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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할아버지가 장애 아들,손자 죽인 고통을 아는가"

<현장> 멀고 험난한 장애인들의 시청 가는 길

차별철폐 구호가 적힌 대형걸개와 장애인들의 3대 요구가 적힌 만장을 선두에 세운 ‘420 장애인차별철폐 투쟁 행진’은 남대문 사거리에서, 목적지인 서울시청 앞에서 경찰의 봉쇄에 두 번 막혀야 했다.

매서운 맞바람을 맞으며 장애인들이 시청 옆 인권위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7시 12분이었다. 도보로 약 20분, 거리로 따지면 1.145km의 짧은 구간을 걸어오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1백78분.

매년 3월20일부터 4월20일까지 한달동안 장애인들의 이유 있는 ‘춘투’가 벌어진다. 매년 반복되는 정부의 시혜성 정책들이 장애인들의 소박한 요구를 외면하자 지쳐간 장애인들은 2002년부터 4월 20일 달력란에 ‘장애인의 날’이 아닌 다른 이름을 적어 넣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차별받지 않는 유일한 날이라는 4월 20일은 이들에게 ‘장애인 차별철폐 공동투쟁’의 날이다.

'차별에 저항하라' 장애인들의 차별철폐 공동투쟁이 올해로 다섯번 째를 맞았다.ⓒ최병성


“야만의 세월을 거슬러, 장애인도 사람답게 살아가야한다”

이날 오후 2시 30분부터 서울역 광장 앞에서는 민주노동당, 희망사회당, 민주노총을 비롯한 24개 공동대표단체와 100개 장애인권,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420장애인차별철폐 공동투쟁단(공동투쟁단)’의 다섯 번째 투쟁결의대회가 열렸다.

“장애를 ‘극복’한 훌륭한 장애인과 장애인을 위해 ‘봉사’하는 아름다운 이웃의 모습에 박수를 치며 우리 사회가 기만에 빠져 있던 그 순간 부산에서는 40대 아버지가, 서울에서는 70대 할아버지가 장애를 지닌 자신의 아들과 손자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결의대회에 참석한 장애인, 활동보조인, 특수교사 등 1천여명의 참석자들은 장애인들의 기본권 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정부와 국회, 정치권의 행태를 거세게 비판했다.

참석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장애인의 교육권 보장을 위한 장애인지원교육법, 중증장애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활동보조인 제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시정을 명문화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요구에 대해 우리 사회와 정부는 여전히 성의있는 답변을 주지 않고 있다”며 장애인들의 3대 요구법안 제정을 촉구했다.

이들은 “사회와 정부가 답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장애민중의 투쟁으로 그 답을 만들어 갈 것”이라며 “야만의 세월을 거슬러, 이 땅의 모든 장애민중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한 투쟁”을 선언했다.

장애인들이 일상에서 겪는 차별과 고통에 대한 절절한 투쟁발언들도 이어졌다.

본대회를 마무리하고 서울역~서울시청 구간을 가두행진하는 참가자들.ⓒ최병성


“혼혈인 금지법안은 되고 장애인차별방지법은 안된다고?”

박영희 공동투쟁단 공동대표(장애여성 공감 대표)는 “최근 한 패스트푸드점의 아르바이트생이 중증장애인에게 빵을 먹여주는 사진이 감동적이라며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며 “하지만 그렇게 도움을 받아 햄버거를 먹는 장애인이 어떤 심정일까에 대해 우리 사회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만약 우리가 요구하는 활동보조인이 있었다면 이런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며 “장애인이 당당하게 먹고, 씻고, 일어나고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과 환경을 우리는 원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결의대회의 사회를 본 양영희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은 “미식축구 스타 혼혈인이 오니 혼혈인 차별금지법은 금새 만들어졌다”며 “그런 정부가 5년 동안 우리 장애인들이 싸우고 요구해 온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촉구하며 37일간 곡기를 끊었던 도경만 전국장애교육권연대 집행위원장은 “추운 날씨지만 동지섣달 보일러가 터져 얼어죽은 장애인, 장애아로 태어나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할아버지 손에 목숨을 잃은 장애소녀의 고통보다는 춥지 않을 것”이라며 “더 이상 차별에 길들여져 살 수 없기에 우리는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날 결의대회는 초겨울을 방불케 하는 낮은 기온에도 불구하고 2시간여 동안 각종 문화공연과 연대, 투쟁발언으로 이어졌고 참석자들의 투쟁결의문 낭독을 끝으로 본대회를 마무리했다.

행진내내 장애인들과 경찰의 실랑이가 벌어졌다.ⓒ최병성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17일 삭발을 단행했던 39명의 머리카락이 담겨져있는 상자.ⓒ최병성


"행진공간 보장하라"에 "교통흐름 방해된다" 충돌

이어 참가자들은 지난 17일 자활보조인 서비스 제도 도입을 촉구하며 서울시청 앞에서 삭발을 감행한 39명 중증장애인들의 머리카락을 이명박 시장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두행진에 나섰다.

하지만 가두행진 내내 충분한 공간확보를 요구하는 장애인들과 이를 막아선 경찰들의 충돌이 이어졌고 급기야 행렬은 남대문 사거리 앞에서 멈춰섰다.

이들은 곧바로 연좌농성에 들어갔고 문화제와 투쟁발언을 두 시간여 동안 진행한 후 다시 서울시청을 향해 가두에 나설 채비를 갖췄지만 이미 시각은 6시를 훌쩍 넘겨 해가 질 무렵이었다.

결국 그들은 장애인의 차별을 용인하는 이 사회와 정부의 무관심에 대한 분노를 담아 서른 아홉 박스에 나눠 담긴 머리카락을 불태우고 시청으로 향했다.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은 더불어 살아야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시청은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장 내일부터 열릴 ‘세계지적재산권의 날’ 기념행사를 위한 부스 설치가 한참이었기 때문이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이들의 긴 행렬은 끝이 났다. 인권위 앞으로 들어오는 참가자들.ⓒ최병성


결국 몇 분간의 실랑이 끝에 행렬 대오는 인권위 앞 4차선에서 정리집회를 갖고 오후 8시께 여섯 시간 동안의 긴 결의대회를 마무리했다.

이들은 “장애인들에게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우리 사회의 야만과 폭력이 계속되는 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우리는 거리로 나설 것”이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행동을 거듭 다짐했다.

“장애인의 교육권을 말로써는 보장할 수 있지만 문서로 약속할 수 없다는 교육부에 대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도 없는 오페라 하우스를 짓기 위해 1조원의 예산을 퍼부으면서 장애인의 생존권을 위한 예산은 없다는 서울시에 대해, 장애인의 열망과 자기 선택인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최고 권력자의 말 한마디로 휴지조각을 만들어 버리려는 이 땅의 정부에 대해 더욱 가열찬 투쟁으로 화답해 나갈 것이다.”
최병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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