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동 266번지, 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현장> 25년간 주민등록 말소당한 채 살아온 포이동 사람들
‘타워팰리스 아래 판자촌’으로 알려진 서울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적어도 주민등록상으로는 단 한 사람도 이곳을 주소로 살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곳에는 한파가 매서웠던 지난 겨울 한 차례의 행정대집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98가구 360여명의 주민들이 작은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서 26년째 살아온 ‘포이동 266번지 사수대책위원회’ 조철순 위원장(47)은 가끔씩 스스로를 ‘유령’이라 자조한다. 지난 1981년 이후 줄곧 이곳에서 폐품을 수거하고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어렵게 살아왔지만 조씨를 비롯한 주민들의 주민등록증에는 ‘포이동 200-1번지’라는 지금은 사라진 주소만이 새겨져있을 뿐이다.
포이동 200-1번지는 이들의 또 다른 고향이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극에 달하던 1979년 정부는 전쟁고아와 부랑자, 도시빈민을 위한 일방적인 정착계획을 수립한다.
이른바 ‘자활근로대’. 당시 정권은 주로 수도권에 집중됐던 이들을 모아 자활근로대를 조직, 서울 서초동 정보사령부 뒷산에 마련한 수용시설로 강제이주시켰다.
‘자활근로대’, 국가에 의한 일방적인 강제이주
하지만 뒷산에 수용된 주민들과 이미 터를 잡고 살던 앞마을 주민들 간의 반목이 심해지고 민원이 쇄도하자 1981년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포이동을 비롯한 10곳에 분산 수용했다.
강제이주를 거부하던 몇몇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고 폭력적인 경험을 겪은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지금의 포이동 266번지, 당시 200-1번지인 이곳으로 쫓기듯 내려왔다.
당시 포이동 200-1번지는 한 마디로 허허벌판. 길도 없었고 전기와 수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하천부지에다 그나마 맞닿은 양재천과의 높이 차이는 거의 없어 비가 오면 이곳저곳에서 연탄재를 가져다 벽을 쌓아야 선 잠이라도 이룰 수 있는 버려진 땅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도시로 상경해 이곳까지 밀려 온 조철순 위원장의 말을 빌리자면 “조건들을 따져가면서 살아갈 겨를”은 없었다.
주민들은 주로 폐품을 수거하는 일로 생계를 꾸렸고 건설 호황이 이어질 땐 일용직 노동자로, 식당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자활근로대를 만든 정부는 강남경찰서 소속 형사들을 지도감독관으로 파견해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일상적인 경제활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 고물을 주워 와도 감독관들에 의해 일정 부분의 생활비만을 얻어 살아가야했다.
지도감독관의 통제는 나날이 심해져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릴 당시에는 ‘미관상’ 안 좋다는 이유로 외출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조씨에 따르면 대회가 열리는 일주일 내내 낮시간 동안 지도감독관들이 마을 입구를 막아섰다.
주민들은 밤이 돼서야 밤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걸어나와 양재동 재래시장에서 생필품을 사거나 혹은 주워와서 겨우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정부는 10년 가까이 이들을 옥죄던 자활근로대를 강제로 해체시키고 이들에게 포이동 200-1번지에서 나가라며 사실상 강제퇴거를 요구했다.
포이동 200-1번지,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감독관의 착취 아래 평생 폐품을 모아 근근이 살아온 그들에게 포이동이 아닌 다른 곳으로의 이주는 결코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갔던 사람들도 얼마 못 버티고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정부는 1989년 택지개발을 이유로 개포동 일대의 토지구획을 정리하면서 포이동 200-1번지를 포이동 266번지로 바꾸고는 주민들의 주민등록을 등재시켜주지 않았다. 졸지에 주민들은 주민등록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주소를 갖고 살아가는 사실상의 주민등록 말소자가 되어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자유로운 전.출입을 허용했던 구청과 동사무소는 자활근로대의 해체, 토지구획정리와 동시에 10년 가까이 살아온 그들의 주민등록을 빼앗아버렸다.
정부의 탄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강남구청은 90년부터 주민들을 무단점유자로 몰아 매해 토지변상금을 부과했다. 첫 해 30여만원이었던 변상금은 토지무단 점유에 따른 벌금과 그간의 토지사용료를 더해 이제는 주민 1인당 5천만원, 총액 1백60억원에 달하고 있다.
2004년 6월, 뉴스조차 되지 못했던 포이동 한 넝마주이의 죽음은 이곳 판자촌의 한 골방에서 토지변상금과 재산 가압류에 따른 절망을 이겨내지 못한 서글픈 죽음이었다.
주민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25년간 ‘포이동 200-1번지’로 어김없이 날아드는 주민세와 15년간 계속되는 ‘포이동 266번지’ 무단점유에 따른 토지변상금 사이의 간극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주민등록상 존재하지 않는 200-1번지의 주민세와 25년간 인정받지 못하던 266번지의 무단점유로 부과되는 수천만원의 토지변상금은 포이동 주민들의 수난사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25년간 불법과 합법에 ‘걸친’ 삶을 살아온 셈이다.
차분하게 포이동 25년 주민사를 되짚어준 조씨는 덤덤한 말투로 구청과 주민과의 반목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전과’를 ‘고백’했다.
“답답한 마음에 강남구청 앞에서 항의집회를 갖고 구청장 면담을 요구하기 위해 구청 안으로 들어갔죠. 단지 면담을 요구한 것 뿐인데 구청은 주민들을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경찰에 고발했어요. 제가 지금 전과 2범이에요. 특수공무집행방해죄...면담을 요청한 게...”
“법대로, 원칙대로” 포이동 주민사 외면하는 강남구청
강남구청은 그들을 주민등록에서 말소시킨 이후 십수년간 일관되게 강제퇴거를 경고하고 토지변상금 미납에 따른 재산 가압류 조치만을 취하고 있다.
강남구청 측은 “주민들이 주장하는 81년 상황에 대한 자료와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정해진 법대로 행정정차를 밟는 것”이라며 25년 포이동 주민사를 외면할 뿐,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강남구청 도시계획과 관계자는 “공무집행을 하는 공무원으로서 지방재정법에 의해 징수할 수 밖에 없고 오랜 기간 변상금을 안내는 상황에서 재산 압류는 당연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관계자가 구청 도시계획과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말경이었다.
강남구청 세무과 관계자는 “주민등록상 등재가 안되도 사실상 거주가 인정되면 주민세는 부과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떤 법적근거로 이제는 사라진 200-1번지에 주민세가 부과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강남구청 자치행정과 관계자는 “과거 포이동 200-1번지는 구획정리에 따른 체비지이기 때문에 주민등록상 등재가 안된다”고 말했다. 역시 이 관계자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기자의 질문에 “민감한 부분이라 더 이상 답해줄 수 없다”고 말할 뿐이었다.
강남구청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도 말했다.
“우리로서는 주민들을 위한 어떤 대책도 내놓을 수 없다. 대안을 제시할만한 뚜렷한 법적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로서는 주민들이 나가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
“몇몇 분들이 그곳 주민들을 선동하고 있다. 앞에 나서는 주민들은 대부분 웬만큼 사는 사람들이다”
주민들 “보상? 관심없다. 과거 국가폭력 규명 통해 터전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강제철거에 따른 보상금이나 가이주 조성단지처럼 흔하디 흔한 철거민의 요구가 아니다.
정부에 의한 강제이주를 반복하며 어렵게 터를 잡은 포이동 266번지를 그들의 땅으로 되돌려달라는 것 외에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없다. 더불어 79년부터 이뤄진 강제이주사 규명을 통해 주거권과 생존권을 인정받고 싶을 뿐이다.
이를 위해 15년간 잃어버린 주민등록을 회복시켜주고 포이동 주민들의 삶을 유린하는 수천만원대의 토지변상금 청구를 철회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포이동 주민들에게는 연대의 손길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빈곤문제에 천착해 온 희망사회당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 빈민사회연대, 사람연대, 민주노총, 인권운동사랑방 등 시민사회단체가 조직적으로 그들을 돕고 있다.
이들은 29일 강남구청 앞에서 주민들과 공동으로 ‘포이동 266번지 강제이주 진상규명과 빼앗긴 주민등록 회복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정부, 서울시, 강남구가 강요한 빈곤과 그 대물림을 끊고 사람답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며 ▲포이동 266번지 주민 강제이주 진상규명 ▲주민등록 반환 및 토지변상금 철회를 촉구했다.
주민들은 이제 더 이상의 외로운 싸움을 접고, 주민등록 반환과 토지변상금 철회라는 생존권이 걸린 요구사항을 넘어 70~80년대 유신정권에 의해 자행된 국가폭력을 이야기한다.
‘타워팰리스 아래 판자촌’이라는 빈부 대비를 넘어서 포이동 25년사에 점철된 반인권적인 국가폭력의 규명을 통해 그들의 빼앗긴 주민권과 생존권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결정으로 포이동에 정착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우리를 억지로 끌고 이곳에 데려와 지금까지 살았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무단점유자로 몰고 벌금을 물리고 내쫓으려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연히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포이동 주민들과 연대단체들은 오는 6월 16일 포이동 266번지에서 투쟁기금 마련 후원의 밤을 연다. 이날 모인 기금은 주민들의 투쟁기금으로 쓰이고 동시에 언론을 통해 알려진 희귀병 소년 ‘포이동 형준이’의 치료비로 보태진다.
언제 다시 강제철거가 이뤄질 지 알 길 없는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포이동 266번지의 주민들은 국가폭력에 유린된 과거의 삶을 딛고 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한파가 매서웠던 지난 겨울 한 차례의 행정대집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98가구 360여명의 주민들이 작은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서 26년째 살아온 ‘포이동 266번지 사수대책위원회’ 조철순 위원장(47)은 가끔씩 스스로를 ‘유령’이라 자조한다. 지난 1981년 이후 줄곧 이곳에서 폐품을 수거하고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어렵게 살아왔지만 조씨를 비롯한 주민들의 주민등록증에는 ‘포이동 200-1번지’라는 지금은 사라진 주소만이 새겨져있을 뿐이다.
포이동 200-1번지는 이들의 또 다른 고향이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극에 달하던 1979년 정부는 전쟁고아와 부랑자, 도시빈민을 위한 일방적인 정착계획을 수립한다.
이른바 ‘자활근로대’. 당시 정권은 주로 수도권에 집중됐던 이들을 모아 자활근로대를 조직, 서울 서초동 정보사령부 뒷산에 마련한 수용시설로 강제이주시켰다.
‘자활근로대’, 국가에 의한 일방적인 강제이주
하지만 뒷산에 수용된 주민들과 이미 터를 잡고 살던 앞마을 주민들 간의 반목이 심해지고 민원이 쇄도하자 1981년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포이동을 비롯한 10곳에 분산 수용했다.
강제이주를 거부하던 몇몇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고 폭력적인 경험을 겪은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지금의 포이동 266번지, 당시 200-1번지인 이곳으로 쫓기듯 내려왔다.
당시 포이동 200-1번지는 한 마디로 허허벌판. 길도 없었고 전기와 수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하천부지에다 그나마 맞닿은 양재천과의 높이 차이는 거의 없어 비가 오면 이곳저곳에서 연탄재를 가져다 벽을 쌓아야 선 잠이라도 이룰 수 있는 버려진 땅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도시로 상경해 이곳까지 밀려 온 조철순 위원장의 말을 빌리자면 “조건들을 따져가면서 살아갈 겨를”은 없었다.
주민들은 주로 폐품을 수거하는 일로 생계를 꾸렸고 건설 호황이 이어질 땐 일용직 노동자로, 식당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자활근로대를 만든 정부는 강남경찰서 소속 형사들을 지도감독관으로 파견해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일상적인 경제활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 고물을 주워 와도 감독관들에 의해 일정 부분의 생활비만을 얻어 살아가야했다.
지도감독관의 통제는 나날이 심해져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릴 당시에는 ‘미관상’ 안 좋다는 이유로 외출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조씨에 따르면 대회가 열리는 일주일 내내 낮시간 동안 지도감독관들이 마을 입구를 막아섰다.
주민들은 밤이 돼서야 밤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걸어나와 양재동 재래시장에서 생필품을 사거나 혹은 주워와서 겨우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정부는 10년 가까이 이들을 옥죄던 자활근로대를 강제로 해체시키고 이들에게 포이동 200-1번지에서 나가라며 사실상 강제퇴거를 요구했다.
포이동 200-1번지,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감독관의 착취 아래 평생 폐품을 모아 근근이 살아온 그들에게 포이동이 아닌 다른 곳으로의 이주는 결코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갔던 사람들도 얼마 못 버티고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정부는 1989년 택지개발을 이유로 개포동 일대의 토지구획을 정리하면서 포이동 200-1번지를 포이동 266번지로 바꾸고는 주민들의 주민등록을 등재시켜주지 않았다. 졸지에 주민들은 주민등록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주소를 갖고 살아가는 사실상의 주민등록 말소자가 되어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자유로운 전.출입을 허용했던 구청과 동사무소는 자활근로대의 해체, 토지구획정리와 동시에 10년 가까이 살아온 그들의 주민등록을 빼앗아버렸다.
정부의 탄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강남구청은 90년부터 주민들을 무단점유자로 몰아 매해 토지변상금을 부과했다. 첫 해 30여만원이었던 변상금은 토지무단 점유에 따른 벌금과 그간의 토지사용료를 더해 이제는 주민 1인당 5천만원, 총액 1백60억원에 달하고 있다.
2004년 6월, 뉴스조차 되지 못했던 포이동 한 넝마주이의 죽음은 이곳 판자촌의 한 골방에서 토지변상금과 재산 가압류에 따른 절망을 이겨내지 못한 서글픈 죽음이었다.
주민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25년간 ‘포이동 200-1번지’로 어김없이 날아드는 주민세와 15년간 계속되는 ‘포이동 266번지’ 무단점유에 따른 토지변상금 사이의 간극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주민등록상 존재하지 않는 200-1번지의 주민세와 25년간 인정받지 못하던 266번지의 무단점유로 부과되는 수천만원의 토지변상금은 포이동 주민들의 수난사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25년간 불법과 합법에 ‘걸친’ 삶을 살아온 셈이다.
차분하게 포이동 25년 주민사를 되짚어준 조씨는 덤덤한 말투로 구청과 주민과의 반목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전과’를 ‘고백’했다.
“답답한 마음에 강남구청 앞에서 항의집회를 갖고 구청장 면담을 요구하기 위해 구청 안으로 들어갔죠. 단지 면담을 요구한 것 뿐인데 구청은 주민들을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경찰에 고발했어요. 제가 지금 전과 2범이에요. 특수공무집행방해죄...면담을 요청한 게...”
“법대로, 원칙대로” 포이동 주민사 외면하는 강남구청
강남구청은 그들을 주민등록에서 말소시킨 이후 십수년간 일관되게 강제퇴거를 경고하고 토지변상금 미납에 따른 재산 가압류 조치만을 취하고 있다.
강남구청 측은 “주민들이 주장하는 81년 상황에 대한 자료와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정해진 법대로 행정정차를 밟는 것”이라며 25년 포이동 주민사를 외면할 뿐,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강남구청 도시계획과 관계자는 “공무집행을 하는 공무원으로서 지방재정법에 의해 징수할 수 밖에 없고 오랜 기간 변상금을 안내는 상황에서 재산 압류는 당연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관계자가 구청 도시계획과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말경이었다.
강남구청 세무과 관계자는 “주민등록상 등재가 안되도 사실상 거주가 인정되면 주민세는 부과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떤 법적근거로 이제는 사라진 200-1번지에 주민세가 부과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강남구청 자치행정과 관계자는 “과거 포이동 200-1번지는 구획정리에 따른 체비지이기 때문에 주민등록상 등재가 안된다”고 말했다. 역시 이 관계자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기자의 질문에 “민감한 부분이라 더 이상 답해줄 수 없다”고 말할 뿐이었다.
강남구청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도 말했다.
“우리로서는 주민들을 위한 어떤 대책도 내놓을 수 없다. 대안을 제시할만한 뚜렷한 법적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로서는 주민들이 나가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
“몇몇 분들이 그곳 주민들을 선동하고 있다. 앞에 나서는 주민들은 대부분 웬만큼 사는 사람들이다”
주민들 “보상? 관심없다. 과거 국가폭력 규명 통해 터전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강제철거에 따른 보상금이나 가이주 조성단지처럼 흔하디 흔한 철거민의 요구가 아니다.
정부에 의한 강제이주를 반복하며 어렵게 터를 잡은 포이동 266번지를 그들의 땅으로 되돌려달라는 것 외에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없다. 더불어 79년부터 이뤄진 강제이주사 규명을 통해 주거권과 생존권을 인정받고 싶을 뿐이다.
이를 위해 15년간 잃어버린 주민등록을 회복시켜주고 포이동 주민들의 삶을 유린하는 수천만원대의 토지변상금 청구를 철회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포이동 주민들에게는 연대의 손길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빈곤문제에 천착해 온 희망사회당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 빈민사회연대, 사람연대, 민주노총, 인권운동사랑방 등 시민사회단체가 조직적으로 그들을 돕고 있다.
이들은 29일 강남구청 앞에서 주민들과 공동으로 ‘포이동 266번지 강제이주 진상규명과 빼앗긴 주민등록 회복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정부, 서울시, 강남구가 강요한 빈곤과 그 대물림을 끊고 사람답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며 ▲포이동 266번지 주민 강제이주 진상규명 ▲주민등록 반환 및 토지변상금 철회를 촉구했다.
주민들은 이제 더 이상의 외로운 싸움을 접고, 주민등록 반환과 토지변상금 철회라는 생존권이 걸린 요구사항을 넘어 70~80년대 유신정권에 의해 자행된 국가폭력을 이야기한다.
‘타워팰리스 아래 판자촌’이라는 빈부 대비를 넘어서 포이동 25년사에 점철된 반인권적인 국가폭력의 규명을 통해 그들의 빼앗긴 주민권과 생존권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결정으로 포이동에 정착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우리를 억지로 끌고 이곳에 데려와 지금까지 살았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무단점유자로 몰고 벌금을 물리고 내쫓으려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연히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포이동 주민들과 연대단체들은 오는 6월 16일 포이동 266번지에서 투쟁기금 마련 후원의 밤을 연다. 이날 모인 기금은 주민들의 투쟁기금으로 쓰이고 동시에 언론을 통해 알려진 희귀병 소년 ‘포이동 형준이’의 치료비로 보태진다.
언제 다시 강제철거가 이뤄질 지 알 길 없는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포이동 266번지의 주민들은 국가폭력에 유린된 과거의 삶을 딛고 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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