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당하는 시대'의 우리 자화상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오랫동안 내 연구실 한 쪽 벽면에 결려있던 작품이다. 90년대 중반 작가의 개인전 때 구입했던, 아니 구입했다기 보다는 작가에게 거의 헐값에 얻은 작품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어쩐지 이 그림이 좋았다. 볼록렌즈에 걸려든 누군가의 몸이다. 실제 볼록렌즈처럼 그려진 화면은 사실 평평한 나무 판넬이다. 그 위에 유화물감으로 그렸다. 마치 대형마트나 백화점 어느 벽 위에 걸린 감시용 볼록렌즈를 연상시킨다. 누군가를 은밀히 엿보는 보이지 않는 감시의 시선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은 온통 그런 시선의 감시체계로 가득하고 그 시선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디를 가나 카메라라 작동해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죄다 바라보고 있다. 무서운 눈들이자 엄청난 시선의 권력이다. 누군가 나를 몰래 엿본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시선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나는 상대방을 보지 못하고 타자만이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그 타자의 시선에 종속된다는 뜻이다. 사르트르는 그런 나와 타자간의 시선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다시 그림을 보면 그 타자의 시선에 무척이나 불안해하는 얼굴을 만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평생 오로지 그 표정만 짓고 있었던 것만 같은 모자 쓴 이는 작가의 얼굴이다. 그러니까 민경숙 자신의 자화상이다. 여자인 작가는 남장차림으로 서 있다. 트랜스젠더인가?
글쎄 어느 순간 작가는 남자의 모습으로 거울에 서 있고 싶었나 보다. 타고난 생물학적인 성이 아닌 다른 성으로 살아가고 싶을 때도 더러 있을 것이다. 혹은 남성 속에 여성, 여성 속에 남성, 그러니까 자신의 성 안에 깃든 타자의 성을 문득 깨달을 때도 있다. 마치 여장을 하고 포즈를 취한 뒤샹의 자화상 사진이 떠오른다.
양복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시무룩하게 한쪽으로 고개를 기운 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있다. 마치 애국가를 들으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듯하다. 서슬 퍼런 공안정국이나 냉정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지금도 그닥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내 유년 시절에는 일정한 시간이 되면 길을 가다가도 멈춰 서서 어디론가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고 부동으로 서 있었던 때가 있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흘러나오고 길을 지나던 모든 이들은 홀연 정지해서 숨을 죽이고 허공을 바라보았던 그 광경이 환각처럼 스친다.
그림 속 작가는 너무 아픈 가슴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 같다. 가슴이 깨져서 구멍이 나있고 바닥에는 사금파리조각들이 몇 개 떨어져 있다. 유리 심장이 박살났다. 바닥에 흩어진 자근 유리 조각들은 한때 뜨겁게 박동 치던 심장이었을 것이다. 거울의 깨진 부분과 가슴이 조각난 부분을 절묘하게 잇대어놓았다. 그래서 흡사 거울의 표면이 균열이 갔고 그 거울에 모습을 비추던 이의 몸도 조각나 보이는 것 같다.
깨진 거울처럼 쨍하고 금이 간 모습이 흡사 나의 내적 성향과 존재의 실감을 그대로 재현해주는 것만 같아 헐값에 빼앗듯이 사버린 이 그림은 작가의 자화상이지만 어쩐지 내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좋다. 늘상 우울하고 힘들어하면서 겨우겨우 하루씩 버티면서 살아가는 모습이랄까, 수많은 내상에 시달리며 늘 우울해하는 얼굴이랄까 뭐 그런 모든 것들이 내 모습과 무척이나 유사하다.
민경숙은 '‘밀실공포증에 걸린 좀머 아저씨’를 지독히 좋아하고 대인공포증 같은 게 있으며 결벽증을 갖고 있다. 그리고는 오로지 이와 같은 자신의 자화상만을 수년 동안 그려왔다. 한결같이 청승맞고 과도하게 슬퍼 보이고 너무 예민하고 섬약한,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힘든 그런 자신의 얼굴을 오래도록 그렸다.
오래전 그의 작은 작업실에 간 기억이 난다. 좁고 긴 작업실은 너무 단촐했다. 선반, 테이블, 카세트라디오, 최승자 시집, 이젤 그리고 그림 몇 점이 놓여 있는 깔끔한 작업실이었고 순간 이병우의 기타연주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그곳에서 이 자화상을 만났다. 작가는 아침에 들어와 저녁까지 꼬박, 작고 밀폐된 감옥 같은 작업실에서 그렇게 우울한 자화상만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작업실을 빠져나올 때 이젤에 붙어 있던 작은 포스트 ?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다가가 보니 이런 문구가 아주 작게 쓰여 있었다. "그림을 사랑할 것, 그림 앞에 오래 앉아있을 것"
작가는 그저 그림 그리는 게 좋고 오랜 시간 그림 앞에 앉아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그림 그릴 때 제일 행복해하고 자기만의 그 조그만 공간에서 그림을 사랑하는 그런 순간에 족한 그런 사람이다. 외롭고 고독하지만 그걸 운명으로 알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 꼼지락거리면서 사는 자, 또 외롭고 고독하고 그래서 사는 게 늘 '엿'같지만 투덜대거나 늘상 입만 열면 외로와 죽겠다고 떠벌리지 않는, 그냥 묵묵히 그림만을 그리는 그리고 그 그림 안에 모든 게 다 들어 있는 그런 자세나 성향을 간직한 작가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은 오로지 그렇게 견디며 사는 자신의 모습뿐이다.
이 얼마나 지독한 ‘볼록거울에 갇힌’ 에고이스트, 나르시시스트일까?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어쩐지 이 그림이 좋았다. 볼록렌즈에 걸려든 누군가의 몸이다. 실제 볼록렌즈처럼 그려진 화면은 사실 평평한 나무 판넬이다. 그 위에 유화물감으로 그렸다. 마치 대형마트나 백화점 어느 벽 위에 걸린 감시용 볼록렌즈를 연상시킨다. 누군가를 은밀히 엿보는 보이지 않는 감시의 시선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은 온통 그런 시선의 감시체계로 가득하고 그 시선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디를 가나 카메라라 작동해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죄다 바라보고 있다. 무서운 눈들이자 엄청난 시선의 권력이다. 누군가 나를 몰래 엿본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시선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나는 상대방을 보지 못하고 타자만이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그 타자의 시선에 종속된다는 뜻이다. 사르트르는 그런 나와 타자간의 시선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다시 그림을 보면 그 타자의 시선에 무척이나 불안해하는 얼굴을 만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평생 오로지 그 표정만 짓고 있었던 것만 같은 모자 쓴 이는 작가의 얼굴이다. 그러니까 민경숙 자신의 자화상이다. 여자인 작가는 남장차림으로 서 있다. 트랜스젠더인가?
글쎄 어느 순간 작가는 남자의 모습으로 거울에 서 있고 싶었나 보다. 타고난 생물학적인 성이 아닌 다른 성으로 살아가고 싶을 때도 더러 있을 것이다. 혹은 남성 속에 여성, 여성 속에 남성, 그러니까 자신의 성 안에 깃든 타자의 성을 문득 깨달을 때도 있다. 마치 여장을 하고 포즈를 취한 뒤샹의 자화상 사진이 떠오른다.
양복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시무룩하게 한쪽으로 고개를 기운 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있다. 마치 애국가를 들으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듯하다. 서슬 퍼런 공안정국이나 냉정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지금도 그닥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내 유년 시절에는 일정한 시간이 되면 길을 가다가도 멈춰 서서 어디론가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고 부동으로 서 있었던 때가 있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흘러나오고 길을 지나던 모든 이들은 홀연 정지해서 숨을 죽이고 허공을 바라보았던 그 광경이 환각처럼 스친다.
그림 속 작가는 너무 아픈 가슴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 같다. 가슴이 깨져서 구멍이 나있고 바닥에는 사금파리조각들이 몇 개 떨어져 있다. 유리 심장이 박살났다. 바닥에 흩어진 자근 유리 조각들은 한때 뜨겁게 박동 치던 심장이었을 것이다. 거울의 깨진 부분과 가슴이 조각난 부분을 절묘하게 잇대어놓았다. 그래서 흡사 거울의 표면이 균열이 갔고 그 거울에 모습을 비추던 이의 몸도 조각나 보이는 것 같다.
깨진 거울처럼 쨍하고 금이 간 모습이 흡사 나의 내적 성향과 존재의 실감을 그대로 재현해주는 것만 같아 헐값에 빼앗듯이 사버린 이 그림은 작가의 자화상이지만 어쩐지 내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좋다. 늘상 우울하고 힘들어하면서 겨우겨우 하루씩 버티면서 살아가는 모습이랄까, 수많은 내상에 시달리며 늘 우울해하는 얼굴이랄까 뭐 그런 모든 것들이 내 모습과 무척이나 유사하다.
민경숙은 '‘밀실공포증에 걸린 좀머 아저씨’를 지독히 좋아하고 대인공포증 같은 게 있으며 결벽증을 갖고 있다. 그리고는 오로지 이와 같은 자신의 자화상만을 수년 동안 그려왔다. 한결같이 청승맞고 과도하게 슬퍼 보이고 너무 예민하고 섬약한,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힘든 그런 자신의 얼굴을 오래도록 그렸다.
오래전 그의 작은 작업실에 간 기억이 난다. 좁고 긴 작업실은 너무 단촐했다. 선반, 테이블, 카세트라디오, 최승자 시집, 이젤 그리고 그림 몇 점이 놓여 있는 깔끔한 작업실이었고 순간 이병우의 기타연주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그곳에서 이 자화상을 만났다. 작가는 아침에 들어와 저녁까지 꼬박, 작고 밀폐된 감옥 같은 작업실에서 그렇게 우울한 자화상만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작업실을 빠져나올 때 이젤에 붙어 있던 작은 포스트 ?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다가가 보니 이런 문구가 아주 작게 쓰여 있었다. "그림을 사랑할 것, 그림 앞에 오래 앉아있을 것"
작가는 그저 그림 그리는 게 좋고 오랜 시간 그림 앞에 앉아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그림 그릴 때 제일 행복해하고 자기만의 그 조그만 공간에서 그림을 사랑하는 그런 순간에 족한 그런 사람이다. 외롭고 고독하지만 그걸 운명으로 알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 꼼지락거리면서 사는 자, 또 외롭고 고독하고 그래서 사는 게 늘 '엿'같지만 투덜대거나 늘상 입만 열면 외로와 죽겠다고 떠벌리지 않는, 그냥 묵묵히 그림만을 그리는 그리고 그 그림 안에 모든 게 다 들어 있는 그런 자세나 성향을 간직한 작가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은 오로지 그렇게 견디며 사는 자신의 모습뿐이다.
이 얼마나 지독한 ‘볼록거울에 갇힌’ 에고이스트, 나르시시스트일까?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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