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사내가 거울을 응시하다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모자를 쓰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는 이 그림(<자화상>, 45.5×33.4cm, 캔버스에 유채, 1974)은 임직순(1921-1996)의 작품이다. 임직순은 구상화가로서 특히 여인좌상, 소녀상으로 유명한 이다. 유명하다는 것은 그만큼 여인좌상, 소녀상을 즐겨 그렸고 누구보다도 잘 그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잘 그렸다는 것은 단지 형태나 묘사에 머물지 않고 그만의 탁월한 색채감각과 구성을 통해서 ‘수준 있는 회화’를 만들어냈다는 의미다.
임직순이 즐겨 그린 소녀는 대부분 꽃들이나 다양한 표정을 지닌 실내 기물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인물이 배경과 구별된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서기보다는 배경과 어울려 서로 공명하고 반향 하는 상당히 조화로운 관계에 놓여 있는 존재다. 이는 모델 개인의 특징이나 개성보다는 화면 전체의 조화, 어울림을 중요시한 까닭이다.
화가는 소녀나 꽃과 같은 소재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색채의 효과에 주목하여 이들 대상물에 빛을 투영시켜 높은 명도의 색감과 다양한 색채의 조화를 만들면서, 감상자에게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작품을 제작했다. 그 작품들은 비록 특정 소재에 국한되어 있는 엇비슷한 그림들이긴 하지만 풍부하고 깊이 있는 색채배합에서 큰 감동이 있다.
지극히 제한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변화무쌍하며 다채로운 색의 세계를 보여준 그의 그림은 색의 빛남과 진동으로 가득찬 빛의 세계로 구현된 것이며 과감한 배색 관계는 물론이고 섬세하고 탄탄한 필법을 통해 살려내는 풍요롭고 화려한 그림들이다. 그래서 나는 오지호, 도상봉, 임직순, 권옥연 등의 구상화를 좋아한다. 이미 거장들이지만 지금도 화랑가에 그들의 작품이 나오면 빼놓지 않고 보고 있다. 현대미술이 뿜어대는 그 현란하고 세련된 작품에 충혈된 눈이 문득 이 적조하고 평범해 보이는 구상화 안에서 생기를 되찾는 경우도 있다. 예술은 그런 의미에서 진보나 발전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영원한 문제와 반복적으로 씨름한다.
그림이라면 색채와 붓질, 화면구성과 색의 배치, 재현의 능력, 그리고 작가가 이해하고 파악한 아름다움을 만나는 일이다. 미술이 그것만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을 넘어서기도 힘들다. 점점 감동이 사라지고 울림이 없는 그림들에서 그나마 앞서 언급한 작가들이 작품은 위안을 준다. 그들의 그림은 한결같이 그들만이 품고 있는 개성적인, 인품화 된 형태의 도상과 특유의 색채가 빛을 낸다. 박수근 그림 역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한 개인의 개인성으로 가득한 그림이지만 색채는 헐벗은 편이다.
진한 밀도와 조화로운 색채구성을 탄력적인 붓질로 그려내는 임직순은 회화의 본질적인 요소를 천착해나가는 힘을 보여준다. 아마 이 작가는 자신의 화가로서의 소명이 그런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따라서 현대미술의 여러 사조나 이즘, 유행이나 급변하는 추이는 그와 별반 상관없는 것이었으리라.
그는 시류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체질과 성격 속에서 구상회화의 본질을 새롭게 추구해나간 작가로 기억된다. 그러니까 미술이 그 어디로 치달아가든 결코 변함없는, 변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고 보고 그 부분에 매진해나간 작가였다. 납작한 평면의 화면에 물감과 붓질, 그리고 색채를 통해 자신이 아름답다고 본 그 대상을 회화적으로 옮기는 일이 그에게 그림 그리는 일이고 화가의 임무다.
그에게 자연과 여자는 여전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대상이고 화가는 그것을 어떻게 화면에 안착시키느냐의 문제다. 그는 그 문제를 죽는 순간까지 끌고 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매일 아침 9시부터 12시,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항상 일정한 시간을 정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그래서 작품도 많이 남긴 작가다.
그런 그가 자화상을 그렸다. 얼마 전 열린 그의 작은 회고전에서 모자를 쓰고 자신을 바라보는 한 화가의 얼굴을 보았다. 전시장에서 유독 이 작품이 눈을 끌었다. 이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던 그림이지만 근래에 다시 보니 더욱 좋았다. 특유의 색채감각과 형태, 붓질이 녹아있는 작품이고 더욱이 그 자신을 차분하고 들여다보는 그 눈매가 좋았다. 작지만 큰 그림이다. 자연과 여자를 그토록 오래 보던 눈이 문득 자신의 얼굴, 중년의 늙어가는 얼굴을 보았다. 그의 나이 53세 때의 얼굴이다. 머리가 벗겨져서인지 모자를 얹혀놓고 거울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다소 비장한 모습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자기가 바라본 세계, 빛과 색채를 떠내던 그의 눈과 손이 이제 자기 얼굴로 안착되었다.
“나는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을 쳐다보게 되었다. 자화상을 그리기로 했다. 나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모자를 쓰니 어딘지 덥수룩한 인상이 소박하게 느껴졌다. 비가 오는 날, 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실내의 분위기와 더불어 이끼 낀 파리의 모습과 어울리는 것 같다.” (작가노트)
중년의 사내가 거울을 응시한다. 꽃과 여인, 자연을 응시하던 눈이, 그토록 예민한 눈이 자신에게로 와 부딪친다. 그에게 여자의 얼굴은 매혹적이며 끊임없는 예술적 정감을 불러일으켜 주었기에 그는 그들의 얼굴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얼굴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
어둡고 칙칙한 전체적인 색조 속에 얼굴부분만이 환하다. 통통한 얼굴, 굳게 다문 입술, 약간은 피곤한 듯한 눈망울이 인상적이다. 유사한 색조 속에 변화를 주는 솜씨, 감각적이면서도 거칠고 소박한 붓질, 자잘한 터치는 그림 보는 즐거움과 그만의 솜씨를 만끽시킨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임직순이 즐겨 그린 소녀는 대부분 꽃들이나 다양한 표정을 지닌 실내 기물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인물이 배경과 구별된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서기보다는 배경과 어울려 서로 공명하고 반향 하는 상당히 조화로운 관계에 놓여 있는 존재다. 이는 모델 개인의 특징이나 개성보다는 화면 전체의 조화, 어울림을 중요시한 까닭이다.
화가는 소녀나 꽃과 같은 소재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색채의 효과에 주목하여 이들 대상물에 빛을 투영시켜 높은 명도의 색감과 다양한 색채의 조화를 만들면서, 감상자에게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작품을 제작했다. 그 작품들은 비록 특정 소재에 국한되어 있는 엇비슷한 그림들이긴 하지만 풍부하고 깊이 있는 색채배합에서 큰 감동이 있다.
지극히 제한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변화무쌍하며 다채로운 색의 세계를 보여준 그의 그림은 색의 빛남과 진동으로 가득찬 빛의 세계로 구현된 것이며 과감한 배색 관계는 물론이고 섬세하고 탄탄한 필법을 통해 살려내는 풍요롭고 화려한 그림들이다. 그래서 나는 오지호, 도상봉, 임직순, 권옥연 등의 구상화를 좋아한다. 이미 거장들이지만 지금도 화랑가에 그들의 작품이 나오면 빼놓지 않고 보고 있다. 현대미술이 뿜어대는 그 현란하고 세련된 작품에 충혈된 눈이 문득 이 적조하고 평범해 보이는 구상화 안에서 생기를 되찾는 경우도 있다. 예술은 그런 의미에서 진보나 발전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영원한 문제와 반복적으로 씨름한다.
그림이라면 색채와 붓질, 화면구성과 색의 배치, 재현의 능력, 그리고 작가가 이해하고 파악한 아름다움을 만나는 일이다. 미술이 그것만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을 넘어서기도 힘들다. 점점 감동이 사라지고 울림이 없는 그림들에서 그나마 앞서 언급한 작가들이 작품은 위안을 준다. 그들의 그림은 한결같이 그들만이 품고 있는 개성적인, 인품화 된 형태의 도상과 특유의 색채가 빛을 낸다. 박수근 그림 역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한 개인의 개인성으로 가득한 그림이지만 색채는 헐벗은 편이다.
진한 밀도와 조화로운 색채구성을 탄력적인 붓질로 그려내는 임직순은 회화의 본질적인 요소를 천착해나가는 힘을 보여준다. 아마 이 작가는 자신의 화가로서의 소명이 그런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따라서 현대미술의 여러 사조나 이즘, 유행이나 급변하는 추이는 그와 별반 상관없는 것이었으리라.
그는 시류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체질과 성격 속에서 구상회화의 본질을 새롭게 추구해나간 작가로 기억된다. 그러니까 미술이 그 어디로 치달아가든 결코 변함없는, 변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고 보고 그 부분에 매진해나간 작가였다. 납작한 평면의 화면에 물감과 붓질, 그리고 색채를 통해 자신이 아름답다고 본 그 대상을 회화적으로 옮기는 일이 그에게 그림 그리는 일이고 화가의 임무다.
그에게 자연과 여자는 여전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대상이고 화가는 그것을 어떻게 화면에 안착시키느냐의 문제다. 그는 그 문제를 죽는 순간까지 끌고 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매일 아침 9시부터 12시,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항상 일정한 시간을 정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그래서 작품도 많이 남긴 작가다.
그런 그가 자화상을 그렸다. 얼마 전 열린 그의 작은 회고전에서 모자를 쓰고 자신을 바라보는 한 화가의 얼굴을 보았다. 전시장에서 유독 이 작품이 눈을 끌었다. 이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던 그림이지만 근래에 다시 보니 더욱 좋았다. 특유의 색채감각과 형태, 붓질이 녹아있는 작품이고 더욱이 그 자신을 차분하고 들여다보는 그 눈매가 좋았다. 작지만 큰 그림이다. 자연과 여자를 그토록 오래 보던 눈이 문득 자신의 얼굴, 중년의 늙어가는 얼굴을 보았다. 그의 나이 53세 때의 얼굴이다. 머리가 벗겨져서인지 모자를 얹혀놓고 거울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다소 비장한 모습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자기가 바라본 세계, 빛과 색채를 떠내던 그의 눈과 손이 이제 자기 얼굴로 안착되었다.
“나는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을 쳐다보게 되었다. 자화상을 그리기로 했다. 나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모자를 쓰니 어딘지 덥수룩한 인상이 소박하게 느껴졌다. 비가 오는 날, 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실내의 분위기와 더불어 이끼 낀 파리의 모습과 어울리는 것 같다.” (작가노트)
중년의 사내가 거울을 응시한다. 꽃과 여인, 자연을 응시하던 눈이, 그토록 예민한 눈이 자신에게로 와 부딪친다. 그에게 여자의 얼굴은 매혹적이며 끊임없는 예술적 정감을 불러일으켜 주었기에 그는 그들의 얼굴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얼굴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
어둡고 칙칙한 전체적인 색조 속에 얼굴부분만이 환하다. 통통한 얼굴, 굳게 다문 입술, 약간은 피곤한 듯한 눈망울이 인상적이다. 유사한 색조 속에 변화를 주는 솜씨, 감각적이면서도 거칠고 소박한 붓질, 자잘한 터치는 그림 보는 즐거움과 그만의 솜씨를 만끽시킨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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