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나는 미스터리로 남길 바란다"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앤디 워홀은 자신에 대한 정보를 노출하기 지극히 꺼려한 채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이 신비스러운 존재로 남기를 원했던 것 같다.
“나는 미스터리로 남기를 바란다. 나는 결코 나의 배경이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서로 다른 답변을 한다.”
그래서일까, 워홀이 남긴 자화상 역시 모호한 인상을 준다. 그것은 분명 워홀이지만 실제 워홀이 아니라 인공적이며 이상한 워홀이다.
1966-67년도 사이에 제작된, 비교적 초기에 해당하는 이 자화상은 무표정한 체 손가락을 가볍게 입에 대고 있다. 벌어지는 입을 닫고 조용히 관조하는 자세다. 그는 침묵 속에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상념에 잠긴 듯한 이 같은 포즈는 실상 당시 할리우드 스타들의 전형적인 자세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스타만이 아니라 학자나 지식인, 유명인사들 역시 흔하게 짓던 상투화된 포즈다. 스테레오타입화 된 자세일 것이다.
알다시피 어린 시절부터 영화배우들에게 사진이나 자서전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쓰는 열성 영화팬이었던 워홀은 늘상 스타를 동경했다. 그는 스크린 속의 환상적 존재를 사랑한 것이다. 그것이 실제 사랑, 섹스를 대신했다. 실제 세계와의 구체적인 접촉이 아니라 오로지 바라보는 것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세계를 동경한 것이다.
그런데 모니터 속의 세계는 닿을 수 없는 완전한 이미지만의 환상으로 이루어진 존재, 스타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로지 표면으로만 존재한다.(그래서 그의 그림은 표면만을 납작하게 보여준다. 실크스크린기법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워홀은 자신이 스타와 동일한 존재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래서 그는 스타들이 모이는 식당을 찾아다녔고 그들과 사귀었으며 그들을 소재로 해서 작품을 했다. 이처럼 그는 미래가 미디어의 집중포화와 유명 인사들을 숭배하는 시대가 될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이다.
생각해보면 자화상이란 한 개인의 자아 탐구의 성격이 강했다. 인간의 외양과 정신, 성격까지 보여주는 것이 좋은 자화상의 조건이었고 그렇게 알고 있다. 많은 작가들이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욕구의 소산이기도 했다.
자화상이란 이렇듯 자아 탐구의 성격이 강하다. 그 얼굴은 분명 남과 다른 개성적이며 선명한 자아를 지닌 한 인간의 얼굴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나는 자화상이 그런 얼굴들이다. 그런데 워홀의 자화상은 좀 다르다.
일단 그는 거울 대신 사진을 매개로 작업을 했다. 그는 초상화 제작을 위해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얼굴을 찍은 후 이를 전문 인화소에 보내는데 여기서 이 사진들은 아세테이트 천 위에 인화되어 다시 워홀에게 되돌려 보내진다. 이때 워홀은 음영이 강한 대비만이 남겨지도록 중간 톤을 제거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은 결과는 얄팍한 껍질로서의 이미지다. 사진을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자화상은 지극히 추상적이다. 세부는 지워지고 윤곽과 극단적인 밝음과 어두움 그리고 인공의 허구적 색상이 피부색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화장을 하거나 가면을 쓴 것 같다. (사실 워홀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늘상 여드름 때문에 병원을 다녔으며 피부색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강렬한 명암의 교차 속에 얼굴은 나뉘어져있고 녹색과 핑크로 채워져 있다.
세부의 사실성을 말끔히 지워지고 강한 명암대조만이 남아있는 다분히 비현실적인 자화상이다. 명암과 허구적 색채만으로 자신을 철저히 은폐시키는 이 자화상은 얼굴이 있으면서도 있다고 하기 어려운 그런 자화상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강한 ‘자기은폐의 욕구’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신비스러운 존재, 스타로 각인시키고자 했다. 오로지 표면,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그런 얼굴이다. 다분히 수수께끼 같은 자화상이다.
따라서 그의 자화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내면이 아니라 기껏 표면일 뿐이다. 그 표면도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는 납작하고 표피적인 도상이나 기호에 가깝다. 그것은 내면을 탐구하려는 기존의 자화상들과 무척 다르다. 비교적 선명한 자아를 앞세운 자화상들과 다른 이상한 자화상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자화상이야말로 가장 포스트모던한 자화상인 셈이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나는 미스터리로 남기를 바란다. 나는 결코 나의 배경이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서로 다른 답변을 한다.”
그래서일까, 워홀이 남긴 자화상 역시 모호한 인상을 준다. 그것은 분명 워홀이지만 실제 워홀이 아니라 인공적이며 이상한 워홀이다.
1966-67년도 사이에 제작된, 비교적 초기에 해당하는 이 자화상은 무표정한 체 손가락을 가볍게 입에 대고 있다. 벌어지는 입을 닫고 조용히 관조하는 자세다. 그는 침묵 속에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상념에 잠긴 듯한 이 같은 포즈는 실상 당시 할리우드 스타들의 전형적인 자세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스타만이 아니라 학자나 지식인, 유명인사들 역시 흔하게 짓던 상투화된 포즈다. 스테레오타입화 된 자세일 것이다.
알다시피 어린 시절부터 영화배우들에게 사진이나 자서전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쓰는 열성 영화팬이었던 워홀은 늘상 스타를 동경했다. 그는 스크린 속의 환상적 존재를 사랑한 것이다. 그것이 실제 사랑, 섹스를 대신했다. 실제 세계와의 구체적인 접촉이 아니라 오로지 바라보는 것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세계를 동경한 것이다.
그런데 모니터 속의 세계는 닿을 수 없는 완전한 이미지만의 환상으로 이루어진 존재, 스타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로지 표면으로만 존재한다.(그래서 그의 그림은 표면만을 납작하게 보여준다. 실크스크린기법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워홀은 자신이 스타와 동일한 존재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래서 그는 스타들이 모이는 식당을 찾아다녔고 그들과 사귀었으며 그들을 소재로 해서 작품을 했다. 이처럼 그는 미래가 미디어의 집중포화와 유명 인사들을 숭배하는 시대가 될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이다.
생각해보면 자화상이란 한 개인의 자아 탐구의 성격이 강했다. 인간의 외양과 정신, 성격까지 보여주는 것이 좋은 자화상의 조건이었고 그렇게 알고 있다. 많은 작가들이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욕구의 소산이기도 했다.
자화상이란 이렇듯 자아 탐구의 성격이 강하다. 그 얼굴은 분명 남과 다른 개성적이며 선명한 자아를 지닌 한 인간의 얼굴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나는 자화상이 그런 얼굴들이다. 그런데 워홀의 자화상은 좀 다르다.
일단 그는 거울 대신 사진을 매개로 작업을 했다. 그는 초상화 제작을 위해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얼굴을 찍은 후 이를 전문 인화소에 보내는데 여기서 이 사진들은 아세테이트 천 위에 인화되어 다시 워홀에게 되돌려 보내진다. 이때 워홀은 음영이 강한 대비만이 남겨지도록 중간 톤을 제거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은 결과는 얄팍한 껍질로서의 이미지다. 사진을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자화상은 지극히 추상적이다. 세부는 지워지고 윤곽과 극단적인 밝음과 어두움 그리고 인공의 허구적 색상이 피부색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화장을 하거나 가면을 쓴 것 같다. (사실 워홀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늘상 여드름 때문에 병원을 다녔으며 피부색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강렬한 명암의 교차 속에 얼굴은 나뉘어져있고 녹색과 핑크로 채워져 있다.
세부의 사실성을 말끔히 지워지고 강한 명암대조만이 남아있는 다분히 비현실적인 자화상이다. 명암과 허구적 색채만으로 자신을 철저히 은폐시키는 이 자화상은 얼굴이 있으면서도 있다고 하기 어려운 그런 자화상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강한 ‘자기은폐의 욕구’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신비스러운 존재, 스타로 각인시키고자 했다. 오로지 표면,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그런 얼굴이다. 다분히 수수께끼 같은 자화상이다.
따라서 그의 자화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내면이 아니라 기껏 표면일 뿐이다. 그 표면도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는 납작하고 표피적인 도상이나 기호에 가깝다. 그것은 내면을 탐구하려는 기존의 자화상들과 무척 다르다. 비교적 선명한 자아를 앞세운 자화상들과 다른 이상한 자화상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자화상이야말로 가장 포스트모던한 자화상인 셈이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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