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없는 나의 얼굴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고등학교 1학년, 그림에 마냥 매혹되던 시절이었다. 머리 속에는 온통 그림밖에는 없었던 당시, 무던히도 그리고 또 그리던 때였다. 당시 3학년이던 미술반 선배 집에 놀러갔었다. 가장 좋아하던 형이자 그림 솜씨가 그야말로 최고였다. 지금도 나는 그 형이 그린 수채화를 잊지 못한다. 너무도 재주가 많은 선배였다. 하얀 피부에 창백한 안색, 병약해 보이던 눈, 약간 구부정한 채로 다소 인상적인 걸음을 걷던 형은 민음사에 나온 세계시인선집을 들고 다녔고 웃음이 맑았다.
수유리 어디였나. 허름한 형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이라며 얇은 화집 한 권을 보여주었다. 권옥연이었다. 당시 조악한 칼라인쇄의 카탈로그에 가까운 화집이었지만 순간 그 청회색 색조로 물든 인물그림은 그동안 보아오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형이 좋아해서인지 나 역시도 그 그림이 보는 순간부터 좋았다. 이후 지금까지 나는 권옥연의 그림을 좋아한다. 보면 더없이 반갑다. 무엇보다도 그 블루 색채가 마음에 든다. 어딘지 근사하고 저릿하며 아련하고 슬프고 더러 퇴폐적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좋아하는 색은 대부분 암청색계열, 약간 바랜 듯한 청색이다. 내 옷의 대부분은 블루다. 옷뿐 만이 아니다. 거의 모든 물건이 블루로 물들어있다.
일정한 시간이 흘러 권옥연 선생을 만났고 우리는 선생의 화실에서 이런저런 말들을 나눴다. 만두전골을 먹고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하다가 헤어졌다. 그러면 갑자기 그 선배의 얼굴이 환하게 떠오른다. 그림을 그렸으면 정말 뛰어난 작품을 했을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소식을 모른다.
권옥연의 인물그림을 그토록 좋아했던 나는 우연히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한 전시에서 그와 유사한 느낌을 주는 얼굴을 보았다. 청색이나 보라도 아니고 회색은 더구나 아닌, 아니 그 모든 것이 조금씩 뒤섞여서 뭉개진, 언어화할 수 없는 색명을 지닌 희뿌연 얼굴이 가까스로 출몰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권이나란 작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권옥연 선생의 따님이었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국내에서는 자주 보지 못한 그림이었다. 신기하고 희한했다.
명료한 형상을 지니지 못한 체 마냥 부유하는 색채와 선들이 그저 조심스레, 마지못해 흔들리고 있었다. 겨우 눈동자와 코, 입, 그리고 턱 선과 머리카락만이 감지된다. 하얀색 터치가 마치 손톱자국처럼 긁혀서 어렴픗이 형태를 잡아주는 그림, 그것을 얼굴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얼굴이 아니라고 부정하기 어려운 그런 안면이었다.
붓으로 그렸다기 보다는 자기 몸으로 파고 긁고 더듬어서 촉각적으로 만져놓은 그림이다. 여기서 그림의 표면은 마모된 석상이나 벽처럼 펼쳐져있다. 낡은 벽면을 긁어서 그 안에 잠긴 어떤 이미지를 발굴하는 그런 고고학적 느낌이다. 그것은 마치 돌의 표면을 쪼아 그 내부에 잠긴 상을 끌어내는 듯한 작업방식을 회화적으로 연출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렇게 권이나의 자화상을 보았다. 무척이나 음울하고 어두운, 그러면서도 어딘지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으로 뭉개진 얼굴, 자화상이었다. 슬퍼보인다고 할까. 물론 그것은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얼굴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편이다.
그녀가 그린 자화상을 다시 보았다. 약간 위쪽을 망연히 쳐다보는 눈이 흐릿하다. 초점을 잃은 눈, 무엇인가를 보는 것 같지만 실은 결국 내면을 응시하는 그런 깊은 눈, 세상 밖으로 내몰린 눈이지만 기어이 안으로만, 안으로만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눈, 결코 자신의 밖으로 나아가기 두려운 그런 눈이다. 얼굴을 이루는 모든 세부적인 것들은 다 지워졌다. 눈썹도 귀도 콧구멍도 입술윤곽도 없다. 귀도 없고 목도 없다. 사실 우리가 늙어가고 죽어간다는 것은 점차 얼굴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내 썩고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림 속에는 안면만이 빛에 의해 조금씩 명멸하듯이 빛난다. 어둠 속에서 조명에 의해 비로소 드러나는 얼굴처럼 마냥 위태롭다. 화면은 어둡고 침침한 색채로 덮여 있다가 흐릿한 거울의 표면을 손수건으로 닦아낼 때 그제서야 사물이 나타나는, 비춰지는 것처럼 어떤 얼굴 같은 것을 보여준다. 이내 사라질 듯 하다. 자잘한 상처 같은 자국들에 의해 얼굴이 희박하게나마 호명된다. 그렇게 어렵게, 가까스로 얼굴을 부른다.
그림은 그토록 간절한 요청이다. 보이지 않는 것, 보일 수 없는 것, 따라서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애써 불러내는 의식과도 같다. 그림 그리는 이들은 무당이다. 무당이 간절히 신을 불러내고 그들과 접신하고자 하듯이 그림 그리는 이들 역시 어떤 상을 절규한다. 그러나 그 상은 좀처럼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이미지는 불경스럽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거나 인간의 의지와 힘으로는 가닿기 어려운 영역에 속해 보인다. 그러나 화가들은 그 금기를 위반하고자 한다. 매번 절망하고 실패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매번 다시 그린다. 절망 속에서 또 다른 절망을 찾는 모순된 행동 속에서 그림은 이어진다. 지속된다.
권이나는 자신의 얼굴을 왜 이렇게 그렸을까? 있으면서 동시에 부재한 얼굴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얼굴이 도무지 안보인다. 아니 볼 수가 없다. 내 얼굴은 거울로는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너무 얇은 피부로 덮여있지만 그것이 진정 내 얼굴은 아닐 것이다. 그럼 얼굴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수유리 어디였나. 허름한 형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이라며 얇은 화집 한 권을 보여주었다. 권옥연이었다. 당시 조악한 칼라인쇄의 카탈로그에 가까운 화집이었지만 순간 그 청회색 색조로 물든 인물그림은 그동안 보아오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형이 좋아해서인지 나 역시도 그 그림이 보는 순간부터 좋았다. 이후 지금까지 나는 권옥연의 그림을 좋아한다. 보면 더없이 반갑다. 무엇보다도 그 블루 색채가 마음에 든다. 어딘지 근사하고 저릿하며 아련하고 슬프고 더러 퇴폐적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좋아하는 색은 대부분 암청색계열, 약간 바랜 듯한 청색이다. 내 옷의 대부분은 블루다. 옷뿐 만이 아니다. 거의 모든 물건이 블루로 물들어있다.
일정한 시간이 흘러 권옥연 선생을 만났고 우리는 선생의 화실에서 이런저런 말들을 나눴다. 만두전골을 먹고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하다가 헤어졌다. 그러면 갑자기 그 선배의 얼굴이 환하게 떠오른다. 그림을 그렸으면 정말 뛰어난 작품을 했을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소식을 모른다.
권옥연의 인물그림을 그토록 좋아했던 나는 우연히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한 전시에서 그와 유사한 느낌을 주는 얼굴을 보았다. 청색이나 보라도 아니고 회색은 더구나 아닌, 아니 그 모든 것이 조금씩 뒤섞여서 뭉개진, 언어화할 수 없는 색명을 지닌 희뿌연 얼굴이 가까스로 출몰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권이나란 작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권옥연 선생의 따님이었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국내에서는 자주 보지 못한 그림이었다. 신기하고 희한했다.
명료한 형상을 지니지 못한 체 마냥 부유하는 색채와 선들이 그저 조심스레, 마지못해 흔들리고 있었다. 겨우 눈동자와 코, 입, 그리고 턱 선과 머리카락만이 감지된다. 하얀색 터치가 마치 손톱자국처럼 긁혀서 어렴픗이 형태를 잡아주는 그림, 그것을 얼굴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얼굴이 아니라고 부정하기 어려운 그런 안면이었다.
붓으로 그렸다기 보다는 자기 몸으로 파고 긁고 더듬어서 촉각적으로 만져놓은 그림이다. 여기서 그림의 표면은 마모된 석상이나 벽처럼 펼쳐져있다. 낡은 벽면을 긁어서 그 안에 잠긴 어떤 이미지를 발굴하는 그런 고고학적 느낌이다. 그것은 마치 돌의 표면을 쪼아 그 내부에 잠긴 상을 끌어내는 듯한 작업방식을 회화적으로 연출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렇게 권이나의 자화상을 보았다. 무척이나 음울하고 어두운, 그러면서도 어딘지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으로 뭉개진 얼굴, 자화상이었다. 슬퍼보인다고 할까. 물론 그것은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얼굴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편이다.
그녀가 그린 자화상을 다시 보았다. 약간 위쪽을 망연히 쳐다보는 눈이 흐릿하다. 초점을 잃은 눈, 무엇인가를 보는 것 같지만 실은 결국 내면을 응시하는 그런 깊은 눈, 세상 밖으로 내몰린 눈이지만 기어이 안으로만, 안으로만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눈, 결코 자신의 밖으로 나아가기 두려운 그런 눈이다. 얼굴을 이루는 모든 세부적인 것들은 다 지워졌다. 눈썹도 귀도 콧구멍도 입술윤곽도 없다. 귀도 없고 목도 없다. 사실 우리가 늙어가고 죽어간다는 것은 점차 얼굴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내 썩고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림 속에는 안면만이 빛에 의해 조금씩 명멸하듯이 빛난다. 어둠 속에서 조명에 의해 비로소 드러나는 얼굴처럼 마냥 위태롭다. 화면은 어둡고 침침한 색채로 덮여 있다가 흐릿한 거울의 표면을 손수건으로 닦아낼 때 그제서야 사물이 나타나는, 비춰지는 것처럼 어떤 얼굴 같은 것을 보여준다. 이내 사라질 듯 하다. 자잘한 상처 같은 자국들에 의해 얼굴이 희박하게나마 호명된다. 그렇게 어렵게, 가까스로 얼굴을 부른다.
그림은 그토록 간절한 요청이다. 보이지 않는 것, 보일 수 없는 것, 따라서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애써 불러내는 의식과도 같다. 그림 그리는 이들은 무당이다. 무당이 간절히 신을 불러내고 그들과 접신하고자 하듯이 그림 그리는 이들 역시 어떤 상을 절규한다. 그러나 그 상은 좀처럼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이미지는 불경스럽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거나 인간의 의지와 힘으로는 가닿기 어려운 영역에 속해 보인다. 그러나 화가들은 그 금기를 위반하고자 한다. 매번 절망하고 실패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매번 다시 그린다. 절망 속에서 또 다른 절망을 찾는 모순된 행동 속에서 그림은 이어진다. 지속된다.
권이나는 자신의 얼굴을 왜 이렇게 그렸을까? 있으면서 동시에 부재한 얼굴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얼굴이 도무지 안보인다. 아니 볼 수가 없다. 내 얼굴은 거울로는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너무 얇은 피부로 덮여있지만 그것이 진정 내 얼굴은 아닐 것이다. 그럼 얼굴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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