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시민' 드골, 그는 살아있었다!
[특별기고](상) 두메산골의 '드골 기념관'에서 본것, 느낀것
택시기사 "드골은 위대하지만 그도 한명의 시민일뿐"
필자도 20년 전(1979년) 겨울휴가 때 찾았던 드골을 이번 유럽여행에서 다시 찾기로 한 것은 2008년 10월 사후 28년 만에 ‘드골기념관’이 개관됐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혼자 찾아가기 힘들기는 20년 전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리에서 250km 동남쪽 ‘코롱베 레 드제그리즈’ 마을은 자가용이 없으면 갈 수 없는 두메산골이다. 나는 파리발 급행열차로 쇼몽시에 내려 택시를 타고 20분 달려서 도착했다. "셔틀버스라도 마련해야지 드골과 같은 위인기념관에 버스도 없다니 말이 되느냐?"고 물었으나, “드골은 위대하지만 그도 한명의 시민일 뿐”이라는 게 택시기사의 말이다. 한국의 거대한 전직 대통령 유택들과 많은 기념관을 생각하니 곤혹스러운 느낌이었다.
드골기념관은 동네서쪽 야산 꼭대기에 있었다. 7월 마지막 주말에 자가용으로 프랑스시민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스페인 등 유럽시민들이 드골순례를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유럽의 여론조사에서 20세기 유럽지도자들 가운데 드골이 1위, 처칠이 2위를 차지했다. 나치독일을 패망시킨 2차 세계대전 영웅 처칠은 전쟁 후 실각을 했고, 레지스탕스 영웅 드골은 그 후에도 프랑스 5공화국 초대대통령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독일과 화해로 유럽통합의 길을 닦았고, 모택동의 중국을 최초로 승인하는 등 동서긴장완화에 기여했다. 그리고 패전국 프랑스를 승전국으로 업그레이드했고, 오늘의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드골기념관은 2006년에야 ‘샤를르 드골재단’이 설립되어 기념관건설을 결정했다. 재단의 공동대표들은 드골파의 메스메르 전총리, 사회당 미테랑 정권의 초대총리 모로아와 3대총리 로카르, 드골파 정치인 시몬느 베이유여사와 이브 게나 전 장관이 맡는 등 좌우파 지도자를 망라했다.
드골파 뿐만 아니라 사회당인사들이 재단지도부를 구성해 범국민적 사업으로 기념관 건립이 설립된 것이다. 한국의 정치풍토와 달리, 국민을 섬기고 존경하는 정치지도자 드골의 정신과 자세, 이념을 초월한 대정치인의 기념관건설에 좌우가 없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특히 드골기념관이 사후 28년만에 건립되어 느림보 기념관이 된 것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정치풍토이다.
해방후 나치협력자 숙정, 식민지시대 종식, 독자외교노선 확립...
아무튼 기념관을 돌아보면 드골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한 위대한 정치인인지, 일목요원하게 볼 수 있다. ‘1890-1946년’ 관에는 출생부터 육군사관학교 생도와 육군장교시절, 1934년 중령 때, ‘코롱베 레 드제그리즈’의 집을 사 정착했다. 1940-1942년 프랑스패전으로 런던에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세워 연합군 일원으로 나치독일과 싸우면서 국내에 레지스탕스를 조직해 나치와의 내전을 총지휘했다. 1942-1944년 그는 알제로 망명정부를 옮겨 연합군과 같이 싸워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를 승전국으로 만들었다. 1944-1946년 파리해방후 임시정부 대통령 드골은 나치협력자를 깨끗하게 청산했으며, 공화정과 의회민주주의의 복원, 사회복지국가 토대구축 등 ‘현대프랑스’를 출범시켰다.
1946-1958년, 정계를 은퇴한 그는 “고독한 사막횡단의 시기”를 보냈다. 나치가 불태워 파괴한 시골집을 복구해 <전쟁회고록>을 집필한 작가신분으로 12년을 이 시골집에서 보냈던 것이다. 그는 <전쟁회고록>의 인세로 레지스탕스와 임시정부대통령시절의 빚을 갚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8년 5월 그는 알제리전쟁이 악화되면서 제4공화국 좌파수뇌가 드골에게 정권을 넘겨, 1958-1970년의 드골시대가 열었다.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알제리전쟁을 종결지어 독립시킴으로써 식민지시대를 청산했다.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의 공고화, 핵강대국 지위 획득, 에어버스 항공산업 구축, 미라쥬 전투기 등 방위체제구축, 우주산업 아리안에스파스 프로그램, 초음속 여객기 콩코르드플랜, 그리고 미소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자외교노선의 전개, 북대서양동맹(나토)의 군사동맹 탈퇴, 모택동의 중국 승인 등 큰일을 했다.
그러나 드골은 1968년 5월 파리학생혁명으로 1969년 4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드골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싫다"고 외치는 젊은 세대의 저항에서 ‘드골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시골집으로 귀향했다. 드골은 <희망의 회고록>을 집필도중 의자에 앉은 채 운명했다.
드골의 유언 "나는 국민장을 원치 않는다"
드골 유택은 기념관에서 600m 거리인 동네 한복판 성당의 공동묘지에 있다. 십자가밖에는 장식 하나 없는 검소한 묘석에는 <샤를르 드골 1980-1970>이라는 기록이 순례객들을 맞고 있었다. 일찍 죽은 딸 안느와 부인 이본느여사 이름이 옆에 새겨져 있어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기념관을 방문한 순례객들이 드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드골은 여기에 한 시민으로 잠들어 있으나 그의 업적은 세계의 칭송을 받고, 드골주의자 사르코지가 현재 집권해 드골의 이념을 계승하고 있다"고 답했다.
기념품 상점에는 드골의 기념품을 팔고 있다. 유서 1부를 사보았다. “장례식은 아들, 딸, 사위, 며느리가 간단히 치르기 바란다. 나는 국민장을 바라지 않으며,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관료들의 참석을 원하지 않는다. 오직 군대만이 참가하기 바라며, 어떤 음악, 어떤 군악연주도 하지 말라. 어떠한 연설도 하지 말라. 침묵으로 의식이 집행되어야 한다. 나의 가족, 프랑스해방의 레지스탕스 동반자, 코롱베 마을 시의회의원만이 장례식에 참석하라...” 그의 장례식 때 모택동과 닉슨의 조화만이 허용됐다고 한다.
“장군의 참나무관 길이는 2미터20센티로 하라.” 이본느여사의 명령이었다. 코롱베마을 시민들의 관과 똑 같은 크기다. 불과 368명의 동네주민들과 프랑스국민은 장군의 장례식을 치르며 “장군을 이렇게 보내서야”라며 울었다고 당시 언론이 기록했다. ‘한 시민으로 태어나서 국민에게 봉사하고 다시 시민으로 돌아가 땅에 묻힌다’는 드골의 애국심이 유서에서 읽혀진다.
묘지에서 불과 500m, 생전에 ‘사막을 횡단하며 고독했던’ 그의 집 ‘브와쓰리’가 부속기념관이 되어 순례자들을 받고 있었다. 2차대전 후 나치방화로 폐허가 된 집을 2층 집으로 개조했으며, 맨 왼쪽에 부엌, 다음이 식당, 그 다음 방이 ‘작가 드골’의 집필실, 그리고 마지막 방이 거실이었다. 집필실에는 루즈벨트, 처칠, 투르먼, 장개석, 아데나워 등의 사진이 책장위에 걸려 있었다. “바로 이 의자에서 장군이 별세하셨다”고 안내원이 설명한 의자는 너무나 작은 보통시민의 의자였다.
드골기념관과 유택 그리고 집의 순례는 세계시민에게 감동의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비로소 프랑스에 보수우파라는 드골주의가 21세기 오늘에도 살아 생동하며 국가경영을 담당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드골 이래 퐁피두, 지스카르, 시라크 등 3명의 드골주의 대통령이 집권했고, 현재 골수드골주의자 사르코지대통령이 프랑스를 다스리고 있다.
드골 "프랑스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드골주의는 1940년6월 망명정부를 수립, BC방송에서 나치독일이 점령한 프랑스본토를 회복할 것을 다짐하고 자유프랑스가 영미연합군과 함께 싸울 것을 선포한 날, 시작되었다. 드골주의는 우파이념으로 오늘까지 69년 동안 정치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드골은 우파 드골파, 사회민주주의파, 공산당, 민족주의를 레지스탕스에 결집시켰다. 히틀러의 앞잡이로 공화정과 의회민주주의, 시장경제를 폐지한 페탱의 비시정권을 나치협력반역집단으로 규정해 준엄하게 심판했다. 1944년 8월 파리해방 후 레지스탕스로 구성된 좌우공동의 프랑스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국민의 전체이익과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당파이기주의를 배격해 모두가 공조-협력한다는 국가전략이 바로 드골주의의 핵심이다. 그래서 드골주의는 좌파와 잘도 공조할 수 있었다.
드골은 1965년 ‘대통령은 좌우파 이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프랑스는 모든 프랑스인이다. 프랑스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 우파사람들은 내가 밖에서 좌파정책을 한다고 말한다. 좌파사람들은 '드골, 자네는 우파를 위해 일한다'고 한다. 나는 어느 한편이 아니라 바로 프랑스이다!”
드골주의가 49년간 지속가능한 이념으로 집권한 것은 사회복지, 자주외교, 거대국가사업의 실현, 이념을 초월한 정치-국민통합 등 시대를 앞서가는 변화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지속가능한 유일한 이념체계가 드골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드골 "사르트르 영감을 건드리지 말라"
그러다가 드골주의가 위기를 맞은 것은 1981년 사회-공산-급진좌파의 좌파연합정부 출범 때였다. 사회주의 대통령 미테랑의 등장으로 프랑스 5공화국의 존립이 위협 당했다. 미테랑은 "제5공화국은 드골에게 맞는 옷이지 좌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나는 드골의 옷을 입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국제사회는 프랑스가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어 유럽의 쿠바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언제 헌법개정으로 제6공화국을 출범시키느냐고 의론이 분분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제6공화국은 등장하지 않았다. 미테랑과 좌파정부도 5공화국이 ‘드골의 옷’이기는 하지만 프랑스에도 잘 맞는 옷이며, 좌파에게도 나쁘지 않는 체제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테랑과 프랑스좌파가 드골의 권위주의를 비판했으나, 드골은 공산당조차도 완전한 정치활동을 향유하는 사상과 정치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했다. 실존주의철학자 사르트르가 모택동주의 깃발을 들고 과격시위를 하면 “사르트르 영감을 건드리지 말라”며 보호했다. 다만 시위가 폭력으로 발전하면 철저히 억제했다.
미테랑정부는 5공화국의 틀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사회, 의료, 교육 등의 복지를 강화하고 부유계층에게 사회연대세(부유세)를 신설하는 선에서 드골주의와 타협했다. 지방분권 공약도 파리의 국립행정학교(ENA)를 스트라스부르로 옮기는 선에서 끝냈다. 노무현정권의 수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대응이다.
미테랑의 사회주의정부 14년은 그래서 ‘드골의 제5공화국’을 오히려 강화하고 공화정모델로 완전히 정착하게 만들었다. 사회당과 공산당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속으로 들어가 사회주의적으로 국가관리를 함으로써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적 시장체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테랑은 프랑스의 국가체제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조화된 “혼합사회”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국민복지로 국민통합을 이룩한다는 드골주의와 맥을 같이 한 좌파의 타협을 뜻한다. 왜냐하면 드골대통령이 1945년 드골파-사회당-공산당 공동정부를 구성해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사회복지시스템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드골파 총수 사르코지가 사회당인재들을 거침없이 요직에 발탁하는 등의 실용주의도 실은 드골주의의 추구인 것이다. 오늘 프랑스시민이 사르코지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풍자하는 것은 드골주의의 이념적 성격을 잘 설명하고 있다.<계속>
필자 소개
언론인. 1937년 생. 파리 13대 정치학 박사, 파리 1대 프랑스혁명연구소 연구원,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 국제문제 대기자. 저서 <프랑스혁명과 한말 변혁운동><지도자와 역사인식><프랑스의 대숙청><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김정일과 부시의 대타협><사회민주주의 길-서구 좌우파의 실용주의>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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