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마지막 '옹기장이' 정영균
[한국의 뉴파워] <5> "아버지와 일할 땐 나는 아직 건아꾼이다"
‘건아’ 혹은 ‘건해’란 옹기나 도자기하는 사람들의 용어다. 물레를 돌려 옹기를 빚는 과정의 허드렛일을 통틀어 하는 말이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을 건아꾼 혹은 건해꾼이라고 한다.
건아꾼이 하는 일을 일일이 설명하자면 숨이 찰 정도다. 우선 산에서 흙을 파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 그 흙을 정제해 옹장이나 도공이 물레질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놓고, 성형이 끝난 그릇은 물레에서 옮겨 유약을 칠할 때까지 말리고, 유약이 칠해지면 다시 가마로 옮기며, 구워진 그릇들을 가마에서 꺼내오는 일 모두가 건아꾼이 해야 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빛은 안 나면서 힘만 드는 일이다.
요즘 건아꾼이란 말은 듣기 어렵다. 수백 수천에 이르던 옹기 만드는 곳이 10여 곳으로 줄었다. 게다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기 싫어하는 풍조에 누가 그런 일을 하려하겠는가. 대신 분업화된 시스템이 생겼고 또 기계가 건아꾼의 일을 대신한다. 산에서 힘들게 파오던 흙도 기업적으로 가공하는 사람이 있어 그로부터 사서 쓴다. 발로 일일이 흙을 밟아 다지던 일도 모터 달린 기계가 몇 사람이 종일 할 일을 불과 몇 분 만에 해치운다. 나머지 허드렛일도 자신이 하든가 일용 잡부를 고용하면 끝이다. 건아꾼이란 말도 봉건적 도제제도 시절의 이야기로 멀어져 가고 있다.
건아꾼의 노하우를 살린 흙의 예술가
그러나 지금도 스스로를 건아꾼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전남 강진의 정영균(40) 씨다. 칠량봉황 옹기로 유명한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정윤석(67) 씨의 셋째 아들로, 대를 이어 옹기는 만드는 신세대 옹기장이다.
우리나라에는 칠량봉황 옹기 이외에도 전남 벌교의 징광 옹기, 무안의 몽탄 옹기 등 대를 이어 옹기를 만드는 집안이 있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곳이 칠량봉황 옹기인데, 그 곳의 실질적인 운영자이기도 하다.
“이제 국내에 옹기장으로서 기능을 완전히 익힌 젊은 옹기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 씨는 나이 마흔도 안 돼 더 배울 것이 없는 진정한 옹기장이 됐습니다.”
전남 강진군청의 관계자는 말처럼 정 씨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이 바닥에서는 젊은이에 속한다. 그만큼 이쪽 일이 오랜 경험과 노력과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에 시작하려는 사람도 그 일에 지속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러나 정 씨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제야 옹기 빚는 일이 얼마나 신나고 창의적인 일인지 알 것 같다고 한다. 기존의 옹기 빚는 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들을 하면서 옹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단다.
정영균 씨의 가장 큰 장점이자 경쟁력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도예가 이희순(52)씨는 그 무엇보다 기본이 탄탄하다는 점과 도예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작업하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도예는 흙과 유약과 불을 다루는 예술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나마도 모두 분업화돼 세 가지를 두루 꿰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 씨는 다릅니다. 어려서부터 몸으로 세 가지를 다 익혔습니다. 국내에 그만한 기능을 모두 다 갖춘 도예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정 씨는 도자기로 못 쓰는 흙이 없고, 못 쓰는 유약이 없는 ‘흙의 예술가’로 통한다. 강진은 도자기에 좋은 흙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씨가 쓰는 흙은 그 좋은 흙뿐만 아니다. 그의 흙 창고에는 수십 가지 재료가 쌓여 있고, 이를 이용하면 수백, 수천 가지의 흙과 유약이 나온다. 심지어는 아무도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바닷가 개펄 흙까지 재료로 쓴다. 고운 흙 속에 섞인 염분은 색다른 효과를 내는 유약이 된다. 일부러 만드는 소금유약의 효과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 그가 스스로를 건아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아버지 정윤석 씨가 물레 앞에 앉으면 그는 어쩔 수 없이 건아꾼이 될 수밖에 없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아버지 정 씨는 아직도 정정하다. 칠량봉황 옹기의 실질적인 운영은 아들 영균 씨가 맡아 하지만, 지금도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옹기의 70%는 아버지의 작품이다. 그러니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충실한 건아꾼일 뿐이다.
청소년 시절 이미 흙을 다룰 줄 알았던 타고난 옹기장이
건아꾼으로 그의 경력은 한참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 아들 가운데 막내였던 그는 철들면서부터 건아꾼이 되었다. 위의 두 형은 아버지의 사업에 눈도 뜨기 전 고향을 떴다. 큰형은 초등학교를 마친 후 진학을 위해 광주로 갔고, 둘째 형도 같은 이유로 어릴 때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 그러나 정 씨는 달랐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향과 강진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강진을 떠난 것은 한국인이면 피할 수 없는 군 복무 기간 3년과 2000년대 초반 장인으로 독립을 해보겠다며 이천에서 자신의 작업실을 운영한 3년이 전부다. 그러나 3년의 일탈 역시 이미 옹기장으로 그의 경력이 결정된 이후의 일이다. 아버지와의 동업자로서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끈이 이미 굳게 이어진 이후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흙을 개고 독을 만들고 유약을 칠하고 불을 땔 때도 항상 아버지 옆에 붙어 있었다. 위의 두 아들에게는 시키지 않은 일을 아버지는 항상 막내에게 맡겼다. 정 씨는 방학 때만 잠깐 얼굴을 내미는 두 형과 달리 거의 매일 아버지의 잔심부름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어려서부터 체구가 건장한 탓에 흙을 나르는 일이나 무거운 독을 옮기는 일이 그리 버겁지도 않았다.
‘서당 개 3년이면 글을 읽는다’고 했던가. 아버지 일을 거들면서 자연스럽게 흙 만지는 일을 배워갔다. 아버지가 정식으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깨 너머 배운 것으로 옹기며 생활 소품들을 만들었다.
그는 처음 자신이 옹기장이 된 것이 군을 제대한 1993년 이후라고 했다. 하지만 학생시절 만들었다는 옹기 흉상 소조는 흙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기량이 배어 있다. 그는 청소년 시절 이미 훌륭한 옹기장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옹기를 만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옹기를 만드는 사실조차도 숨기려 했다. 단지 아버지를 돕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돕는 일개 건아꾼이고자 했다. 그리고 지금도 아버지와 일할 때는 옹기장이 아니라 건아꾼인 것이다.
직업의 귀천을 갈라놓은 ‘청자의 곡선’과 ‘비색의 신비’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건아꾼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더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엔 그의 개인사와 가족사, 옹기와 도자기의 고향인 강진의 역사가 남긴 그늘이 있다.
요즘 강진은 청자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2번 국도를 타고 영암을 거쳐 이 고을로 들어서면 도로변 1백여m 산비탈의 숲을 통째로 깎아 만든 매병문양을 만날 수 있는데, 이는 강진사람들의 청자에 대한 자부심을 위압적으로 표현한 상징물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도요지 가운데 절반이 이곳 강진에 있었다고 하니 미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강진은 원래 옹기의 고장이다. 고려청자의 맥은 이미 끊긴 지 오래여서 1970년대 이전에는 관심도 끌지 못했다. 대신 이 지방의 좋은 흙은 명품 옹기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역사를 알기 어려울 만큼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옹기를 했다. 정영균 씨의 칠량봉황 마을은 수십 가구의 주민 전체가 옹기로 먹고 살았다. 옹기를 만들거나 옹기를 배로 실어 나르거나 파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일이었다.
봉황마을은 강진 읍내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남으로 가다 칠량면 경계를 넘어서 샛길로 좌회전 한 번, 우회전 두 번을 해야 들어설 수 있는 탐진만(灣) 바닷가. 육지를 쐐기처럼 파고 든 탐진만은 그 입구를 완도와 고금도, 신지도 등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거대한 호수처럼 물결이 잔잔하고 평화롭다. 그 바다는 들물 때 수면이 해안도로의 턱까지 차오른다. 그 바다를 통해 칠량의 옹기는 전라남도 전역으로 또 제주도로, 멀리는 서울까지 팔려나갔다. 마을 전체가 옹기로 흥청대던 것이 70년대까지다.
그러나 이 고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너무도 순식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플라스틱과 아파트는 옹기의 설자리를 휩쓸어 갔다. 수요가 격감하면서 마을은 황폐해졌다. 단지를 실어 나르던 돛단배는 자취를 감췄고 연기를 뿜던 가마들은 무너져 내렸다.
이 시기 강진에는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서해안에 청자 보물선이 발견되고, 강진의 고려 가마터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자 박정희 정부가 청자 복원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이다. 이웃 마량면의 현재 청자박물관에 청자 도요지가 복원되고 청자를 복원하는 도예가도 대거 탄생했다. 이 사업에 정치적 색채가 짙게 깔리면서 청자 복원지 공사 인부를 하다 연줄을 대어 도예가가 된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상황이 변하자 옹기를 하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도자기로 방향을 바꿨다. 수 백 년 이어온 이 지방의 특산품을 만드는 일은 이제 천한 ‘장이’의 일이 됐다. 대신 천여 년 전에 쓰다가 사라진 역사적 복제품을 만드는 것은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고귀한 예술작업이 됐다. 세상인심은 그렇게 변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변신의 재주가 없었다. 결국 강진에서 그 천한 일을 끝까지 놓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됐다. 덕분에 설움도 많이 겪었다. 그도 겪었고 그의 아들까지 상처를 받았다.
“생각해 보세요. 제 키만한 큰 독을 만드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손바닥만한 조그만 그릇을 만드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그런데도 쉬운 일하는 사람은 귀해지고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은 천해지니 기가 막히는 일 아닙니까.”
정영균 씨는 사람들이 말하는 ‘청자의 곡선’과 ‘비색의 신비’가 직업의 귀천을 갈라놓는 정치적 수사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해도 그릇 형태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새파란 젊은 친구가 청자를 한다고 거드름을 피우며 수십 년 경력의 장인인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도예에 대해 가르치겠다는 모습을 보며 자란 그는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더욱 답답하게 한 것은 그런 상황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자세였다.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그것에 대항 못하는 아버지를 보며 그는 반항과 방황으로 사춘기를 보냈다. 특히 고교 시절 진로를 잡지 못하고 ‘문제아’가 됐다. 강진에서 두 곳의 고등학교를 오며 가며 했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죽어라 일해도 대접을 못 받는 그런 삶은 싫었다. 신체가 건장해 주먹 세계에서도 유혹과 압력이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막살고 싶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의 방황이 끝난 것은 군대를 마치고였다. 아무리 싫다고 발버둥 쳐도 그는 타고난 옹기장이였다. 옹기를 버리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 제가 가업을 이어가겠습니다.”
어렵사리 말을 꺼낸 그는 아버지의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같이 옹기를 하려면 하지 마라. 옹기를 하려거든 제대로 해라.”
그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시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능력보다 학력이 인정받는 세상에 대한 한이자 서러움이었다.
그는 아버지 말대로 제대로 된 옹기 공부를 해야겠다고 맘먹었다. 그러나 기술적으론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학계에 있다는 사람들은 정 씨의 뛰어난 기량을 인정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부 못한 장이’이라며 배척했다.
결국 그는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 밑에서 건아꾼 일을 하면서 어깨 넘어 배운 것을 응용해 흙을, 유약을 그리고 불길을 연구했다. 이천에서 3년간 자신의 공방을 운영하면서 아버지에게서 배우지 않은 자기 공부를 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누구의 비법을 전수받는 게 아니라 그만의 비법을 만들어갔다.
옹기는 반드시 산에서 파온 흙으로 빚어야 한다는 생각도 버렸다. 스스로 산에서, 개펄에서 흙을 가져와 그 흙으로 그릇을 빚고 유약을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흙은 그의 작품의 재료가 되었다. 그의 집 창고엔 수십, 수백 가지 흙과 유약을 만들 재료가 쌓였다. 덕분에 청자만 고집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도예가로 평판을 얻게 됐다. 청자 도예가보다 비색을 잘 내고 더 우아한 곡선을 빚는 옹기장이로 명성이 났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묵묵히 해온 허드렛일이 원천이 되었다. 기본에 충실했던 것이 새로운 응용의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지금도 스스로를 건아꾼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기존의 틀을 깨고 자기와 옹기를 접목시키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청자를 빚는 도예가보다 독과 시루를 빚는 옹기장이가 더 귀해지고 있다. 옹기 가격도 만만치 않다. 물론 시중에 싸구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제품은 옹기가 아니다. 옹기처럼 생긴 수입품은 재료부터 제작과정까지 다르다. 당연히 ‘웰빙 저장고’라는 한국 옹기의 기능을 갖추지 못한다. 대신 뼈대 있는 옹장이 제대로 만든 옹기는 수십 만 원은 너끈히 나갈 만큼 비싸졌다.
강진에 도예 작업장은 널렸지만 옹기 동막은 정영균 씨의 칠량봉황 옹기가 유일하다. 그는 수백 년 동안 명맥이 끊어졌던 강진 청자의 전통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것이 없다고 한다. 대신 그 이상의 세월을 이어온 강진 옹기의 전통은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다.
그는 요즘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자기와 옹기를 넘나들며 그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고 있다. 땅 생김새가 봉황이 날개를 편 형국이라는 칠량면 봉황마을 바닷가가 그의 작업실이자 일터다. 담벼락에는 거대한 독들이 줄을 섰다. 형태도 유약도 새로운 것들이다.
요즘은 지름 2m에 가까운 거대한 수조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작업을 하던 그는 강진 옹기의 전통을 이어가는 옹기장이요, 그 작업을 위해 허드렛일도 마다 않는 건아꾼이란 생각이 우선이다.
청자는 강진의 자랑이다. 그러나 수백 년 끊긴 역사의 맥을 인위적으로 이어 붙인 청자가 우리세대의 예술에, 생활에 얼마나 적응했을까. 과연 문화재 복제품 이상의 어떤 의미를 확보하고 있을까. 하지만 청자의 맥이 끊겼던 수백 년 동안에도 옹기는 여전히 우리 생활 속에 스며들어 삶의 일부로 진화해왔다. 그 옹기장의 유일한 적손이 된 정영균 씨야말로 강진 문화의 살아 있는 전통이자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는 멋진 신세대 옹기장이이다.
필자 소개
최미현: 생활도예가(blog.naver.com/mimiscraft).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작업실 클레이인플레이 운영
건아꾼이 하는 일을 일일이 설명하자면 숨이 찰 정도다. 우선 산에서 흙을 파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 그 흙을 정제해 옹장이나 도공이 물레질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놓고, 성형이 끝난 그릇은 물레에서 옮겨 유약을 칠할 때까지 말리고, 유약이 칠해지면 다시 가마로 옮기며, 구워진 그릇들을 가마에서 꺼내오는 일 모두가 건아꾼이 해야 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빛은 안 나면서 힘만 드는 일이다.
요즘 건아꾼이란 말은 듣기 어렵다. 수백 수천에 이르던 옹기 만드는 곳이 10여 곳으로 줄었다. 게다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기 싫어하는 풍조에 누가 그런 일을 하려하겠는가. 대신 분업화된 시스템이 생겼고 또 기계가 건아꾼의 일을 대신한다. 산에서 힘들게 파오던 흙도 기업적으로 가공하는 사람이 있어 그로부터 사서 쓴다. 발로 일일이 흙을 밟아 다지던 일도 모터 달린 기계가 몇 사람이 종일 할 일을 불과 몇 분 만에 해치운다. 나머지 허드렛일도 자신이 하든가 일용 잡부를 고용하면 끝이다. 건아꾼이란 말도 봉건적 도제제도 시절의 이야기로 멀어져 가고 있다.
건아꾼의 노하우를 살린 흙의 예술가
그러나 지금도 스스로를 건아꾼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전남 강진의 정영균(40) 씨다. 칠량봉황 옹기로 유명한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정윤석(67) 씨의 셋째 아들로, 대를 이어 옹기는 만드는 신세대 옹기장이다.
우리나라에는 칠량봉황 옹기 이외에도 전남 벌교의 징광 옹기, 무안의 몽탄 옹기 등 대를 이어 옹기를 만드는 집안이 있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곳이 칠량봉황 옹기인데, 그 곳의 실질적인 운영자이기도 하다.
“이제 국내에 옹기장으로서 기능을 완전히 익힌 젊은 옹기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 씨는 나이 마흔도 안 돼 더 배울 것이 없는 진정한 옹기장이 됐습니다.”
전남 강진군청의 관계자는 말처럼 정 씨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이 바닥에서는 젊은이에 속한다. 그만큼 이쪽 일이 오랜 경험과 노력과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에 시작하려는 사람도 그 일에 지속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러나 정 씨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제야 옹기 빚는 일이 얼마나 신나고 창의적인 일인지 알 것 같다고 한다. 기존의 옹기 빚는 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들을 하면서 옹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단다.
정영균 씨의 가장 큰 장점이자 경쟁력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도예가 이희순(52)씨는 그 무엇보다 기본이 탄탄하다는 점과 도예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작업하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도예는 흙과 유약과 불을 다루는 예술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나마도 모두 분업화돼 세 가지를 두루 꿰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 씨는 다릅니다. 어려서부터 몸으로 세 가지를 다 익혔습니다. 국내에 그만한 기능을 모두 다 갖춘 도예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정 씨는 도자기로 못 쓰는 흙이 없고, 못 쓰는 유약이 없는 ‘흙의 예술가’로 통한다. 강진은 도자기에 좋은 흙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씨가 쓰는 흙은 그 좋은 흙뿐만 아니다. 그의 흙 창고에는 수십 가지 재료가 쌓여 있고, 이를 이용하면 수백, 수천 가지의 흙과 유약이 나온다. 심지어는 아무도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바닷가 개펄 흙까지 재료로 쓴다. 고운 흙 속에 섞인 염분은 색다른 효과를 내는 유약이 된다. 일부러 만드는 소금유약의 효과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 그가 스스로를 건아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아버지 정윤석 씨가 물레 앞에 앉으면 그는 어쩔 수 없이 건아꾼이 될 수밖에 없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아버지 정 씨는 아직도 정정하다. 칠량봉황 옹기의 실질적인 운영은 아들 영균 씨가 맡아 하지만, 지금도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옹기의 70%는 아버지의 작품이다. 그러니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충실한 건아꾼일 뿐이다.
청소년 시절 이미 흙을 다룰 줄 알았던 타고난 옹기장이
건아꾼으로 그의 경력은 한참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 아들 가운데 막내였던 그는 철들면서부터 건아꾼이 되었다. 위의 두 형은 아버지의 사업에 눈도 뜨기 전 고향을 떴다. 큰형은 초등학교를 마친 후 진학을 위해 광주로 갔고, 둘째 형도 같은 이유로 어릴 때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 그러나 정 씨는 달랐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향과 강진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강진을 떠난 것은 한국인이면 피할 수 없는 군 복무 기간 3년과 2000년대 초반 장인으로 독립을 해보겠다며 이천에서 자신의 작업실을 운영한 3년이 전부다. 그러나 3년의 일탈 역시 이미 옹기장으로 그의 경력이 결정된 이후의 일이다. 아버지와의 동업자로서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끈이 이미 굳게 이어진 이후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흙을 개고 독을 만들고 유약을 칠하고 불을 땔 때도 항상 아버지 옆에 붙어 있었다. 위의 두 아들에게는 시키지 않은 일을 아버지는 항상 막내에게 맡겼다. 정 씨는 방학 때만 잠깐 얼굴을 내미는 두 형과 달리 거의 매일 아버지의 잔심부름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어려서부터 체구가 건장한 탓에 흙을 나르는 일이나 무거운 독을 옮기는 일이 그리 버겁지도 않았다.
‘서당 개 3년이면 글을 읽는다’고 했던가. 아버지 일을 거들면서 자연스럽게 흙 만지는 일을 배워갔다. 아버지가 정식으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깨 너머 배운 것으로 옹기며 생활 소품들을 만들었다.
그는 처음 자신이 옹기장이 된 것이 군을 제대한 1993년 이후라고 했다. 하지만 학생시절 만들었다는 옹기 흉상 소조는 흙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기량이 배어 있다. 그는 청소년 시절 이미 훌륭한 옹기장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옹기를 만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옹기를 만드는 사실조차도 숨기려 했다. 단지 아버지를 돕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돕는 일개 건아꾼이고자 했다. 그리고 지금도 아버지와 일할 때는 옹기장이 아니라 건아꾼인 것이다.
직업의 귀천을 갈라놓은 ‘청자의 곡선’과 ‘비색의 신비’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건아꾼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더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엔 그의 개인사와 가족사, 옹기와 도자기의 고향인 강진의 역사가 남긴 그늘이 있다.
요즘 강진은 청자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2번 국도를 타고 영암을 거쳐 이 고을로 들어서면 도로변 1백여m 산비탈의 숲을 통째로 깎아 만든 매병문양을 만날 수 있는데, 이는 강진사람들의 청자에 대한 자부심을 위압적으로 표현한 상징물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도요지 가운데 절반이 이곳 강진에 있었다고 하니 미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강진은 원래 옹기의 고장이다. 고려청자의 맥은 이미 끊긴 지 오래여서 1970년대 이전에는 관심도 끌지 못했다. 대신 이 지방의 좋은 흙은 명품 옹기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역사를 알기 어려울 만큼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옹기를 했다. 정영균 씨의 칠량봉황 마을은 수십 가구의 주민 전체가 옹기로 먹고 살았다. 옹기를 만들거나 옹기를 배로 실어 나르거나 파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일이었다.
봉황마을은 강진 읍내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남으로 가다 칠량면 경계를 넘어서 샛길로 좌회전 한 번, 우회전 두 번을 해야 들어설 수 있는 탐진만(灣) 바닷가. 육지를 쐐기처럼 파고 든 탐진만은 그 입구를 완도와 고금도, 신지도 등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거대한 호수처럼 물결이 잔잔하고 평화롭다. 그 바다는 들물 때 수면이 해안도로의 턱까지 차오른다. 그 바다를 통해 칠량의 옹기는 전라남도 전역으로 또 제주도로, 멀리는 서울까지 팔려나갔다. 마을 전체가 옹기로 흥청대던 것이 70년대까지다.
그러나 이 고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너무도 순식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플라스틱과 아파트는 옹기의 설자리를 휩쓸어 갔다. 수요가 격감하면서 마을은 황폐해졌다. 단지를 실어 나르던 돛단배는 자취를 감췄고 연기를 뿜던 가마들은 무너져 내렸다.
이 시기 강진에는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서해안에 청자 보물선이 발견되고, 강진의 고려 가마터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자 박정희 정부가 청자 복원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이다. 이웃 마량면의 현재 청자박물관에 청자 도요지가 복원되고 청자를 복원하는 도예가도 대거 탄생했다. 이 사업에 정치적 색채가 짙게 깔리면서 청자 복원지 공사 인부를 하다 연줄을 대어 도예가가 된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상황이 변하자 옹기를 하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도자기로 방향을 바꿨다. 수 백 년 이어온 이 지방의 특산품을 만드는 일은 이제 천한 ‘장이’의 일이 됐다. 대신 천여 년 전에 쓰다가 사라진 역사적 복제품을 만드는 것은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고귀한 예술작업이 됐다. 세상인심은 그렇게 변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변신의 재주가 없었다. 결국 강진에서 그 천한 일을 끝까지 놓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됐다. 덕분에 설움도 많이 겪었다. 그도 겪었고 그의 아들까지 상처를 받았다.
“생각해 보세요. 제 키만한 큰 독을 만드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손바닥만한 조그만 그릇을 만드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그런데도 쉬운 일하는 사람은 귀해지고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은 천해지니 기가 막히는 일 아닙니까.”
정영균 씨는 사람들이 말하는 ‘청자의 곡선’과 ‘비색의 신비’가 직업의 귀천을 갈라놓는 정치적 수사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해도 그릇 형태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새파란 젊은 친구가 청자를 한다고 거드름을 피우며 수십 년 경력의 장인인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도예에 대해 가르치겠다는 모습을 보며 자란 그는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 그리고 그를 더욱 답답하게 한 것은 그런 상황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자세였다.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그것에 대항 못하는 아버지를 보며 그는 반항과 방황으로 사춘기를 보냈다. 특히 고교 시절 진로를 잡지 못하고 ‘문제아’가 됐다. 강진에서 두 곳의 고등학교를 오며 가며 했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죽어라 일해도 대접을 못 받는 그런 삶은 싫었다. 신체가 건장해 주먹 세계에서도 유혹과 압력이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막살고 싶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의 방황이 끝난 것은 군대를 마치고였다. 아무리 싫다고 발버둥 쳐도 그는 타고난 옹기장이였다. 옹기를 버리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 제가 가업을 이어가겠습니다.”
어렵사리 말을 꺼낸 그는 아버지의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같이 옹기를 하려면 하지 마라. 옹기를 하려거든 제대로 해라.”
그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시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능력보다 학력이 인정받는 세상에 대한 한이자 서러움이었다.
그는 아버지 말대로 제대로 된 옹기 공부를 해야겠다고 맘먹었다. 그러나 기술적으론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학계에 있다는 사람들은 정 씨의 뛰어난 기량을 인정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부 못한 장이’이라며 배척했다.
결국 그는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 밑에서 건아꾼 일을 하면서 어깨 넘어 배운 것을 응용해 흙을, 유약을 그리고 불길을 연구했다. 이천에서 3년간 자신의 공방을 운영하면서 아버지에게서 배우지 않은 자기 공부를 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누구의 비법을 전수받는 게 아니라 그만의 비법을 만들어갔다.
옹기는 반드시 산에서 파온 흙으로 빚어야 한다는 생각도 버렸다. 스스로 산에서, 개펄에서 흙을 가져와 그 흙으로 그릇을 빚고 유약을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흙은 그의 작품의 재료가 되었다. 그의 집 창고엔 수십, 수백 가지 흙과 유약을 만들 재료가 쌓였다. 덕분에 청자만 고집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도예가로 평판을 얻게 됐다. 청자 도예가보다 비색을 잘 내고 더 우아한 곡선을 빚는 옹기장이로 명성이 났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묵묵히 해온 허드렛일이 원천이 되었다. 기본에 충실했던 것이 새로운 응용의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지금도 스스로를 건아꾼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기존의 틀을 깨고 자기와 옹기를 접목시키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청자를 빚는 도예가보다 독과 시루를 빚는 옹기장이가 더 귀해지고 있다. 옹기 가격도 만만치 않다. 물론 시중에 싸구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제품은 옹기가 아니다. 옹기처럼 생긴 수입품은 재료부터 제작과정까지 다르다. 당연히 ‘웰빙 저장고’라는 한국 옹기의 기능을 갖추지 못한다. 대신 뼈대 있는 옹장이 제대로 만든 옹기는 수십 만 원은 너끈히 나갈 만큼 비싸졌다.
강진에 도예 작업장은 널렸지만 옹기 동막은 정영균 씨의 칠량봉황 옹기가 유일하다. 그는 수백 년 동안 명맥이 끊어졌던 강진 청자의 전통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것이 없다고 한다. 대신 그 이상의 세월을 이어온 강진 옹기의 전통은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다.
그는 요즘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자기와 옹기를 넘나들며 그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고 있다. 땅 생김새가 봉황이 날개를 편 형국이라는 칠량면 봉황마을 바닷가가 그의 작업실이자 일터다. 담벼락에는 거대한 독들이 줄을 섰다. 형태도 유약도 새로운 것들이다.
요즘은 지름 2m에 가까운 거대한 수조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작업을 하던 그는 강진 옹기의 전통을 이어가는 옹기장이요, 그 작업을 위해 허드렛일도 마다 않는 건아꾼이란 생각이 우선이다.
청자는 강진의 자랑이다. 그러나 수백 년 끊긴 역사의 맥을 인위적으로 이어 붙인 청자가 우리세대의 예술에, 생활에 얼마나 적응했을까. 과연 문화재 복제품 이상의 어떤 의미를 확보하고 있을까. 하지만 청자의 맥이 끊겼던 수백 년 동안에도 옹기는 여전히 우리 생활 속에 스며들어 삶의 일부로 진화해왔다. 그 옹기장의 유일한 적손이 된 정영균 씨야말로 강진 문화의 살아 있는 전통이자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는 멋진 신세대 옹기장이이다.
필자 소개
최미현: 생활도예가(blog.naver.com/mimiscraft).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작업실 클레이인플레이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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