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달러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뷰스칼럼> '2006년 미국' 됐다간 미국의 '저승친구'될 판
하지만 이번 주 개장과 동시에 달러는 곧바로 약세로 곤두박질쳤다. 세계은행의 로버트 졸릭 총재가 28일 "세계의 경제력은 이동중"이라며 "미국이 세계의 독점적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의 지위를 당연시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앞으로 다른 선택 폭이 늘어날 것"이라고 한마디 했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달러...흔들리는 세계
미 재무차관 출신인 졸릭의 한마디에 이날 일본, 중국, 한국 등 아시아증시는 곤두박질쳤다. 향후 달러화에 대한 이들 각국 환율이 강세를 보이면서, 수출에 적신호가 켜질 것이란 우려가 확산됐기 때문이다.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곳은 아시아 최대금융시장인 일본시장이었다. 이날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오전 한때 달러당 88.23엔까지 급락해 지난 1월23일이래 8개월래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닛케이평균주가지수 1만선이 장중 한때 붕괴되기도 했다. '엔고'가 현재 그나마 일본경제를 버팅기고 있는 수출에 큰 타격을 줄 것이란 우려에서다.
상하이지수도 지난주 말보다 75.32포인트(2.65%) 급락한 2,763.53에 거래를 마쳤다. 중국이 비록 환율통제 국가이긴 하나, 달러 약세의 여파로부터 궁극적으로 위안화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상하이지수는 이로써 지난 23일 2,900선이 무너진 후 4거래일 만에 다시 2,800선마저 내줬다.
한국의 코스피도 이날 외국인들이 사흘째 매도를 하면서 사흘째 하락했다. 그러나 원-달러 환율은 외국인들의 한국매도 여파로 전거래일보다 9.8원 오른 1,195.9원에 거래를 마쳤다. 일본 엔화와는 표면적으론 정반대 움직임이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이날 한국주식을 순매도한 이유가 한국도 달러 약세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 결과 외국인들이 주로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 수출대기업들이 타격을 입게 될 것이란 판단에 따른 것이란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일본과 차이가 없다.
달러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다
G20 정상회담이 열리기 2주 전인 지난 9일 오바마 미 대통령과 브라운 영국 총리는 회동 후 성명을 통해 "대규모 무역적자국은 수출을 늘리고, 흑자국은 수입을 늘리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말한 바 있다. 리먼브러더스 사태 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앵글로색슨 자본주의의 양대국 정상들이 노골적으로 '약한 달러' 정책을 시사하며 동아시아를 압박하고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 달러화는 미국이 '강한 달러' '약한 달러', 그 어떤 정책을 취하든 간에 이미 '약세'로 운명지어졌다. 미국의 올해 재정적자만 1조7천억달러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향후 10년간 해마다 평균 1조달러의 재정적자가 추가로 예상된다. 천문학적 재정적자 이자만 갚으려 해도 재정적자는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제국의 쇠락'은 이미 운명지어졌으며, 달러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터지면서 발생한 최대 아이러니는 '달러화 가치'의 초강세였다. 죽어도 준치라고, 미국발 위기로 세계가 금융공황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선 그래도 단기적으론 달러화가 안전자산이란 판단에서였다. 설상가상으로 한국 등, '달러 빚'이 많은 나라에서 달러화가 대거 유출되면서 달러 몸값은 더욱 치솟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언제까지 되풀이될 것이라 믿는 건 바보다. 2차, 3차 위기가 재연되면 달러화는 점점 헐값이 돼갈 게 분명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닥터 둠' 마크 파버가 말하듯 달러가치는 제로(0)가 되면서 미국은 파국적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인류의 세계사적 위기는 '한 권력'에서 '다른 권력'으로 이동할 때, 즉 '아노미적 상황' 하에서 발생하곤 했다는 점이다. 가깝게는 과거 1, 2차 세계대전이 그러했고, 동서고금의 역사를 봐도 그러했다. 국제금융계 일각에서는 멀지 않은 미래에 미국이 '디폴트' 선언을 하면서 세계경제가 공황적 위기에 직면할 것이란 전망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위기가 발생하는 시기는 향후 짧게는 5~10년, 길게는 20~30년 후가 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때가 오기 이전에 '달러의 저주'를 받아 도태할 나라들이 적잖이 나올 거라는 점이다.
주목되는 일본과 중국의 움직임
최근 옆나라들이 주목할만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선 일본의 하토야마 정권이 수출기업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엔화 강세'를 방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과도한 수출의존도를 줄이고 내수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선 '강한 엔화'가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엔화가 강세를 띄면 수입물가가 낮아져 내수경기 부양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더이상 일본이 수출주도로 가선 안되며 내수를 키워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도 요즘 주가 급락을 감수하면서까지 통화량을 줄이는 등 '자산거품 빼기'에 주력하고 있다. 부동산, 주가 등 자산거품에 의존한 성장은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제2의 미국'이 될 수 있다는 국가적 판단에 따른 조치다. 이와 함께 보유외환도 자원 매집 등을 통해 '비달러 자산'으로 분산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한국, '달러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단 한 곳, 한국만은 예외다. 자산거품이 확대재생산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재정이 급속악화되며 수출의존도가 나날이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나 중국처럼 '큰 걱정'을 하는 모습을 찾기 힘들다. 오죽하면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 "2009년의 한국은 2006년의 미국을 보는듯 하다"고 비아냥거릴 정도인가.
'달러의 저주'란 신조어가 있다. 미국과 함께 쇠락할 후보군을 가리킨다. 미국이 말할 때 혼자 망하지는 않을 것이란 의미다.
달러가 약세일 때 미국보다 튼실한 나라는 자국화폐가 강세가 돼야 정상이다. 올 3월 이후 한국은 그러했다. 그러기에 환차익을 노린 외국돈이 몰려들면서 주가도 급등했다. 하지만 한국이 <WSJ>가 비유했듯 '2006년의 미국'처럼 계속 비쳐진다면 돈의 흐름이 바뀌면서 한국은 경제도, 화폐도 미국과 동반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저승길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거시경제의 대가'로 불리는 정운찬 교수가 28일 어렵게 국무총리가 됐다. 정 신임총리가 정부 내에서 '샴페인 잔치' 대신 '찬물'을 한 컵씩 들이키게 하는 역할만 해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후일 받을 성싶다. 그가 앞으로 한국경제의 방향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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