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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노소 분당과 한나라당

[이덕일의 역사 직필] <3> 분열정치의 원조 송시열

체제 내 야당 남인의 도전

1674년(숙종 즉위년) 남인(南人)들은 드디어 정권을 장악한다. 인조반정(1623) 이후 50여년 만에 만년 야당의 설움을 씻고 정권을 차지한 것이다. 서인(西人)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면서 남인들을 끌어들인 것은 지지기반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야(朝野)에는 서인 핵심들이 비밀리에 모여 “이조참판 이하까지는 남인들을 쓸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고 결의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남인들은 현종 즉위년(1659)의 제1차 예송논쟁 때 윤선도를 중심으로 서인 송시열을 공격하며 정권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15년 후 숙종 즉위년(1674)의 제2차 예송논쟁 때 남인들은 드디어 정권 장악에 성공했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의 핵심은 간단한 것이었다. 왕가의 예법과 사대부가의 예법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점이기 때문이다. 효종의 승하로 발생한 제1차 예송논쟁이나 효종비 장씨의 승하로 발생한 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들은 왕가의 예법과 사대부가의 예법이 같다고 주장한 반면 남인들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이 왜 중요하냐면 효종이 차남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망한 소현세자가 인조의 장남이었다. 서인들은 효종과 그 부인의 장례를 차남과 차자부(次子婦)의 예(禮)로 치르려고 한 것이고, 남인들은 장자와 장자부(長子婦)의 예로 치르려고 한 것이다. 남인들이 항상 서인들보다 긴 복제(服制)를 주장한 것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2차 예송논쟁으로 남인들이 승리하면서 서인들은 정권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탄압을 받았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은 덕원(德源)으로 귀양 갔으며, 김수항(金壽恒) 역시 원주로 부처되었다.

서인들의 정치보복

재기를 노리던 서인들은 숙종 6년(1680) 남인 영의정 허적(許積)의 연시연(조부의 시호〔諡號〕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잔치) 때 허적이 궁중의 유악(油幄:기름 먹힌 천막)을 임의로 가져간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정권을 탈환했다. 이것이 경신환국(庚申換局)인데, 6년 만에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남인에 대한 정치보복에 나섰다.

그 정치보복의 정점에 숙종의 외척인 서인 김석주(金錫胄)가 있었다. 숙종과 김석주는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을 역모로 몰아 죽이면서 아무 죄도 없는 부친 허적까지 연루시켜 죽였다. 그리고 남인 강경파였던 윤휴(尹&#38004;)와 오정창(吳挺昌)도 사형시켰다. 6년 전에 남인들은 서인들을 귀양 보낸 적은 있어도 죽인 적은 없었다.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었던 송상민(宋尙敏)이 숙종 5년(1679) 옥사(獄死)한 적이 있지만 이는 송상민이 숙종에게 송시열의 예론을 적극 옹호하며 정면도전 했기 때문이지 남인들의 정치공작은 아니었다.

재집권한 서인들은 달랐다. 서인들은 남인들을 철저하게 응징해 재기를 막으려했다. 김석주가 배후 조종한 숙종 8년(1682)의 ‘임술고변’이 그것이다. 임술년에 3건의 고변이 한꺼번에 발생했기 때문에 ‘임술고변’이라고 부른다.

임술고변의 목표는 남인의 재기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민암(閔&#40687;), 권대운(權大運), 오시복(吳始福), 오정위(吳挺緯) 등 남인 주요 인사들과 허새(許璽), 허영(許瑛) 등 여타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중 첫 번째 고변자인 전 병사 김환(金煥)의 고변 과정은 첩보소설을 연상케 한다.

정치공작의 시대

김환은 서인과 남인 모두에게 두루 통하는 사이였는데 김석주는 바로 이 때문에 그를 고변자로 지목했다. 처음 김환이 거절하자 김석주는 “네가 비밀을 모두 알고도 정탐을 거절한다면 나는 네 목을 먼저 베어버리는 수밖에 없다”라고 협박해 승낙을 받았다. 김석주는 그 방법까지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남인 허새와 허영의 집은 용산이다. 너는 그 이웃집으로 이사하여 그들과 친히 지내다가 어느 날 같이 장기를 두어라. 대국 중에 상대편의 왕을 잡으면서 ‘나라를 빼앗는 일도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그의 기색을 살펴라. 허새 등이 조금도 해괴하게 여기지 않거든 같이 잠을 자면서 역모를 일으키자고 말하라. 이렇게 그의 동태를 살피면 남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김환이 “만일 그들에게 역심(逆心)이 없으면 제가 도리어 역모로 몰릴 테니 그 방법은 안되겠습니다”라고 거절하자 김석주는 “내가 다 알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면서 자금을 주었다. 김환은 이 돈으로 허새의 옆집을 구해 이사했다. 이 무렵 사은사로 청나라로 가게 된 김석주는 심복 김익훈(金益勳)에게 공작을 인계하고 북경으로 떠났다. 김환은 보고선을 김익훈으로 바꾸어 계속 남인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이러던 차에 고변을 앞당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김환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남인들을 떠보기 위해 한 말들이 퍼진 것이었다. 당황한 김익훈은 김환에게 빨리 고변하라고 재촉했다. 그래서 김환은 숙종 8년(1682) 10월 21일 부랴부랴 고변에 나섰다. 남인 허새, 허영 등이 대궐에 난입해 숙종을 제거하고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한 다음 대왕대비에게 수렴청정케 하려 하는데, 민암, 권대운, 오시복 등 남인 주요 인사들이 모두 가담했다는 것이다. 즉각 허새, 허영 등은 끌려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김환의 고변 이틀 후에는 김중하(金重夏)가 다시 남인 영수 민암을 고변했다. 민암이 정권 탈취를 위해 사생계(死生契)에 들어갈 동지를 규합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김중하 고변 나흘 후에는 김석주의 심복인 어영대장 김익훈이 궐내에 있는 장신(將臣)들의 숙직소인 정원의 아방(兒房)에서 숙종에게 고변의 시말을 밀계(密啓)했다. 이 역시 남인들을 역모로 몰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정치공작에 대한 젊은 서인들의 비판

국문장에 끌려온 허새와 서종제(庶從弟) 허영은 심한 고문을 못 이겨 허위자백했다. 그러나 잇단 고변이 정치공작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조정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김익훈은 당황했다. 김석주가 청나라에서 돌아오자 김익훈은 곧바로 김석주를 찾아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김석주는 공작정치의 대가답게 아방에서 임금에게 밀계하라고 지시했다. 김익훈의 3차 고변은 이런 경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변이 잇따르고 잡혀온 인사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자 상황이 혼란스러워졌다. 고변의 진상도 불투명해졌다. 3건의 고변이 독립된 사건인지 서로 연결된 사건인지도 불분명했다. 고변의 진상에 대한 의혹이 커져가자 대질심문 여론이 높아갔다. 고변자와 고변을 당한 자들을 대질심문하라는 여론이었다. 고변자 김중하와 고변 당한 남인 민암을 대질심문한 결과 김중하의 무고임이 밝혀졌다. 민암은 무혐의로 석방되고 김중하는 무고죄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김환의 고변은 허새와 허영의 고문에 못 이긴 자백 때문에 사실로 인정되었고 둘은 곧장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의혹이 광범위하게 번졌다. 비슷한 고변이 하나는 인정되고 하나는 무고로 처리되었으니 의혹이 없을 수 없었다. 조선은 반좌율(反坐律)에 의해 상대방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고변했다가 무고로 밝혀지면 그 자신이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는데, 고변자 김중하가 유배로 처리된 데 대해서도 정권의 봐주기라는 의혹이 일었다.

양식 있는 서인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호군 이익(李翊)은 무고자 김중하가 유배로 그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승지 조지겸(趙持謙)도 무고자의 처형을 주장했다. 조지겸은 김익훈에 대한 조사도 주장했다. 사실상 배후의 김석주를 겨냥한 것이었다. 반면 서인 대신들은 김익훈을 옹호해 논란이 커졌다. 영의정 김수항은 사직을 청했고 국왕 숙종도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정권의 지주이자 핵심인 김석주의 심복을 처벌할 수도 없었고, 대간들의 이유 있는 항변을 계속 물리칠 수도 없었다.

사림의 세 명망가

숙종은 사림의 세 명망가를 불러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명재(明齋) 윤증(尹拯), 그리고 남계(南溪) 박세체(朴世采)였다. 특히 대로(大老)라는 경칭으로 불리던 송시열이 핵심 인물이었다. 남인 집권 때 귀양 갔다가 정권을 되찾은 뒤에도 출사하지 않고 고향인 충청도 회덕에 은거한 송시열은 숙종도 ‘백수 대로(白首大老)’라고 높이는 국가의 원로가 되었다. 대신과 대간이 서로 다투자 숙종은, “대로(大老)의 결정에 따르겠다”며 송시열에게 그 처분을 위임했다. 그 전에도 숙종은 여러 차례 사관과 승지를 송시열에게 보내 처리 방침을 물었으나 송시열은 “신은 병들고 혼미하여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으므로 이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니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했다.

우암 송시열. 그는 '내 세력 챙기기'로 조선을 분열시키고 역사를 퇴행케 하는 역사적 과오를 범했다. ⓒ연합뉴스


이러던 송시열이 드디어 몸을 일으켜 출사를 결심하자 젊은 사대부들은 큰 기대를 걸었다. 특히 김익훈 처벌을 주장했던 젊은 서인들은 송시열의 출사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간 송시열이 보여준 처신은 옳다고 생각하면 앞뒤 재지 않고 전진하는 선비의 모습이었다. 때로는 편협하다는 말도 들었지만 이런 강직함이 송시열의 장점이었다. 젊은 서인들은 강직한 송시열이 무고자 김익훈을 법대로 처리할 것으로 믿었다. 송시열이 여주에 도착하자 숙종은 승지 조지겸을 보냈고, 조지겸은 송시열에게 정국 현안을 설명했다. 그는 김익훈이 허새를 역모로 꾀어 낸 것은 그 자신이 반역한 것보다 더 나쁘다는 젊은 선비들의 정서를 설명했다. 조지겸은 또한 김익훈이 부정 축재 진상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에 대해 송시열은 “고약한 위인이다. 그런 자는 비록 죽여도 애석하지 않다”라고 답변했다.

이 소식을 듣고 젊은 선비들은 환호했다.
“대로&#8228;장자(長者)의 견해도 우리들과 같다.”

젊은 서인들은 송시열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는 서인정권을 바로 잡아주기를 기대했다. 공작정치를 주도한 김익훈을 처벌한다면 김석주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이고 공작정치는 끝을 맺을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에 온 송시열은 김수항&#8228;민정중&#8228;김석주 등 서인 정권의 실세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들 서인 중진들의 설명은 조지겸과 달랐다. 남인과의 권력투쟁이란 측면에서 김익훈 사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입대한 송시열에게 숙종이 김익훈에 대한 처리 방침을 물었다. 송시열의 대답은 젊은 서인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옛날 이황이 죽은 뒤에 그 제자 조목은 이황의 손자를 지성으로 훈계해 과실을 면하게 했습니다. 신의 스승은 김장생인데 그 손자 익훈이 장차 큰 죄에 빠지게 되었는데 조목처럼 타이르지 못했으니 신이 죄인입니다.”

젊은 사류들의 희망을 무시하고 송시열은 김익훈을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서인을 소론과 노론으로 나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윤증과 박세채의 과천회동

송시열과 함께 숙종의 부름을 받았던 윤증(尹拯)은 송시열보다 늦은 숙종 8년(1682년) 말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윤증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오지 않고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제자였던 나량좌(羅良佐)의 과천집에 머물면서 정국을 관망했다. 정치현안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가다듬으며 출사해도 좋은지 아닌지를 계산했다. 그러자 먼저 출사한 박세채가 나량좌의 집으로 찾아왔다. 윤증은 박세채에게 자신이 출사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지금 잇단 역옥(逆獄)으로 남인들이 원한을 가지고 있는데 남계(南溪:박세채의 호)가 이들과 서인과의 사이를 화평케 할 수 있는가? 둘째, 정치에 부당하게 간여하는 삼척가(三戚家 : 김석주&#8228;김만기&#8228;민정중 등 세 외척)의 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가? 셋째, 현재 집권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자기 당 사람만 등용하고 반대당 사람은 무조건 배척하는데 이를 시정할 수 있겠는가?”

첫 번째 조건은 임술고변 등으로 남인들이 서인들에게 갖고 있는 원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를 물은 것이었다. 둘째 조건은 정치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김석주 같은 외척들의 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가를 물은 것이었다. 세 번째는 송시열이 주도하는 서인의 편협한 인재등용 방식을 고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윤증은 외척의 정치간여를 배제함으로써 공작정치를 종식시키고 서인과 남인을 모두 등용함으로써 대타협을 이루어야 한다는 시국관을 표출한 것이었다.

박세채는 윤증의 세 가지 문제제기가 모두 타당하다고 수긍했으나 자신은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자 윤증은 서울에 들어오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박세채 역시 귀경 후 송시열은 찾지 않고 숙종에게만 사의를 표하고 고향인 파산(坡山)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조정에 남아 있던 송시열만 모양이 이상해졌고, 그 역시 사직하고 금강산을 유람한 후 회덕으로 돌아갔다. 사림의 세 명망가를 불러 사태를 수습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도리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하다

김익훈을 옹호했던 송시열이 노론의 영수가 되고 윤증과 박세채는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송시열이 서인 원로들과 결탁해 김익훈을 옹호한 것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중요 요인이었다. 동인이 일찌감치 선조 때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한 것에 비하면 비교적 오랫동안 같은 당의 테두리 내에 있었던 셈이다. 분당 당시의 노론의 중심인물은 송시열을 필두로 척신 김석주, 민정중을 비롯해 김수항·이이명·김익훈 등이었으며, 소론의 중심인물은 윤증과 박세채를 비롯해서 조지겸&#8228;오도일&#8228;한태동&#8228;박태보&#8228;이상진&#8228;남구만 등이었다.

윤증의 3대 명분론은 분열이 아닌 통합으로 과거가 아닌 미래를 지향하자는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남인과 서인의 화해, 척신 정치구조의 타파, 당색을 배제한 고른 등용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3대 명분론은 닫힌 정치에서 열린 정치로, 분열의 정치에서 통합의 정치로, 증오의 정치에서 사랑의 정치로 나가자는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송시열 중심의 집권층은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이런 시국관의 차이로 인해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었다.

한나라당의 현주소

서인의 노소분당은 한나라당의 현재를 생각하게 한다. 5·31지방선거 압승은 국민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현 정권에 대한 민란(民亂) 수준의 반감이 그 반대편에 있던 한나라당으로 몰린 것뿐이다. 정치·경제·외교·안보·교육 등 국정 전 분야에 걸친 현 정권의 실정이 아니었다면 한나라당은 언감생심 이런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이는 7·26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성북을 차지한 데서 입증된다. 한나라당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현 정권의 실정에 대한 반감에서 그 대척점에 있는 한나라당을 ‘할 수 없이’ 선택했던 유권자들이 다수였다. 열린우리당의 패배는 기쁘지만 한나라당의 승리는 기쁘지 않은 모순된 모습이 현 유권자들의 자화상이다. 열린우리당보다 덜 미운 정당인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는 현 정권의 대척점에 다른 정치세력이 들어선다면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 7·26보궐선거는 보여준 것이다.

5·31지방선거와 7·26보궐선거의 중간쯤에 있었던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한나라당이 미래를 지향하는 정당이 아니라 과거를 지향하는 정당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현 정권에 불만이 많다고 국민들이 한나라당의 전신이 집권했던 권위주의 시절을 그리워하거나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다. 권위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그 속마음이라면 한나라당에는 정치적 미래가 없다. 현 정권이 흔들어놓았다고 비판받는 국가정체성에 대한 대안이 권위주의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나라당의 전당대회는 조지겸이 아니라 김익훈의 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잘못된 과거와 단절하면서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미래를 제시하는 길이다. 여당의 실정에 대한 반사이익에 만족하는 웰빙정당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는 실천정당의 모습이 필요하다. 국정현안의 현장에 있는 현장정당이어야 하는 것이다. 수해골프 사건이나 김병준 교육부총리에 대한 한나라당 국회 교육위원들의 질의 자세를 보면 한나라당에 이런 모습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란 생각이 든다. 대오각성, 분발하기를 바란다.

필자 소개

이덕일


숭실대학교 사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구실과 강단이라는 공간적 한계와 전문연구서라는 매체적 제약에서 벗어나 열린 가슴으로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과 함께 나누는 작업을 시도하여,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그가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 2》는 우리 사회가 어떤 역사서를 원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 책으로 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며, 수많은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거칠 것이 없어라:김종서 평전》, 《당쟁으로 보는 한국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누가 왕을 죽였는가》, 《유물로 보는 한국역사》등의 저서는 많은 독자들과 한국사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역사와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은폐된 조선조 사건을 철저한 고증으로 재현한 《운부 1,2,3》에서는 역사가가 완성한 역사소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그는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조선 명문가 사람으로, 부귀를 버리고 조국독립과 이상사회 실현에 일생을 바친 우당 이회영과 그의 동지들의 삶을 다루었으며,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300년 전 인물인 송시열 신화의 가면을 벗겨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학문적 깊이와 지적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인간 중심의 역사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30 17
    노신사

    역사적 충고
    한나라당의 깨우치지 못한 보수에 목매달은 모습을 잘 표현해 주신 이덕일씨의 고견에 감사드린다. 국민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는 교훈적인 고견으로 감격한다.
    역사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음을 새삼 느껴본다. 이덕일씨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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