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재야 大人' 홍남순 변호사 별세
30여년간 인권변호사로 활동, 5.18때 옥고도. 광주시민장 예정
70년대 반독재 투쟁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광주.전남지역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재야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려온 홍남순(洪南淳)변호사가 14일 오전 2시10분께 별세했다. 향년 94세.
2001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
고인은 여든 살을 넘긴 고령에도 건강을 유지했으나 2001년 11월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전남대병원과 광주 인광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해 왔고 최근 병세가 급속히 악화됐다.
1912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낸 뒤 학업에 대한 열망으로 스무살에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상공학교을 졸업해 귀국, 37세의 나이로 1948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중년의 나이로 한국전에 참전한 그는 휴전 이후 광주지법 판사, 광주고법, 대전지법 판사 등을 거친 뒤 1963년 인권변호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30여년간 고인은 양심수 무료 변론 등을 도맡으며 광주,전남 지역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1960-1970년대에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면서 시국사범의 변론을 도맡았으며 1980년 5.18 당시에는 일흔의 나이에 신군부에 체포돼 내란수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년7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일협정 움직임에 맞서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 활동을 펼쳤으며 '호남 푸대접 시정위원회',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등을 통해 반 군부독재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고인은 동시에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발언으로 문제가 된 전 국회의원 유옥우 사건을 필두로 학생, 문인, 정치인 등 양심수들을 위해 60건 이상의 무료 변론을 맡아 '법 보다는 양심'을 중시하는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다. 인권변호사 이돈명 선생은 "홍남순 변호사는 법조문으로 변론하기보다는 인간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양심과 정의로, 말보다는 몸 전체로 자신을 드러내 변론한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73년 전남대 <함성>지 사건, 1976년 3.1 구국선언, 1977년 시 '겨울공화국'으로 파면된 양성우 시인의 노예수첩 필화사건, 1978년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의 교육지표사건 등 30여건의 긴급조치법 위반 사건을 맡아 '긴급조치 전문변호사'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1980년대에도 신군부의 강압통치에 굴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과 5.18 명예회복에 앞장섰으며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가톨릭 인권상과 1986년 대한변호사회 인권상,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80년 5월 20일 서울을 출발, 다음날에야 광주에 도착해 '피의 화요일'을 목격한 그는 같은달 26일 16명의 수습위원들과 함께 계엄군에 맞서 소위 '죽음의 행진'에 나선 것 때문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년 7개월간 복역 뒤 다음해 12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죽음의 행진 당시 홍 변호사는 죽음 앞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 주위를 숙연케 했다.
70년대 반독재투쟁 이어 5.18광주 민주화운동 앞장서기도
석방된 뒤에도 그는 광주 구속자협회 회장, 5.18광주민중혁명기념사업 및 위령탑 건립추진위원장 등을 맡아 '끝나지 않은 5.18'의 진상규명과 시민들의 명예회복 활동에 전력했다.
이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는 피해보상을 신청하라는 주위의 권유에 "죽은 사람들에게 부끄럽다. 내가 한 것이 뭐가 있느냐"며 신청을 거부해 작년에야 뒤늦게 5.18 피해자로 인정되기도 했다.
특히 '광주 5.18 구속자협의회' 회장으로 추대된 후 군부 독재와 반민주에 맞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1988년에는 '광주민주항쟁'이라는 명칭이 '광주의거'로 바뀌는 데 핵심 역할을 했던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강연과 언론 기고를 통해 영.호남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2년 전에는 윤보선, 장준하 등과 고락을 함께 하며 인권 변호사 차원을 넘어 민주변호사로 활동해온 고인이 투병 중인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지인들이 그의 기개있는 삶을 한 데 모아 최초의 평전인 <영원한 재야 대인 홍남순>을 펴내기도 했다. 송기숙 전남대 교수는 고인을 "공군 감방에서 지켜본 홍 변호사는 갖은 협박과 구타 속에서도 결코 기죽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13-14대 국회의원을 지낸 홍기훈(53)씨를 포함해 기원, 원숙, 광숙, 기섭, 성욱, 영욱 등 5남2녀가 있고 부인은 윤이정씨는 1992년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은 광주시가 최근 조례로 정한 광주시 민주시민장으로 확정됐다.
2001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
고인은 여든 살을 넘긴 고령에도 건강을 유지했으나 2001년 11월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전남대병원과 광주 인광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해 왔고 최근 병세가 급속히 악화됐다.
1912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낸 뒤 학업에 대한 열망으로 스무살에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상공학교을 졸업해 귀국, 37세의 나이로 1948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중년의 나이로 한국전에 참전한 그는 휴전 이후 광주지법 판사, 광주고법, 대전지법 판사 등을 거친 뒤 1963년 인권변호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30여년간 고인은 양심수 무료 변론 등을 도맡으며 광주,전남 지역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1960-1970년대에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면서 시국사범의 변론을 도맡았으며 1980년 5.18 당시에는 일흔의 나이에 신군부에 체포돼 내란수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년7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일협정 움직임에 맞서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 활동을 펼쳤으며 '호남 푸대접 시정위원회',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등을 통해 반 군부독재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고인은 동시에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발언으로 문제가 된 전 국회의원 유옥우 사건을 필두로 학생, 문인, 정치인 등 양심수들을 위해 60건 이상의 무료 변론을 맡아 '법 보다는 양심'을 중시하는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다. 인권변호사 이돈명 선생은 "홍남순 변호사는 법조문으로 변론하기보다는 인간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양심과 정의로, 말보다는 몸 전체로 자신을 드러내 변론한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73년 전남대 <함성>지 사건, 1976년 3.1 구국선언, 1977년 시 '겨울공화국'으로 파면된 양성우 시인의 노예수첩 필화사건, 1978년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의 교육지표사건 등 30여건의 긴급조치법 위반 사건을 맡아 '긴급조치 전문변호사'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1980년대에도 신군부의 강압통치에 굴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과 5.18 명예회복에 앞장섰으며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가톨릭 인권상과 1986년 대한변호사회 인권상,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80년 5월 20일 서울을 출발, 다음날에야 광주에 도착해 '피의 화요일'을 목격한 그는 같은달 26일 16명의 수습위원들과 함께 계엄군에 맞서 소위 '죽음의 행진'에 나선 것 때문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년 7개월간 복역 뒤 다음해 12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죽음의 행진 당시 홍 변호사는 죽음 앞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 주위를 숙연케 했다.
70년대 반독재투쟁 이어 5.18광주 민주화운동 앞장서기도
석방된 뒤에도 그는 광주 구속자협회 회장, 5.18광주민중혁명기념사업 및 위령탑 건립추진위원장 등을 맡아 '끝나지 않은 5.18'의 진상규명과 시민들의 명예회복 활동에 전력했다.
이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는 피해보상을 신청하라는 주위의 권유에 "죽은 사람들에게 부끄럽다. 내가 한 것이 뭐가 있느냐"며 신청을 거부해 작년에야 뒤늦게 5.18 피해자로 인정되기도 했다.
특히 '광주 5.18 구속자협의회' 회장으로 추대된 후 군부 독재와 반민주에 맞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1988년에는 '광주민주항쟁'이라는 명칭이 '광주의거'로 바뀌는 데 핵심 역할을 했던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강연과 언론 기고를 통해 영.호남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2년 전에는 윤보선, 장준하 등과 고락을 함께 하며 인권 변호사 차원을 넘어 민주변호사로 활동해온 고인이 투병 중인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지인들이 그의 기개있는 삶을 한 데 모아 최초의 평전인 <영원한 재야 대인 홍남순>을 펴내기도 했다. 송기숙 전남대 교수는 고인을 "공군 감방에서 지켜본 홍 변호사는 갖은 협박과 구타 속에서도 결코 기죽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13-14대 국회의원을 지낸 홍기훈(53)씨를 포함해 기원, 원숙, 광숙, 기섭, 성욱, 영욱 등 5남2녀가 있고 부인은 윤이정씨는 1992년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은 광주시가 최근 조례로 정한 광주시 민주시민장으로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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