕괴됐다. 정상적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시장에선 돈이 안돌고, 기업은 벼랑끝에 몰리고 있다. 자칫 잘못하다간 멀쩡한 금융사, 기업들이 줄줄이 떼도산할 국면이다. 쓰러질 곳은 쓰러져야 한다. 하지만 멀쩡한 금융사, 기업들까지 쓰러졌다가 정말 큰일 난다.
시장이 붕괴됐을 때, 비로소 정부의 존재가치가 있는 법이다. 시장이 정상으로 돌아갈 땐 정부가 굳이 할 일이 없다. 그러나 시장이 마비되고 붕괴되면 정부가 시스템 붕괴를 막고 정상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고, 이것이 정부의 존재가치다.
정부의 리더십은 공포와 불신에 사로잡힌 시장이 자발적으로 "정부 말을 믿고 따를만하다"고 했을 때만 확립된다. 리더십이란 정부가 아무리 "내 말을 믿고 따르라"고 절규한다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지금 시장은 정부를 불신하고 있다. 이래서 개각이 시급하다는 거다. 그것도 시장이 절대신뢰할만한 새 경제팀이 필요하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은 더욱더 망가져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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