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부양하고 있는 비현실적 몸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이 얼굴 없는 자화상은 단지 자신의 하반신만을 보여준다. 그것도 바닥에서 약간 떠있다. 공중부양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몸이다. 우리 육체는 중력의 법칙에 완강히 저당잡혀 있다. 바닥, 대지에 붙어있다. 그로부터 벗어나있다는 것은 현실로부터 추방되거나 박탈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래서 다들 악착같이 그 현실에 발붙이고 살고자 한다.
대학 시절 나는 들국화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당시 암울했던 상황, 정치적이든, 내면적이든 하여간 온통 가라앉았던 순간에 들국화의 노래는 위안이자 추억이다.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봐 .혼자 이렇게 먼 길을 걸었나봐...” 문득 황혜선의 이 작품을 보면서 맴도는 가사다.
작품 속 그녀의 몸은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익숙지 않은 지상의 삶에서 방조자처럼, 타자처럼 혹은 도저히 길들여지지 않는 일상의 속악한 삶에서 떠나있는 자신의 상황을 그려보이는 듯하다. 삶은 지루하게 반복되고 매일 같이 유지되지만 누구에게나 그 삶은 낯설고 힘들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만은 그렇다.
삶은 하루하루가 고비고 극단이다. 어떻게 이 삶이 익숙해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삶을 아무렇지 않은 듯, 익숙하게, 즐겁게 살아가는 것도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황혜선은 주변 지인들이 자신에게 한 얘기를 들었다. “너는 어딘지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고, 약간 현실로부터 붕 떠 있는 것 같다고...”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작업에 몰두하다보면, 예술이라는 영역에 몸담고 있다 보면 이 속악한 현실의 이해관계와 치열한 경쟁구조로부터 비껴나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예술가들은 삶과 현실을 일종의 풍경처럼 보는 이들이다. 그것은 나의 것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딘지 이질감이 나고 낯설고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그 어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살아야한다는 사실 때문에 매번 상처받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늘상 삶의 ‘엣지’에서 견디는 법을 보여주었다. 삶의 중심이 아니라 그 주변, 모서리에서 버티는 것이다.
커다란 유리판에 에칭 선으로 작가 자신의 하반신을 그려 넣은 황혜선의 작품은 자신에 대한 관조적 성격이 짙다. 치마를 입은 채 직립하고 있는 자신의 하반신인데 여기서 구두는 바닥으로부터 약 10cm 정도 떠있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발이 떨어져 있는 존재를 표현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람들은 늘상 자신에게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고, 현실감이 없다고들 한단다. 해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봐, 현실감이 없나봐” 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인정해본다. 자신이 현실감이 부재란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미지화 한 이 작품은 투명한 유리 플레이트에 그려진, 새겨진 저부조의 회화/부조다. 회화와 조각 그 사이,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은 사실 이 작가의 주된 경향이다. 이미지는 공간, 화면의 피부에 어렴풋하게 환생해서 보는 이들의 눈을 조심스레 유인한다.
얼굴의 부재는 남겨진 몸을 통해 무엇인가를 상상하게 한다. 가늘고 얇고 깨지기 쉬운 예민한 선으로 이루어진 몸체는 덧없고 희박하다. 삶은 그렇게 유리처럼 깨지기 쉽다. 한순간에 박살이 나고 모든 것은 흩어져버린다. 그 위에 생이 얹혀져있다. 목숨들이, 육체가 올라와 있다. 가는 선 위로 몸은 떠있다. 위태로운 삶에서 한 개인의 생애는 그렇게 부유한다.
돌이켜보면 그간의 모든 작업들이 이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사적 공간의 기억, 그 목록과 흔적과 마음에 남겨진 고인 것들에 대한 회상, 기억에 다름 아니었다. 작가가 즐겨 다루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작고 하찮고 소소한 사연들은 그러나 한 인간의 삶과 인생, 예술에 대해 커다란 부피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라는 점이다. 그 이야기의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매체나 재료를 찾아서 사용하는 것이 작업이 되고 있으며 동시에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융기한 감정의 문제들이 결국 작업이 된다.
우리는 매 순간 감정과 생각의 실타래를 풀면서 살아가는데 작가는 그것들이 자기 내부에 모이고 고여 어떤 형체로 부감될 때 비로소 이를 외화 시킨다. 그 작품들은 작가의 마음속에서 오래 머물다 나온 형상들이다. 마음 안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의 몸을 얻어 나온 것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작가 자신의 이야기, 감정이 묻어 있는 이미지들이다.
오늘날 미술이 개인이 세계에 반응하는 현재진행형의 심리적 계기가 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심리적 계기를 드라마 없이 정확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작품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저 보는 사람에게 속삭임처럼 다가가는 것을 원한다.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가진 작품의 힘, 말하지 않는 힘을 표현하고자 한다. 침묵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작품 말이다.
황혜선의 작업에는 공통적으로 아련하고 조심스레 드러나는 이미지들, 명확함과 거대한 스케일이 아닌 작고 흐릿하고 적조한 것들, 손상되기 쉬운 재료들, 투명하고 가볍고 반짝이며 침묵과 적조함으로 절여진 것들이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고 이미지이면서 문장이고 보는 것이자 동시에 의식하는 것, 생각이자 물질이며 매우 사적이면서 보편적이다. 망막에 최소한으로 호소하고 정신과 마음을 최대한으로 흡인해내는 그런 작업이다. 그리고 이는 이 작가의 성정과 인성에 연유한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행복과 불행에 대해, 이 세상의 가치와 믿음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 등을 대면하면서 이를 작업이란 수행으로 치러낸다. 머릿속에서 자신의 삶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하려 노력하지만 순간 우리들이 지닌 궁핍한 언어는 곧 메말라 버린다. 미술 역시 궁핍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녀는 그 궁핍함과 허약함을 껴안고 그것으로 자기 생의 단상을 조심스레 보여준다. 현실에서 약간 발이 떠있듯 살아가면서 삶의 어떤 디테일한 부분들을 더 섬세하게 살피고 있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대학 시절 나는 들국화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당시 암울했던 상황, 정치적이든, 내면적이든 하여간 온통 가라앉았던 순간에 들국화의 노래는 위안이자 추억이다.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봐 .혼자 이렇게 먼 길을 걸었나봐...” 문득 황혜선의 이 작품을 보면서 맴도는 가사다.
작품 속 그녀의 몸은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익숙지 않은 지상의 삶에서 방조자처럼, 타자처럼 혹은 도저히 길들여지지 않는 일상의 속악한 삶에서 떠나있는 자신의 상황을 그려보이는 듯하다. 삶은 지루하게 반복되고 매일 같이 유지되지만 누구에게나 그 삶은 낯설고 힘들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만은 그렇다.
삶은 하루하루가 고비고 극단이다. 어떻게 이 삶이 익숙해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삶을 아무렇지 않은 듯, 익숙하게, 즐겁게 살아가는 것도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황혜선은 주변 지인들이 자신에게 한 얘기를 들었다. “너는 어딘지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고, 약간 현실로부터 붕 떠 있는 것 같다고...”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작업에 몰두하다보면, 예술이라는 영역에 몸담고 있다 보면 이 속악한 현실의 이해관계와 치열한 경쟁구조로부터 비껴나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예술가들은 삶과 현실을 일종의 풍경처럼 보는 이들이다. 그것은 나의 것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딘지 이질감이 나고 낯설고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그 어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살아야한다는 사실 때문에 매번 상처받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늘상 삶의 ‘엣지’에서 견디는 법을 보여주었다. 삶의 중심이 아니라 그 주변, 모서리에서 버티는 것이다.
커다란 유리판에 에칭 선으로 작가 자신의 하반신을 그려 넣은 황혜선의 작품은 자신에 대한 관조적 성격이 짙다. 치마를 입은 채 직립하고 있는 자신의 하반신인데 여기서 구두는 바닥으로부터 약 10cm 정도 떠있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발이 떨어져 있는 존재를 표현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람들은 늘상 자신에게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고, 현실감이 없다고들 한단다. 해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봐, 현실감이 없나봐” 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인정해본다. 자신이 현실감이 부재란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미지화 한 이 작품은 투명한 유리 플레이트에 그려진, 새겨진 저부조의 회화/부조다. 회화와 조각 그 사이,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은 사실 이 작가의 주된 경향이다. 이미지는 공간, 화면의 피부에 어렴풋하게 환생해서 보는 이들의 눈을 조심스레 유인한다.
얼굴의 부재는 남겨진 몸을 통해 무엇인가를 상상하게 한다. 가늘고 얇고 깨지기 쉬운 예민한 선으로 이루어진 몸체는 덧없고 희박하다. 삶은 그렇게 유리처럼 깨지기 쉽다. 한순간에 박살이 나고 모든 것은 흩어져버린다. 그 위에 생이 얹혀져있다. 목숨들이, 육체가 올라와 있다. 가는 선 위로 몸은 떠있다. 위태로운 삶에서 한 개인의 생애는 그렇게 부유한다.
돌이켜보면 그간의 모든 작업들이 이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사적 공간의 기억, 그 목록과 흔적과 마음에 남겨진 고인 것들에 대한 회상, 기억에 다름 아니었다. 작가가 즐겨 다루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작고 하찮고 소소한 사연들은 그러나 한 인간의 삶과 인생, 예술에 대해 커다란 부피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라는 점이다. 그 이야기의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매체나 재료를 찾아서 사용하는 것이 작업이 되고 있으며 동시에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융기한 감정의 문제들이 결국 작업이 된다.
우리는 매 순간 감정과 생각의 실타래를 풀면서 살아가는데 작가는 그것들이 자기 내부에 모이고 고여 어떤 형체로 부감될 때 비로소 이를 외화 시킨다. 그 작품들은 작가의 마음속에서 오래 머물다 나온 형상들이다. 마음 안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하나의 몸을 얻어 나온 것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작가 자신의 이야기, 감정이 묻어 있는 이미지들이다.
오늘날 미술이 개인이 세계에 반응하는 현재진행형의 심리적 계기가 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심리적 계기를 드라마 없이 정확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작품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저 보는 사람에게 속삭임처럼 다가가는 것을 원한다.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가진 작품의 힘, 말하지 않는 힘을 표현하고자 한다. 침묵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작품 말이다.
황혜선의 작업에는 공통적으로 아련하고 조심스레 드러나는 이미지들, 명확함과 거대한 스케일이 아닌 작고 흐릿하고 적조한 것들, 손상되기 쉬운 재료들, 투명하고 가볍고 반짝이며 침묵과 적조함으로 절여진 것들이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고 이미지이면서 문장이고 보는 것이자 동시에 의식하는 것, 생각이자 물질이며 매우 사적이면서 보편적이다. 망막에 최소한으로 호소하고 정신과 마음을 최대한으로 흡인해내는 그런 작업이다. 그리고 이는 이 작가의 성정과 인성에 연유한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행복과 불행에 대해, 이 세상의 가치와 믿음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 등을 대면하면서 이를 작업이란 수행으로 치러낸다. 머릿속에서 자신의 삶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하려 노력하지만 순간 우리들이 지닌 궁핍한 언어는 곧 메말라 버린다. 미술 역시 궁핍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녀는 그 궁핍함과 허약함을 껴안고 그것으로 자기 생의 단상을 조심스레 보여준다. 현실에서 약간 발이 떠있듯 살아가면서 삶의 어떤 디테일한 부분들을 더 섬세하게 살피고 있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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