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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와 386의 차이(상)

[이덕일의 역사 직필] <1> 정국(靖國)공신과 사림파, 그리고 386

“사실(史實)을 뒤집어보면 진실이 보인다.”
역사대중화에 앞장서는 역사평론가 이덕일 박사가 평소 자주하는 말이다. 4천여권의 방대한 원사료를 보유하고 있는 이 박사는 사회적 이슈가 생겨나면 곧바로 원사료를 찾아 과거가 오늘에 주는 교훈을 지적한다. 그가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오늘의 필요에서 역사를 재해석하고 뒤집어보기 때문일 것이다. <뷰스앤뉴스>는 앞으로 이덕일 박사의 역사 직필(直筆)을 연재하는 동시에, 이 박사가 계획하고 있는 역사강좌도 지상중계할 계획이다. <편집자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차이점

연산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정치집단은 사림(士林)이었다. 사화(士禍)라는 말도 사림이 화를 입었다는 뜻이니 그 피해를 짐작할만 하다.

조선 4대 사화 중 첫 번째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1498) 발생했다. 무오사화는 사관(史官)들이 주로 화를 입었다고 해서 사화(史禍)라고도 불린다. 김종직의 제자였던 사관 김일손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발생했다. 항우(項羽)에게 죽은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조의제문」에서 의제는 단종을, 항우는 수양대군, 즉 세조를 의미하는데 수양대군의 즉위를 부인하는 역사관의 표출이었다. 이는 연산군에게 체제부정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결과 큰 사화가 발생한 것이었다. 김일손과 ·권오복·권경우는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사를 당하고 강겸·이목·허반 등은 목이 잘리는 참형(斬刑)을 당했는데, 이것이 무오사화였다. 무오사화에서 화를 입은 인물들은 김종직의 제자들인 신진 사림들이었다.

무오사화를 계기로 연산군의 왕권은 대폭 강화되었다.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임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강화된 권력으로 6년 후에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갑자사화는 잘 알려져 있듯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죽음과 관련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죽음에 신진 사림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 죽음에 관련 있는 인물들은 오히려 사림과는 적대세력인 훈구 공신들이었다.

연산군은 이미 죽은 한명회·정창손 등 세조 때의 훈구 공신들의 시신까지 파헤쳐 목을 베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무오사화 때 귀양 간 나머지 사림들까지 연루시켜 목을 베었다. 무오사화가 사림만이 화를 입었다면, 갑자사화는 훈구 공신들과 사림파 모두가 화를 입은 것이었다. 갑자사화는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까지 화를 입었다. 연산군은 갑자사화로 사림뿐만 아니라 훈구공신들까지도 적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갑자사화와 무오사화의 차이점이었다.

정국공신, 탄생하다

사대부 모두를 적으로 돌린 연산군은 결국 재위 12년(1506) 9월 중종반정으로 쫓겨나는데 반정의 주역은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 이른바 ‘반정 3대장’이었다. 이들 반정 3대장은 모두 훈구 공신 계열이었다.

박원종의 부친 박중선(朴仲善)은 적개·익대·좌리공신에 잇따라 책봉된 훈구 공신으로서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의 장인이었다. 월산대군의 부인이었던 박원종의 누이는 연산군의 아이를 임신한 후 자살했다고 『연산군일기』는 전하고 있다. 박원종은 이에 격분해 반정을 주도한 것이었다. 성희안과 유순정도 모두 훈구 공신 계열이었다.

반정 주도세력들은 반정 성공 직후 공신을 책봉했는데, 이들이 바로 '정국(靖國)공신'들이다.

정국공신들의 성격은 좀 복잡하다. 훈구 공신계열이면서 연산군의 폭정을 종식시킨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연산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림은 중종반정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따라서 연산군의 폭정에 초점을 맞추면 오히려 정국공신들이 민주화 주도세력이 되는 것이다.

정국공신은 당초 101명이었으나 이런 저런 사정이 개입해 117명으로 늘어났다. 반정에 아무런 공이 없으나 반정 주도세력들과의 친분 때문에 공신이 된 인물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국공신 확대는 공신 집단의 지지기반을 늘리기 위한 의도도 들어 있었다.

중종이 조광조를 중용한 이유

중종은 반정 때 아무 공을 세우지 못했다. 반정 당일 자신의 집을 에워싼 군사들이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보낸 군사인지, 반정 주역들이 자신을 임금으로 추대하기 위해 보낸 군사인지 모를 정도였다. 심지어 자신의 부인 신씨가 반정 세력이 때려죽인 신수근의 딸이란 이유만으로 쫓겨나는 것도 막지 못했다. “조강지처를 어떻게 내쫓겠는가?”라는 한마디가 중종이 했던 항의의 전부였다. 억울하게 쫓겨난 부인 신씨가 중종을 그리워하며 인왕산에 치마를 내건다고 해서 치마바위 전설이 생길 정도로 힘없는 임금이 중종이었다.

중종 때의 정국은 반정 3대장으로 대표되는 정국(靖國)공신들이 주도했다. 중종은 이런 정치지형을 바꾸기를 원했다. 중종 8년(1513) 무렵 이들 3대장이 모두 사망하자 중종은 그 공백을 사림으로 메워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사림들이 훈구 공신들의 전횡을 견제해 주기를 바란 것이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풍운의 선비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였다.

정암 조광조 선생의 초생화


자파라도 공격하는 조광조의 원칙

조광조는 중종 10년(1515) 이조판서 안당(安&#29805;)의 추천으로 서른 살 나이로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가 되었을 때 이미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중종실록』의 사관(史官)은 “(조광조가) 장성해서는 성리학에 잠심해 자기의 말을 실행하고 행동은 예법을 준수하니, 한때의 유사(儒士)들이 애모하여 따라서 교유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일급인사였다. 그의 천거는 이런 인망의 결과였으나 그는 천거에 만족하지 않고 그해 8월 실시된 문과 전시(殿試)에 응시해 급제했다. 음직으로 관직에 진출하기보다 자신의 실력으로 진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급제한 조광조는 언론과 간쟁을 맡은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사간원과 사헌부를 대간(臺諫)이라고 하는데 대간에는 사림이나 사림에 우호적인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그가 이런 대간의 일원으로 합류했을 때 조정의 현안은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의 공동상소 문제로 시끄러웠다. 중종이 내외의 의견을 듣겠다며 구언(求言)하자 박상과 김정은 상소를 올려 왕비문제를 거론했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사망해 새 왕비를 간택해야 했는데, 박상과 김정은 새 왕비를 간택하지 말고 중종반정 직후 폐출된 중종의 첫부인 신씨(愼氏)를 복위시키자고 주장해 큰 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문제로 정국은 크게 분열되었다.

그런데 간쟁을 맡은 대간(臺諫)들이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주장한 것이 조광조의 분노를 샀다. 이들은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반대해 언로(言路)를 보호해야 하는데 둘의 처벌을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같은 편이라도 원칙에서 어긋나면 용서할 수 없다는 추상같은 자세였다. 조광조는 "재상(宰相)이 이들을 벌하려 해도 대간은 마땅히 이들을 변호해야 하는데 도리어 탄핵에 가세했다"며 대간 전원 교체를 요구했다.

이로써 신씨 복위 파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단숨에 전세가 뒤바뀌었다. 비록 신씨의 왕비 복귀는 실패했지만 대간 전원도 교체되었다.

같은 세력인 대간들도 거침없이 탄핵한 조광조의 자세는 현재의 386과 비교된다. 그간 386이 보여주었던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원칙 잃은 자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는지는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원칙이 사라지면 자신의 입장만 남고, 보편성이 훼손된다. 보편성의 훼손은 명분의 상실을 가져온다. 그렇게 되면 개혁은 자신의 이익 실현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마는데 조광조는 원칙 잃은 자파를 공격함으로써 원칙을 살리고 명분을 얻은 것이다.

조광조의 개혁정치의 목적은 조선을 성리학적 사회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중요했다. 하나는 왕실을 비롯한 조정부터 성리학적 모범을 보여야 하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민생이 안정되어야 했다.

조광조는 대궐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악(雅樂) 연주자를 여악(女樂)에서 남악(男樂)으로 대치하고, 불교적 성격의 기신재(忌晨齋)와 도교적 성격의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다. 그는 조정의 모든 분야를 성리학적 질서로 개편하려 했다. 기신재와 소격서 혁파는 왕실의 반발을 받았다. 기신재와 소격서는 모두 왕실의 안녕을 하늘에 비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왕실에서는 두 기구를 없앨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광조 등 사림파는 왕실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밀어부쳤고 결국 혁파에 성공했다. 조광조는 철학에 관한 문제는 국왕에게도 양보하지 않았다. <계속>

필자 소개

이덕일

숭실대학교 사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구실과 강단이라는 공간적 한계와 전문연구서라는 매체적 제약에서 벗어나 열린 가슴으로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과 함께 나누는 작업을 시도하여,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그가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 2》는 우리 사회가 어떤 역사서를 원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 책으로 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며, 수많은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거칠 것이 없어라:김종서 평전》, 《당쟁으로 보는 한국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누가 왕을 죽였는가》, 《유물로 보는 한국역사》등의 저서는 많은 독자들과 한국사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역사와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은폐된 조선조 사건을 철저한 고증으로 재현한 《운부 1,2,3》에서는 역사가가 완성한 역사소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그는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조선 명문가 사람으로, 부귀를 버리고 조국독립과 이상사회 실현에 일생을 바친 우당 이회영과 그의 동지들의 삶을 다루었으며,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300년 전 인물인 송시열 신화의 가면을 벗겨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학문적 깊이와 지적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인간 중심의 역사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댓글이 6 개 있습니다.

  • 16 24
    역사메니아

    이덕일과 이이화의 차이도 함 써봐야지,,^^
    역사에 재미를 붙이고 나서 이덕일님의 책은 거의 다 구입하고 읽었지요.
    좋아했던 분인데 어느 날부터 조또일보에 기고하더군요..
    띠용~~~~~~했지요..ㅋㅋ
    이이화님의 책도 제법 읽었습니다.
    이덕일과 이이화의 차이점도 흥미진진하지 않겠어요? ㅋㅋㅋ

  • 23 27
    거목

    이러한 거목이 여기에
    이덕일 필자가 이름없는 온라인신문에 기고하는걸 보니
    뷰스앤뉴스의 무게가 느껴진다.
    자주 나타난다면 수위도 높아질거다.

  • 20 23
    열성 팬

    자주 써주세용
    이덕일씨의 책은 모조리 읽었다. 나도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글을 읽는 사람이다.조선일보는 지면이 작았는데 여기는 운동장이니 맘껏 써주셨으면 좋겠네요. 맘껏 읽어보게 말씨.

  • 31 22
    오상희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이덕일의 역사 직필"에서 선뜻 동의하기 힘든 내용이 있네요..
    ....같은 세력인 대간들도 거침없이 탄핵한 조광조의 자세는 현재의 386과 비교된다. 그간 386이 보여주었던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원칙 잃은 자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는지는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386 세력이 언제 저런 "원칙 잃은 자세"를 보였죠?....
    제가 한동안 먹고사니즘에 쫓겨서 정치기사를 잘 못봤습니다..(2003년, 2004년)
    저는 386이 저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별로 듣지 못했습니다..
    이○○의원의 군대면제용 "손가락 절단"을 말하는건가요?...
    아니면 차떼기에 비해서 10%정도밖에 안되는 비자금을 말하는건가요?..
    아시는 분이 가르쳐 주세요....

  • 19 25
    대단

    뷰스앤뉴스 대단하다.이덕일씨를 모시다니
    기대하겟슴다.자주 좀 써주세요.이덕일 씨를 따라다니며 글을 읽는 사람이 족히 몇만은 될겁니다.

  • 20 25

    기대합니다
    흠...제목부터 매우 흥미롭습니다..읽기전 글부터 남기기도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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