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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때도 이렇게 힘들진 않았다”

[폭발직전의 대한민국] <1> 관악시장 상인들의 분노

“IMF 직후에도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어. 그때 신문이나 방송들이 서민경제가 다 죽었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래도 시장 나와서 새벽에 첫 손님 맞고 밤 11시가 넘어도 한 두건 매상 올리고 갈 수 있었어. 지금? 낮에 두어 건 매상 올리고 밥 때 되기 전에 셔터 내리고 집에 들어가는 날이 대부분이야.”

설 곳을 잃은 재래시장이 신음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들어서 상륙한 '괴물' 대형마트는 오랜 기간 재래시장의 영역이었던 지역상권을 단박에 무너뜨렸다. 10년이 지난 현재 3백24개에 달하는 대형마트는 전국 1천7백2개 재래시장의 상권을 집어삼켰고 영세상인들은 잇따라 시장을 떠나고 있다. 아니, 쫓겨나고 있다.

"여기가 시장인지, 주택가인지"

9일 저녁 7시 서울시 관악구 신림1동 관악시장. 가장 많은 손님들이 찾는다는 퇴근시간대였지만 재래시장 특유의 생동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루에 평균 2천명~3천명이 찾는다는 관악구청의 홍보와는 달리 인적은 드물었고 많은 상인들이 상점 안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관악시장이 위치해 있는 신림동은 서울에서도 인구밀집도가 높아 60년대부터 점포 1백개 미만의 재래시장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이다. 인근에만 봉천3동, 4동, 신림8동, 9동 등 5개의 재래시장이 분포돼 있다. 관악시장은 이중에서도 건물수 41개, 점포수 1백16개에 시장골목의 길이가 4백10m로 인근 재래시장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고, 한때 권리금도 대단할 정도로 탄탄한 상권을 자랑했던 곳이다.

하지만 상인들 대부분은 “다 옛날 얘기”라고 말했다.

“누구나 시장에서 1시간만 앉아있으면 여기가 시장인지 일반 주택가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한 상인의 푸념이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먹고 살만 했다. 한창때는 권리금도 만만치 않게 높았고 매상도 나쁘지 않아 이곳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권리금은 고사하고 월세를 못내 보증금 다 까먹고 쫓겨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관악시장 입구에서 15년간 건어물상을 운영해 온 문 모씨(47)는 주변에 대형마트가 들어선 뒤부터는 아예 장사가 안된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장사가 안되는 수준을 넘어서서 완전히 상권이 죽어버렸다. 요즘 사람들이 마트에 차 몰고 가서 일주일치 먹거리를 사서 먹는데 어떻게 재래시장이 장사가 되겠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앞다퉈 재래시장 육성법, 환경개선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상인들이 느끼는 경기불황은 나날이 심해질 뿐이다.ⓒ뷰스앤뉴스


현대화 빌미로 임대료 폭등

상인들을 더 분통 터지자 만드는 건 정부의 '재래시장 활성화대책'이다.

관악시장은 최근 재래시장 활성화 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현대화사업을 통해 비가림막 공사를 하고 도로도 6미터까지 넓혔다. 총 예산 23억 2천만원이 투입됐고 이 중 90%를 정부가, 나머지 10%를 건물주가 부담했다. 하지만 단지 시장의 껍데기만 바꾸는 활성화대책은 임대료 인상의 빌미를 제공해 애꿎은 상인들의 피해만 불러왔다.

“재래시장을 활성화한다면서 20억을 들여서 아케이드를 치고 도로 넓히는 작업을 했지만 매출에는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오히려 건물주들이 이를 빌미로 임대료를 올리는 통에 상인들만 죽을 지경이다. 심한 곳은 30%까지 임대료를 올렸다. 이건 내쫓는 거나 마찬가지다.”

방앗간을 운영하는 이 모씨(가명. 49)의 불만이다.

“지역상권 자체가 죽었는데 현대화 시설이니 뭐니 해서 수십억을 들인다고 그게 해결되나. 1백만원 조금 넘는 월세도 못 갚아서 사채를 쓰는 사람들까지 생기는 마당에... 시장에서 물건 한번 안 사는 높으신 분들이 하는 일이라 별로 기대도 안했다. 현대화 시설 공사 해놓고는 얼굴 한번 비친 공무원들이 없다. 차라리 건물 소유주들의 부당한 임대료 인상이나 계약해지를 막기 위해 영세상인들을 보호할 법을 만들라.”

건물주 폭리를 못 막는 상가임대차보호법

이 모씨는 국회가 지난 2001년 영세상인들을 위해 제정한 상가임대차보호법에 대해 “실제 상인들이 처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법”이라며 쓴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현행법상 건물주는 연12%로 임대료 인상을 제한받게 되지만, 법이 폭넓게 정한 계약갱신 거부 사유을 건물주들이 악용할 경우 힘없는 영세상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실제로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상인들로부터 ‘임대인을 위한 보호법안’이라는 원성을 사고 있다.

특히 임차인인 상인에게 5년간의 자동계약갱신청구권을 보장하는 전제조건으로 내걸은 환상보증금 제도는 ‘월세×100+보증금’이라는 계산법을 적용해 총액이 2억4천만원(서울지역)을 초과할 경우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보증금 1억에 월세가 1백40만원을 넘어서는 상점이 계속해서 장사를 하려면 건물주가 매년100% 이상의 임대료 인상을 요구해도 항의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이씨의 점포는 이를 넘어서고 대부분의 시장 내 상점도 마찬가지다.

이씨는 몇몇 빈 점포를 가리키며 "대부분 대폭 감소한 매출과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나간 점포들"이라며 "어렵게 노점상 생활을 접고 들어왔다 다시 노점으로 나가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탄식했다.

재래시장의 불황은 10년 전 유통시장 개방과 이에 따른 대형마트의 등장과 궤를 같이한다. 관악시장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롯데백화점.ⓒ뷰스앤뉴스


"높아진 은행 문턱, 가까운 고리사채에 상인들 멍든다"

시장 불황이 극에 달하자 요즘 들어선 폭리를 노리는 소규모 사채업자들이 시장의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연 1백20%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금리를 적용하는 불법 고리대금업체들이 급전이 필요한 절박한 영세상인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는 것.

15년째 신발가게를 운영해 온 박제균(65)씨는 “적자에 허덕이다 월세 납입일인 15일이 다가오면 어쩔 수 없이 급전이 필요할 때가 있다”며 “주변에서 사채를 쓰고 못 갚아 보증금마저 다 날리고 시장을 떠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한창 시장이 호황일 때는 은행들이 저마다 쉽게 대출을 해줬는데 이제는 마이너스 통장 하나 만들려고 해도 집 담보를 요구하는 실정”이라며 “은행 문턱이 높아지니까 상인들로서는 최악의 선택도 마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서민들을 외면하는 은행 등을 비난했다.

15년간 신발가게를 운영해 슬하에 둔 2형제를 어렵게 분가시킨 박씨의 상점 안에는 여름 휴가철을 겨냥해 들여온 슬리퍼만 잔뜩 쌓여있을 뿐이었다.

박씨는 “아무리 상인들이 발버둥쳐봤자 시장 살리겠다면서도 뒷전에서는 이곳저곳에 대형마트 입점을 허가하는 정부의 이중적인 정책으로는 안된다”며 “누구도 해법을 내지 못하고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재래시장 상인들은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꼴”이라고 탄식했다. 말 그대로 '폭발 직전'이라는 얘기다.

“시대의 흐름이 재래시장을 죽여가고 있다는 걸 상인들도 잘 알고 있고 많은 걸 바라지도 않는다. 대책이 없다면 책상머리에만 앉아있지 말고 한번이라도 시장을 찾아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인들의 얘기라도 들어달라.”

정부에게 하는 서글픈 당부였다.
최병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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