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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폐증'으로 죽어가는 5만명의 막장인생들

<현장> 정부의 산재법 개정에 산재 노동자들 격노

해방이후 한국산업화의 첨병역할을 했던 광산노동자들이 울고 있다.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후 대부분의 광업소가 문을 닫았지만 그곳에서 길게는 30년가량 일해왔던 노동자들은 달리 치료방법이 없다는 ‘진폐증’으로 죽어가고 있다.

자신 또한 태백지역의 탄광에서 수십 년을 일한 대가로 진폐증을 얻은 주응환 한국재가진폐재해자협회 회장은 4일 민주노총이 주관한 ‘산재노동자 증언대회’에서 “3만여명의 재가 진폐노동자들이 입원요양은커녕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해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주 회장은 “우리가 왜 진폐환자가 되었나. 지난 날 급격한 경제성장을 위해 지하막장 속에서 오로지 증산과 이윤극대화를 위해 내몰린 것”이라며 “지금도 4~5만에 이르는 퇴직 탄광노동자들에게서 속속 진폐증이 나타나고 있는데도 정부는 재정악화를 이유로 산재보험의 혜택마저 줄이려는 것이냐”고 정부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부와 진폐재해자협회에 따르면 현재까지 파악된 진폐노동자는 6만1천여명에 달하고 이 중 목숨을 잃은 노동자가 8천명을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현행 산재보험법에 의해 정부의 지원을 받는 노동자는 3천여명으로 전체 진폐 노동자의 5%에 불과하다.

5만 진폐노동자, 까다로운 산재판정 기준에 고통 가중

나머지 진폐 노동자들은 산재보험법의 까다로운 심사조건에 의해 이른바 ‘재가 진폐노동자’로 모든 치료비를 자부담하거나 아예 치료에서 배제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

정부가 1985년부터 ‘진폐의 예방과 진폐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활동성폐결핵, 흉막염, 기관지염, 기관지확장증, 기흉, 폐기종, 폐성심, 원발성폐암’ 등의 8개의 합병증에 이환될 경우에만 진폐전문요양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이들에 대해서만 보험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주응환 한국재가진폐재해자협회 회장.ⓒ최병성


때문에 나머지 진폐노동자들은 진폐증으로 인해 순간 순간 숨쉬기조차 힘든 상황이 엄습해도, 이로 인해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어려워도 다른 질병을 얻어 병세가 악화되지 않으면 정부의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다.

주응환 회장은 “먼지가 폐에 붙어 숨쉬기조차 힘든 진폐환자들이 고통 속에서 자살하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는데 정부는 단 한번의 실태조사도 하지 않은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정부가 나서서 정책적인 방안을 강구하고 수만의 진폐노동자들이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달라”고 호소했다.

사상 최악의 산재 ‘원진레이온’, 현재진행형인 노동자들의 죽음

지난 1991년 이황화탄소에 중독돼 사망한 한 노동자의 죽음을 계기로 알려진 ‘원진레이온 사태’. 당시까지 노동현장의 안정성 문제와 노동자의 건강권에 대한 논의가 미약하던 시기에 터진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대표적인 ‘산업재해’로 회자되어왔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났지만 당시 원진레이온에서 이황화탄소에 중독된 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의 악몽은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들어서만 오랜 투병 끝에 자살하거나 돌연사한 노동자만 6명이었다.

2만명 원진노동자 중 이황화탄소에 중독된 노동자는 1천여명에 달하고 이 중 병세악화로 사망한 노동자는 91명이다. 대부분 병명을 알지 못한 채 돌연사하거나 유독 높은 암과 뇌출혈의 발병으로 사망한 이들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황화탄소 중독과 타 질병의 상관관계를 입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유일한 지원방안인 산재보험의 혜택마저 주지 않고 있다.

증언자로 나선 한창길 원진산업재해자협회 위원장은 “원진 노동자는 이황화중독의 영향으로 뇌 심혈 관계 질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있고 최근 들어 암 발병률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며 “하지만 정부는 원인은 외면한 채 암은 산재가 안된다는 규정만을 내세워 이들을 방치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한 위원장은 “올해 들어서만 멀쩡히 산보하다 뇌출혈로 죽고, 집에서 쓰러져 후송 도중에 죽고 추석때만 정부에서 선물 하나 놓고 가는 중증환자들은 목을 매 숨지고 있다”며 “이대로 죽을 날만 기다리며 폐기처리될 바에야 차라리 정부의 산재 개악에 맞서 싸우다 죽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창길 원진산업재해자협회 위원장.ⓒ최병성


산재관련법 개정 둘러싼 노동계-정부 갈등 격화

최근 들어 산재보험법 및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둘러싼 노동계와 정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산재관련법 개정 방향에 대한 노동계와 정부의 입장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는 90년대 후반부터 청구성심병원,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자들의 산재 승인 투쟁을 거치며 ▲모든 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 ▲선치효 후정산 ▲원직을 우선한 재활시스템 구축 ▲요양 및 생계 보장성 강화 등 산재 노동자들의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는 방향으로 법개정을 촉구해왔다.

노동계는 특히 기존의 ‘치료’ 위주의 산재보험 시스템을 ‘치료-요양-재활-원직’으로 이어지는 종합적인 산재노동자 보호시스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노동부가 2년간에 걸쳐 산하 ‘산재보험발전위원회’를 통해 내놓은 산재보험 제도 용역연구 결과 보고서는 ‘산재보험의 재정악화를 산재 노동자에 대한 수급권과 지급율을 낮춤으로써 정상화하는 방안’이었다.

노동부에 따르면 보험급여는 최근 4년 사이 장기요양환자의 지속적인 증가, 연금수급자의 누적증가, 산재질환의 증가로 인해 연 평균 18.4%까지 증가한 반면 보험료 수입증가율은 같은 기간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8.7% 증가에 그쳤다.

이에 따라 노동부는 매년 악화되는 산재보험의 재정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산재 요양환자에 대한 휴업급여 지급을 2년으로 제한하고 이후 지급되는 장해연금의 수급율도 55세를 기준으로 50% 수준으로 낮추는 개정안을 내놓았다.

노동부의 개정안대로 휴업급여 지급이 2년으로 제한되면 장기치료자의 경우 기존의 요양 및 치료 강제종결 조치와 다를 바 없는 치료 중단으로 이어지고 노동자는 대폭 낮춰진 장해연금의 수혜자가 되야한다.

또한 노동부는 개별실적요율제를 기존의 30인 이상의 사업장에서 20인 또는 10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해 보험수급율 확대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산재가 발생하는 빈도에 따라 보험료율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이 제도는 산재 발생이 높은 소규모 영세 사업장의 산재은폐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노동부가 추진 중인 산재개정안이 산재노동자에 대한 혜택을 줄이는 대신 잉여분을 산재보험 재정안정화에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면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4일 오전 민주노총 1층 회의실에서 열린 '산재보험법 및 산업안전보건법 개악 저지와 노동자건강권 확보를 위한 증언대회'.ⓒ최병성


민주노총 “산재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몰 셈인가”

이날 증언대회에서 김지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이 땅에서 하루에 7명씩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숱한 노동자들의 산재의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정부는 44년만에 이뤄지는 개정을 일방적 개악으로 몰고가고 있다”고 맹성토했다.

김신범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도 “우리 사회 산재환자의 절반 이상이 50세 이상이고 이들 고령노동자에게 들어가는 산재비용이 재정악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면서도 “노후보장이나 사회안전망이 미흡한 이 사회에서 보험료를 낮춘다는 것은 환자들을 벼랑으로 몰아넣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하여, 산재발생 빈도와 정도에 따라 기업이 부담하는 산재보험금의 부담률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산재 개별실적요율 적용 사업장은 30인 이상으로 제한되어 있으나, 개정안은 적용사업장의 범위를 20인 또는 10인으로 확대하도록 하고 있다.

임형준 산업의학 전문의는 “정부 개정안은 산재기금 재정악화를 내세워 산재노동자에 대한 재활 및 보상과 같은 실질적 혜택을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산재보상을 줄이는 방향에 치중해 본말이 전도됐다”며 “산재노동자에 대한 실제적 보상이 가능하도록 오히려 기업 부담금 강화, 정부 지원금 신설의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노동부와 노사정위원회는 2월 연구용역 보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오는 9월 입법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은 이날 증언대회와 5일 오후 2시 국회 앞 ‘산재법.산안법 개악저지와 노동권 확보 결의대회’를 시작으로 정부의 산재보험법 개악안 입법저지 투쟁에 나설 예정이다.
최병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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