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 후발주자에 밀리는 원조 로펌들
[김진원의 로펌 이야기] <9> 김 · 장 · 리, 중앙국제, 김 · 신 & 유 퇴조
1958년 김흥한 변호사가 국내 최초로 로펌을 열어 국제 법무서비스를 시작하자 곧이어 두번째, 세번째 로펌이 잇따라 문을 열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하는 게 어려운 것이다.
먼저 이병호 변호사가 뒤를 이었다. 62년 미국 남감리교대(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 광화문에서 개인변호사 사무실을 낸 데 이어 68년 김창규 변리사와 함께 서울 서소문의 대한일보빌딩에서 중앙국제법률사무소를 열었다.
비슷한 무렵 나중에 '김 · 신 & 유'로 발전한 김진억 변호사의 국제변호사 사무실도 업무를 시작했다. 이병호 변호사가 중앙국제 간판을 올리기 1년전쯤이다.
국내 최대 로펌으로 발전한 김&장법률사무소가 문을 연 때는 이보다 5년뒤인 72년 12월. 그때로부터 5년 뒤인 77년 12월엔 법무법인 광장의 전신인 한미가 이태희 변호사에 의해 설립됐다.
이렇게 해서 70년대까지 기업 및 국제 법무서비스를 수행하는 모두 5개의 로펌이 업계에 둥지를 틀었다. 약 20년이 걸려 수는 얼마 안되지만 로펌 업계가 기반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중에서 중앙국제는 특허 분야에 특화한 특허 전문 법률사무소로 출발한 게 특징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전문 법률사무소(부띠크)로 시작한 셈인데,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특허 등 지적재산권 분야를 기반으로 국내 로펌업계를 주름잡은 굴지의 법률회사였다.
주요 로펌과 특허법률사무소에서 활약하고 있는 특허 전문 변호사와 내로라 하는 변리사의 상당수가 한때 중앙국제에 몸담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중앙국제의 화려했던 과거를 말해준다.
이병호 변호사가 61년 SMU로 유학갈 때의 얘기다.
서울민사지법 판사였던 그는 미 대사관에서 실시한 유학생 선발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본격적으로 유학을 준비중이었는데, 출국을 열흘 앞두고 5.16이 터져 판사들에게 유학을 가지 말라는 금지지시가 내려졌다. 이 변호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유학길에 올랐으나, 결국 이것이 문제돼 판사직을 사임하게 됐다고 한다.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92년 14대 대통령선거와 97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치에도 관심이 컸던 그의 강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변호사는 그러나 중앙국제가 특허 전문 로펌으로 성장하는 데 5.16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 무렵 본격화된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중앙국제의 발전과 맞아 떨어진 것이다. 외국의 기술과 자본이 유입되면서 특허 · 상표의 출원, 라이센스 계약, 특허 관련 소송 의뢰 등 많은 사건이 중앙국제에 쏟아져 들어왔다.
74년엔 우리 정부와 일본이 특허 등 보호조약을 맺으면서 특허 관련 법률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또한번 도약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런 배경을 엎고 중앙국제는 한때 직원이 3백50여명에 이를 만큼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많은 변호사들이 떠나면서 지금은 국내외 변호사 8명의 중소 로펌 정도로 규모와 위상이 축소되고 말았다. 이름도 법무법인 중앙으로 바꿨다. 25명의 상대적으로 많은 변리사가 특허 분야에서의 저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병호 변호사에 이어 국내 로펌업계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한 사람으로는 김진억, 김영무, 이태희 변호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국제변호사 업무도 더욱 활기를 띄게 됐다.
4년반 동안 서울민,형사지법 판사를 역임한 김진억 변호사는 미시건대 로스쿨에서 법학석사(LL.M.)학위를 받았다. 이때만 해도 LL.M.만으로는 외국인에게 미국변호사 시험이 개방되지 않아 미 변호사시험은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은 LL.M.만 있어도 뉴욕주 등의 변호사시험에 응시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LL.M.을 거쳐 미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있다.
김영무 변호사는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의 전신인 사법대학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시카고대 로스쿨을 거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미국 학생들과 똑같이 3년간의 법학박사 과정을 밟아 J.D.를 땄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미국변호사이기도 하다. 2년 정도 판사를 역임한 이태희 변호사도 하버드대 로스쿨의 J.D.출신이다.
이들은 특히 미국식의 로펌 또는 국제변호사 사무실을 염두에 두고 유학길에 올라 귀국후 곧바로 국제변호사 일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귀국후 국제변호사로 방향을 잡은 김흥한 변호사의 경우와는 좀 다른 것이다. 유학을 떠난 시기도 5.16 이후 국제변호사 일감이 쏟아지기 시작한 60년대 중반 이후다.
65년 사법대학원 교수 요원으로 뽑혀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태평양을 건넌 김진억 변호사는 "유학을 가기 전 이미 국제변호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흥한 변호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유학길에 오를 때의 원래 목적은 교수였지만, 나중에 변호사를 하게 되면 국제변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는 67년 미국에서 돌아와 사법대학원에서 6개월쯤 교수로 있었다. 그러나 사법대학원의 소속이 서울대에서 대법원으로 바뀌게 되자 교수직을 사퇴하고 본격적으로 국제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이때가 67년 10월. 한동안 '김 · 장 · 리'와 쌍벽을 이루며 국내 로펌업계를 선도한 '김 · 신 & 유'가 출범한 것이다.
일은 처음부터 쏟아져 들어 왔다고 한다. 여전히 외국 관련 일감에 비해 국제변호사가 턱없이 모자랄 때라 김흥한 변호사가 혼자 할 때 못지않게 바빴다는 게 김진억 변호사의 회고다.
"외국 회사를 대리할 만한 곳이 김흥한 변호사와 나 밖에 없었으니 사건이 몰릴 수 밖에요. 이해관계충돌(Conflict of Interests) 때문에 김흥한 변호사가 못하는 것을 내가 하고, 내가 못하는 것을 김 변호사가 하는 식으로 시장을 과점했다고 할 까요."
첫 고객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 BOA)'. 이미 체이스 맨해튼 은행을 대리하고 있는 '김 · 장 · 리'가 BOA까지 맡을 경우 두 은행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돼 교통정리를 이룬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어 많은 외국계 은행과 회사들이 '김 · 신 & 유'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유럽계 회사들을 고객 기업으로 많이 확보하고 있었던 게 '김 · 신 & 유'의 강점으로 꼽힌다. '김 · 신 & 유'의 이런 튼튼한 고객 기반은 지난해 1월 법무법인 화우와 합칠 때도 협상의 유리한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 신 & 유'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회사 이름에 성이 들어가는 네임 파트너(name partner)로 활약했던 신웅식 변호사다.
사법시험 3회 출신으로 예일대 법학박사(S.J.D.)이기도 한 신 변호사는 특히 70년대 이후 국내 건설업체들의 중동건설 붐이 일었을 때 중동 현지에 직접 사무소를 내고 법률사무를 본 것으로 유명하다. 91년 '김 · 신 & 유'를 나와 독립한 그는 얼마전부턴 중국법 · 북한법을 연구하며 이 지역에의 투자전문가로 맹활약하고 있다.
또 한명의 네임 파트너인 유록상 변호사는 70년 사법대학원을 마치지마자 김진억 변호사와 합류했다. 그는 보험 · 해상 분야의 손꼽히는 전문가로 통한다.
이런 '김 · 신 & 유' 였지만, 90년대 이후 변호사들이 탈퇴하며 더이상 대형 로펌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오히려 회사가 뒷걸음치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급기야 지난해 1월엔 법무법인 화우와 합치면서 국내에선 이름 조차 사라지게 됐다. 외국 기업들을 겨냥한 'YOON, YANG, KIM, SHIN & YU'라는 화우의 영어식 이름 뒷부분에 '김 · 신 & 유'의 이름이 남아있을 뿐이다. 김진억, 유록상 변호사는 화우의 고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선발 3사로 한동안 업계를 이끌었던 '김 · 장 · 리'와 중앙국제, '김 · 신 & 유' 가 후발주자들과의 경쟁에 밀려 후퇴의 길을 걸은 것은 국내 로펌업계의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교롭게도 세 로펌 모두 나중에 설립된 대형 로펌과의 합병을 통해 변신을 모색하거나, 중소 법무법인 수준에서 발전이 정체돼 버렸다.
그만큼 로펌간 경쟁은 치열하고, 고급 인재들의 집합체인 로펌의 경영이 쉽지 않다는 반증인 것이다.
역사가 쌓이면서 로펌간 이합집산이 반복되고, 일반 기업 못지않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는 게 국내 로펌업계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먼저 이병호 변호사가 뒤를 이었다. 62년 미국 남감리교대(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 광화문에서 개인변호사 사무실을 낸 데 이어 68년 김창규 변리사와 함께 서울 서소문의 대한일보빌딩에서 중앙국제법률사무소를 열었다.
비슷한 무렵 나중에 '김 · 신 & 유'로 발전한 김진억 변호사의 국제변호사 사무실도 업무를 시작했다. 이병호 변호사가 중앙국제 간판을 올리기 1년전쯤이다.
국내 최대 로펌으로 발전한 김&장법률사무소가 문을 연 때는 이보다 5년뒤인 72년 12월. 그때로부터 5년 뒤인 77년 12월엔 법무법인 광장의 전신인 한미가 이태희 변호사에 의해 설립됐다.
이렇게 해서 70년대까지 기업 및 국제 법무서비스를 수행하는 모두 5개의 로펌이 업계에 둥지를 틀었다. 약 20년이 걸려 수는 얼마 안되지만 로펌 업계가 기반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중에서 중앙국제는 특허 분야에 특화한 특허 전문 법률사무소로 출발한 게 특징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전문 법률사무소(부띠크)로 시작한 셈인데,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특허 등 지적재산권 분야를 기반으로 국내 로펌업계를 주름잡은 굴지의 법률회사였다.
주요 로펌과 특허법률사무소에서 활약하고 있는 특허 전문 변호사와 내로라 하는 변리사의 상당수가 한때 중앙국제에 몸담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중앙국제의 화려했던 과거를 말해준다.
이병호 변호사가 61년 SMU로 유학갈 때의 얘기다.
서울민사지법 판사였던 그는 미 대사관에서 실시한 유학생 선발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본격적으로 유학을 준비중이었는데, 출국을 열흘 앞두고 5.16이 터져 판사들에게 유학을 가지 말라는 금지지시가 내려졌다. 이 변호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유학길에 올랐으나, 결국 이것이 문제돼 판사직을 사임하게 됐다고 한다.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92년 14대 대통령선거와 97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치에도 관심이 컸던 그의 강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변호사는 그러나 중앙국제가 특허 전문 로펌으로 성장하는 데 5.16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 무렵 본격화된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중앙국제의 발전과 맞아 떨어진 것이다. 외국의 기술과 자본이 유입되면서 특허 · 상표의 출원, 라이센스 계약, 특허 관련 소송 의뢰 등 많은 사건이 중앙국제에 쏟아져 들어왔다.
74년엔 우리 정부와 일본이 특허 등 보호조약을 맺으면서 특허 관련 법률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또한번 도약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런 배경을 엎고 중앙국제는 한때 직원이 3백50여명에 이를 만큼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많은 변호사들이 떠나면서 지금은 국내외 변호사 8명의 중소 로펌 정도로 규모와 위상이 축소되고 말았다. 이름도 법무법인 중앙으로 바꿨다. 25명의 상대적으로 많은 변리사가 특허 분야에서의 저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병호 변호사에 이어 국내 로펌업계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한 사람으로는 김진억, 김영무, 이태희 변호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국제변호사 업무도 더욱 활기를 띄게 됐다.
4년반 동안 서울민,형사지법 판사를 역임한 김진억 변호사는 미시건대 로스쿨에서 법학석사(LL.M.)학위를 받았다. 이때만 해도 LL.M.만으로는 외국인에게 미국변호사 시험이 개방되지 않아 미 변호사시험은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은 LL.M.만 있어도 뉴욕주 등의 변호사시험에 응시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LL.M.을 거쳐 미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있다.
김영무 변호사는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의 전신인 사법대학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시카고대 로스쿨을 거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미국 학생들과 똑같이 3년간의 법학박사 과정을 밟아 J.D.를 땄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미국변호사이기도 하다. 2년 정도 판사를 역임한 이태희 변호사도 하버드대 로스쿨의 J.D.출신이다.
이들은 특히 미국식의 로펌 또는 국제변호사 사무실을 염두에 두고 유학길에 올라 귀국후 곧바로 국제변호사 일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귀국후 국제변호사로 방향을 잡은 김흥한 변호사의 경우와는 좀 다른 것이다. 유학을 떠난 시기도 5.16 이후 국제변호사 일감이 쏟아지기 시작한 60년대 중반 이후다.
65년 사법대학원 교수 요원으로 뽑혀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태평양을 건넌 김진억 변호사는 "유학을 가기 전 이미 국제변호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흥한 변호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유학길에 오를 때의 원래 목적은 교수였지만, 나중에 변호사를 하게 되면 국제변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는 67년 미국에서 돌아와 사법대학원에서 6개월쯤 교수로 있었다. 그러나 사법대학원의 소속이 서울대에서 대법원으로 바뀌게 되자 교수직을 사퇴하고 본격적으로 국제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이때가 67년 10월. 한동안 '김 · 장 · 리'와 쌍벽을 이루며 국내 로펌업계를 선도한 '김 · 신 & 유'가 출범한 것이다.
일은 처음부터 쏟아져 들어 왔다고 한다. 여전히 외국 관련 일감에 비해 국제변호사가 턱없이 모자랄 때라 김흥한 변호사가 혼자 할 때 못지않게 바빴다는 게 김진억 변호사의 회고다.
"외국 회사를 대리할 만한 곳이 김흥한 변호사와 나 밖에 없었으니 사건이 몰릴 수 밖에요. 이해관계충돌(Conflict of Interests) 때문에 김흥한 변호사가 못하는 것을 내가 하고, 내가 못하는 것을 김 변호사가 하는 식으로 시장을 과점했다고 할 까요."
첫 고객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 BOA)'. 이미 체이스 맨해튼 은행을 대리하고 있는 '김 · 장 · 리'가 BOA까지 맡을 경우 두 은행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돼 교통정리를 이룬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어 많은 외국계 은행과 회사들이 '김 · 신 & 유'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유럽계 회사들을 고객 기업으로 많이 확보하고 있었던 게 '김 · 신 & 유'의 강점으로 꼽힌다. '김 · 신 & 유'의 이런 튼튼한 고객 기반은 지난해 1월 법무법인 화우와 합칠 때도 협상의 유리한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 신 & 유'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회사 이름에 성이 들어가는 네임 파트너(name partner)로 활약했던 신웅식 변호사다.
사법시험 3회 출신으로 예일대 법학박사(S.J.D.)이기도 한 신 변호사는 특히 70년대 이후 국내 건설업체들의 중동건설 붐이 일었을 때 중동 현지에 직접 사무소를 내고 법률사무를 본 것으로 유명하다. 91년 '김 · 신 & 유'를 나와 독립한 그는 얼마전부턴 중국법 · 북한법을 연구하며 이 지역에의 투자전문가로 맹활약하고 있다.
또 한명의 네임 파트너인 유록상 변호사는 70년 사법대학원을 마치지마자 김진억 변호사와 합류했다. 그는 보험 · 해상 분야의 손꼽히는 전문가로 통한다.
이런 '김 · 신 & 유' 였지만, 90년대 이후 변호사들이 탈퇴하며 더이상 대형 로펌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오히려 회사가 뒷걸음치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급기야 지난해 1월엔 법무법인 화우와 합치면서 국내에선 이름 조차 사라지게 됐다. 외국 기업들을 겨냥한 'YOON, YANG, KIM, SHIN & YU'라는 화우의 영어식 이름 뒷부분에 '김 · 신 & 유'의 이름이 남아있을 뿐이다. 김진억, 유록상 변호사는 화우의 고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선발 3사로 한동안 업계를 이끌었던 '김 · 장 · 리'와 중앙국제, '김 · 신 & 유' 가 후발주자들과의 경쟁에 밀려 후퇴의 길을 걸은 것은 국내 로펌업계의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교롭게도 세 로펌 모두 나중에 설립된 대형 로펌과의 합병을 통해 변신을 모색하거나, 중소 법무법인 수준에서 발전이 정체돼 버렸다.
그만큼 로펌간 경쟁은 치열하고, 고급 인재들의 집합체인 로펌의 경영이 쉽지 않다는 반증인 것이다.
역사가 쌓이면서 로펌간 이합집산이 반복되고, 일반 기업 못지않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는 게 국내 로펌업계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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