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와 386의 차이(하)
[이덕일의 역사 직필] <2> 정국(靖國)공신과 사림파, 그리고 386
조광조와 사림의 민생개혁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이 민생과 무관한 이념문제만을 가지고 싸웠다면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진지 오래였을 것이다. 사림파는 성리학적 사회 질서 수립에 백성들의 민생 안정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농업국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민생문제는 토지문제였다. 이 무렵 훈구 공신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반면, 많은 농민들은 토지에서 유리되어 각지로 흩어져 민생경제가 파탄 상태에 도달했다. 조광조와 사림은 민생경제의 안정을 그 무엇보다 앞선 선결과제로 선정하고 토지제도 개혁을 주창했다.
이때 사림파가 주창한 토지제도 개혁방안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정전제(井田制)와 한전제(限田制)와 균전제(均田制)이다.
정전제는 동양사회의 이상적 토지제도로서 토지를 ‘우물 정(井)’ 자 형태로 아홉으로 나누어 여덟 가구가 하나씩 경작하고 가운데 하나는 공동 경작해 세금으로 내는 토지제도였다.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한 법이었다. 정전제가 실현불가능해지자 사림들은 중종 12년 타협책으로 한전제를 제시했는데, 이는 일종의 토지 소유 상한제였다. 균전제(均田制)는 일정한 토지를 국유화해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제도였다.
고도화된 산업국가인 현재와 달리 농업국가인 조선은 경자유전(耕者有田:농사를 짓는 자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뜻)의 원칙에 따라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면 농민생활은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토지소유자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래서 중종 13년(1518) 타협책으로 한전제가 실시되었다. 50결로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토지소유상한제였다. 또 미경작지에 대한 경작을 권유하는 권농책도 병행했다.
한전제가 별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형제 등의 명의로 얼마든지 50결 이상을 구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림파는 중종 14년(1519) 다시 균전제 실시를 주장했다. 사림파였던 시강관 기준(奇遵)은 중종에게 이렇게 주장했다.
“정전제는 실시하기 어렵지만 균전(均田)은 쉽사리 할 수 있습니다. 전토(田土)가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은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어, 이리저리 떠도는 것이 제도가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림은 노비 숫자의 제한도 주장했다. 이들이 노비 숫자 제한을 주장한 것은 단지 노비의 처지를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노비 숫자의 증가는 그만큼 납세 의무를 진 양민 숫자의 감소를 의미했다. 양민숫자를 늘리면 민생도 안정되고 자연히 국부(國富)도 증가하게 되어 있었다. 이런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림은 노비 숫자의 제한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균전제와 노비 숫자 제한은 모두 실패했다. 대토지소유자들이나 노비소유자들이 대부분 훈구 공신들로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림은 비록 중종의 신임으로 권력을 잡았으나 아직 소수파였다. 그래서 조광조의 사림은 조정 내에 자파를 신장시키는 한편 훈구 공신들에게 직접 칼을 대기로 했다.
현량과와 위훈삭제
조광조는 조정 내 사림파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중종 13년(1518) ‘초야에 묻힌 유일지사(遺逸之士)’의 발굴을 명분으로 현량과(賢良科)를 추진했다. 현량과란 추천에 의한 관료 선발제도로서 120명의 추천자 중 면접을 통해 28명을 급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조정에 한꺼번에 28명의 사림파가 충원됨으로써 사림의 기세는 한껏 올라갔다.
조광조가 정국공신들을 직접 제거하기 위한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한 것은 현량과 실시로 인한 자신감과 토지개혁 좌절에 따른 개혁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려는 전략이었다. 위훈삭제는 중종반정에 아무런 공이 없으면서 이런저런 연줄로 공신이 된 인물들의 훈작을 삭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중종과 조광조의 생각이 달랐다. 중종이 조광조를 중용한 목적은 왕권강화에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정치의 목적은 성리학에 입각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에 있었다. 왕권강화와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이라는 차이가 ‘위훈삭제’를 계기로 충돌한 것이었다.
중종 14년(1519) 대사헌 조광조는 대사간(大司諫) 이성동(李成童)과 함께 위훈삭제를 주장하는 계청을 올렸다. 아무런 공이 없이 공신이 된 인물들의 훈작을 삭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말 자체는 옳았지만 중종을 즉위시킨 세력은 사림파가 아니라 정국공신들이었다. 중종은 자신의 집권기반까지 손을 대자 주저했다. 사림파는 주저하는 중종을 압박해 117명의 정국공신 중 65%에 달하는 76명의 녹훈(錄勳)을 삭제함으로써 가장 큰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났던 것처럼 위훈삭제는 ‘나흘천하’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종과 훈구파의 결탁
조광조 제거를 위해 절치부심하던 훈구 공신들은 위훈삭제를 계기로 중종과 연합하는 데 성공했다. 중종이 훈구파 홍경주에게 내린 밀지에서, “정국공신은 다 나를 도와서 추대한 공이 있는데, 지금 4등을 공이 없다 하여 삭제하기를 청하니···(나중에는) 연산(燕山)을 마음대로 폐출한 죄로 논한다면, 경(卿) 등이 어육(魚肉)이 되고 다음에 나에게 미칠 것이다.”(『중종실록』 15년 4월 13일)라고 말한 것은 위훈삭제 추진에 대한 중종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중종의 특명으로 전격적으로 체포된 조광조는 국문에서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이라고 호소했으나 그 ‘임금의 마음’은 그를 죽이는 것이었다. 조광조뿐만 아니라 김정, 김식 등 다른 사림들도 목숨을 잃었으며 김구·이자 등 많은 사림파는 귀양 갔다. 그와 동시에 현량과는 폐지되고 소격서는 부활되었으며, 위훈삭제된 공신들은 다시 복훈되었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대간 전원을 교체시키며 화려하게 정계에 등장한 지 4년만에 처절한 배신과 실패로 끝난 개혁몽(改革夢)이었다.
조선의 사림과 현재의 386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그 자신이 사형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중요한 것은 그의 개혁방향이 잘못되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개혁방향은 옳았으나 중종을 비롯한 정국공신들의 힘이 더 강했던 것이 실패요인이었다. 현실은 그와 사림의 패배였지만 역사에서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 그가 사형 당한 1년 후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광조 등이 일을 행할 때 탄핵과 논박을 크게 하여 조정의 재상들이 주현(州縣)을 범할 수 없었고, 주현의 관리들도 역시 각기 스스로를 삼가니 백성들 사이에 침어(侵魚)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조정에서도 또한 뇌물을 쓰는 사람이 없어졌다.(『중종실록』, 15년 10월)"
조광조 등의 집권시절은 힘없는 백성들의 집권시절이었다. 아무리 힘없는 백성이라도 억울한 일을 호소하면 조광조와 사림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백성의 편을 들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조광조와 일체가 되었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법을 공평하게 행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복해서 그가 거리에 나갈 때면 매양 사람들이 그가 탄 말 앞에 늘어서서 ‘우리 상전(上典) 오셨다’라고 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이이는 상전은 속어로 그 주인을 부를 때 쓰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백성들은 조광조를 자발적인 상전으로 모시면서 그 개혁정치를 열렬히 지지했다. 이는 오늘날 386의 정치행위와 비교된다. 현재의 386은 조광조의 사림보다 훨씬 큰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행위에 일반 국민들이 환호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이런 점에서 386을 사림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386은 사림보다는 정국공신과 비교하는 것이 더 적당한지도 모른다. 정국공신들은 연산군의 폭정을 종식시킨 공은 있으나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성들에게 극복대상으로 전락했다. 또다른 권력집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386도 민생은 외면한 채 권력투쟁에만 전념하는 집단으로 각인된다는 점에서 정국공신과 비교되는 것이다.
조광조와 사림에 대해 퇴계 이황은 이렇게 평가했다.
“그(조광조)로 말미암아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알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나라 정치의 근본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때 사림들이 화를 입은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선생(조광조)이 도(道)를 드높이고 학문의 뜻을 확립한 공로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정암선생 문집』 행장(行狀) 〕”
조광조와 사림은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알게 했고’, ‘나라 정치의 근본이 더욱 드러나게’ 함으로써 역사에서 승리했던 것이다. 집권 386은 우리 사회, 우리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가? 386에게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5·31지방선거에서 나타났듯이 국민들이 그들을 극복대상으로 삼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종식시킨 정국공신들이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극복대상으로 전락한 것처럼 지금의 386이 처한 상황도 그 일보직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386에게 필요한 것은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훈장은 더 이상 누구의 존경도 받지 못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386은 선택해야 한다. 정국공신의 길을 걸을 것인지, 사림의 길을 걸을 것인지. 현실에서는 패배하더라도 역사에서는 승리하는 길을 걸을 것인지, 역사에서는 패배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승리하는 길을 걸을 것인지. 사림의 길이란 무엇이고 역사에서 승리하는 길이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바로 일반 백성들의 뜻에 부응하는 길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다.
필자 소개
숭실대학교 사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구실과 강단이라는 공간적 한계와 전문연구서라는 매체적 제약에서 벗어나 열린 가슴으로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과 함께 나누는 작업을 시도하여,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그가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 2》는 우리 사회가 어떤 역사서를 원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 책으로 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며, 수많은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거칠 것이 없어라:김종서 평전》, 《당쟁으로 보는 한국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누가 왕을 죽였는가》, 《유물로 보는 한국역사》등의 저서는 많은 독자들과 한국사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역사와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은폐된 조선조 사건을 철저한 고증으로 재현한 《운부 1,2,3》에서는 역사가가 완성한 역사소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그는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조선 명문가 사람으로, 부귀를 버리고 조국독립과 이상사회 실현에 일생을 바친 우당 이회영과 그의 동지들의 삶을 다루었으며,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300년 전 인물인 송시열 신화의 가면을 벗겨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학문적 깊이와 지적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인간 중심의 역사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이 민생과 무관한 이념문제만을 가지고 싸웠다면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진지 오래였을 것이다. 사림파는 성리학적 사회 질서 수립에 백성들의 민생 안정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농업국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민생문제는 토지문제였다. 이 무렵 훈구 공신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반면, 많은 농민들은 토지에서 유리되어 각지로 흩어져 민생경제가 파탄 상태에 도달했다. 조광조와 사림은 민생경제의 안정을 그 무엇보다 앞선 선결과제로 선정하고 토지제도 개혁을 주창했다.
이때 사림파가 주창한 토지제도 개혁방안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정전제(井田制)와 한전제(限田制)와 균전제(均田制)이다.
정전제는 동양사회의 이상적 토지제도로서 토지를 ‘우물 정(井)’ 자 형태로 아홉으로 나누어 여덟 가구가 하나씩 경작하고 가운데 하나는 공동 경작해 세금으로 내는 토지제도였다.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한 법이었다. 정전제가 실현불가능해지자 사림들은 중종 12년 타협책으로 한전제를 제시했는데, 이는 일종의 토지 소유 상한제였다. 균전제(均田制)는 일정한 토지를 국유화해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제도였다.
고도화된 산업국가인 현재와 달리 농업국가인 조선은 경자유전(耕者有田:농사를 짓는 자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뜻)의 원칙에 따라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면 농민생활은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토지소유자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래서 중종 13년(1518) 타협책으로 한전제가 실시되었다. 50결로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토지소유상한제였다. 또 미경작지에 대한 경작을 권유하는 권농책도 병행했다.
한전제가 별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형제 등의 명의로 얼마든지 50결 이상을 구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림파는 중종 14년(1519) 다시 균전제 실시를 주장했다. 사림파였던 시강관 기준(奇遵)은 중종에게 이렇게 주장했다.
“정전제는 실시하기 어렵지만 균전(均田)은 쉽사리 할 수 있습니다. 전토(田土)가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은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어, 이리저리 떠도는 것이 제도가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림은 노비 숫자의 제한도 주장했다. 이들이 노비 숫자 제한을 주장한 것은 단지 노비의 처지를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노비 숫자의 증가는 그만큼 납세 의무를 진 양민 숫자의 감소를 의미했다. 양민숫자를 늘리면 민생도 안정되고 자연히 국부(國富)도 증가하게 되어 있었다. 이런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림은 노비 숫자의 제한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균전제와 노비 숫자 제한은 모두 실패했다. 대토지소유자들이나 노비소유자들이 대부분 훈구 공신들로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림은 비록 중종의 신임으로 권력을 잡았으나 아직 소수파였다. 그래서 조광조의 사림은 조정 내에 자파를 신장시키는 한편 훈구 공신들에게 직접 칼을 대기로 했다.
현량과와 위훈삭제
조광조는 조정 내 사림파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중종 13년(1518) ‘초야에 묻힌 유일지사(遺逸之士)’의 발굴을 명분으로 현량과(賢良科)를 추진했다. 현량과란 추천에 의한 관료 선발제도로서 120명의 추천자 중 면접을 통해 28명을 급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조정에 한꺼번에 28명의 사림파가 충원됨으로써 사림의 기세는 한껏 올라갔다.
조광조가 정국공신들을 직접 제거하기 위한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한 것은 현량과 실시로 인한 자신감과 토지개혁 좌절에 따른 개혁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려는 전략이었다. 위훈삭제는 중종반정에 아무런 공이 없으면서 이런저런 연줄로 공신이 된 인물들의 훈작을 삭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중종과 조광조의 생각이 달랐다. 중종이 조광조를 중용한 목적은 왕권강화에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정치의 목적은 성리학에 입각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에 있었다. 왕권강화와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이라는 차이가 ‘위훈삭제’를 계기로 충돌한 것이었다.
중종 14년(1519) 대사헌 조광조는 대사간(大司諫) 이성동(李成童)과 함께 위훈삭제를 주장하는 계청을 올렸다. 아무런 공이 없이 공신이 된 인물들의 훈작을 삭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말 자체는 옳았지만 중종을 즉위시킨 세력은 사림파가 아니라 정국공신들이었다. 중종은 자신의 집권기반까지 손을 대자 주저했다. 사림파는 주저하는 중종을 압박해 117명의 정국공신 중 65%에 달하는 76명의 녹훈(錄勳)을 삭제함으로써 가장 큰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났던 것처럼 위훈삭제는 ‘나흘천하’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종과 훈구파의 결탁
조광조 제거를 위해 절치부심하던 훈구 공신들은 위훈삭제를 계기로 중종과 연합하는 데 성공했다. 중종이 훈구파 홍경주에게 내린 밀지에서, “정국공신은 다 나를 도와서 추대한 공이 있는데, 지금 4등을 공이 없다 하여 삭제하기를 청하니···(나중에는) 연산(燕山)을 마음대로 폐출한 죄로 논한다면, 경(卿) 등이 어육(魚肉)이 되고 다음에 나에게 미칠 것이다.”(『중종실록』 15년 4월 13일)라고 말한 것은 위훈삭제 추진에 대한 중종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중종의 특명으로 전격적으로 체포된 조광조는 국문에서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이라고 호소했으나 그 ‘임금의 마음’은 그를 죽이는 것이었다. 조광조뿐만 아니라 김정, 김식 등 다른 사림들도 목숨을 잃었으며 김구·이자 등 많은 사림파는 귀양 갔다. 그와 동시에 현량과는 폐지되고 소격서는 부활되었으며, 위훈삭제된 공신들은 다시 복훈되었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대간 전원을 교체시키며 화려하게 정계에 등장한 지 4년만에 처절한 배신과 실패로 끝난 개혁몽(改革夢)이었다.
조선의 사림과 현재의 386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그 자신이 사형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중요한 것은 그의 개혁방향이 잘못되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개혁방향은 옳았으나 중종을 비롯한 정국공신들의 힘이 더 강했던 것이 실패요인이었다. 현실은 그와 사림의 패배였지만 역사에서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 그가 사형 당한 1년 후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광조 등이 일을 행할 때 탄핵과 논박을 크게 하여 조정의 재상들이 주현(州縣)을 범할 수 없었고, 주현의 관리들도 역시 각기 스스로를 삼가니 백성들 사이에 침어(侵魚)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조정에서도 또한 뇌물을 쓰는 사람이 없어졌다.(『중종실록』, 15년 10월)"
조광조 등의 집권시절은 힘없는 백성들의 집권시절이었다. 아무리 힘없는 백성이라도 억울한 일을 호소하면 조광조와 사림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백성의 편을 들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조광조와 일체가 되었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법을 공평하게 행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복해서 그가 거리에 나갈 때면 매양 사람들이 그가 탄 말 앞에 늘어서서 ‘우리 상전(上典) 오셨다’라고 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이이는 상전은 속어로 그 주인을 부를 때 쓰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백성들은 조광조를 자발적인 상전으로 모시면서 그 개혁정치를 열렬히 지지했다. 이는 오늘날 386의 정치행위와 비교된다. 현재의 386은 조광조의 사림보다 훨씬 큰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행위에 일반 국민들이 환호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이런 점에서 386을 사림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386은 사림보다는 정국공신과 비교하는 것이 더 적당한지도 모른다. 정국공신들은 연산군의 폭정을 종식시킨 공은 있으나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성들에게 극복대상으로 전락했다. 또다른 권력집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386도 민생은 외면한 채 권력투쟁에만 전념하는 집단으로 각인된다는 점에서 정국공신과 비교되는 것이다.
조광조와 사림에 대해 퇴계 이황은 이렇게 평가했다.
“그(조광조)로 말미암아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알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나라 정치의 근본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때 사림들이 화를 입은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선생(조광조)이 도(道)를 드높이고 학문의 뜻을 확립한 공로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정암선생 문집』 행장(行狀) 〕”
조광조와 사림은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알게 했고’, ‘나라 정치의 근본이 더욱 드러나게’ 함으로써 역사에서 승리했던 것이다. 집권 386은 우리 사회, 우리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가? 386에게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5·31지방선거에서 나타났듯이 국민들이 그들을 극복대상으로 삼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종식시킨 정국공신들이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극복대상으로 전락한 것처럼 지금의 386이 처한 상황도 그 일보직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386에게 필요한 것은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훈장은 더 이상 누구의 존경도 받지 못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386은 선택해야 한다. 정국공신의 길을 걸을 것인지, 사림의 길을 걸을 것인지. 현실에서는 패배하더라도 역사에서는 승리하는 길을 걸을 것인지, 역사에서는 패배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승리하는 길을 걸을 것인지. 사림의 길이란 무엇이고 역사에서 승리하는 길이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바로 일반 백성들의 뜻에 부응하는 길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다.
필자 소개
숭실대학교 사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구실과 강단이라는 공간적 한계와 전문연구서라는 매체적 제약에서 벗어나 열린 가슴으로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과 함께 나누는 작업을 시도하여,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그가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 2》는 우리 사회가 어떤 역사서를 원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 책으로 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며, 수많은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거칠 것이 없어라:김종서 평전》, 《당쟁으로 보는 한국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누가 왕을 죽였는가》, 《유물로 보는 한국역사》등의 저서는 많은 독자들과 한국사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역사와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은폐된 조선조 사건을 철저한 고증으로 재현한 《운부 1,2,3》에서는 역사가가 완성한 역사소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그는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조선 명문가 사람으로, 부귀를 버리고 조국독립과 이상사회 실현에 일생을 바친 우당 이회영과 그의 동지들의 삶을 다루었으며,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300년 전 인물인 송시열 신화의 가면을 벗겨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학문적 깊이와 지적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인간 중심의 역사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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