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에 세계 최고잡지 아트디렉터 2인자 되다!
[한국의 뉴파워]<3> 모니카 윤의 '뉴욕 돌파기'
윤은경, 미국명 Monica Yoon(이후 모니카), 나이 26세. 뉴욕 최고의 잡지 그룹 NEW YORK HOME 매거진 컴퍼니에서 <NEW YORK HOME>과 <ABSOLUTE> 2개의 잡지를 관할하는 Associated Art Director이다. 쉽게 말해 26세의 어린 나이에 세계 최고의 잡지 그룹의 아트 디렉터 2인자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뉴욕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냉엄한 세계이다. 모든 이들에게 문은 열려 있지만 그만큼 경쟁도 심하고 두각을 나타내기란 더더욱 힘든 곳이다. 게다가 회사의 경영 상태에 따라 언제든 해고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올해만 해도 <보그Vogue>, <지큐GQ>, <얼루어Allure> 등 세계 최고 인기 매거진을 가지고 있는 거대 매거진 컴퍼니 Conde Nast가 2천 명이나 되는 직원을 잘랐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 정도이다.
이런 경쟁 사회 속에서 미국 시민권도 없고 이민자도 아닌 유학 10년차 풋내기가 대형사고(?)를 쳤다. 빵빵한 경력자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그 유명 잡지사의 아트 디렉터 자리에 당당하게 오른 것이다.
외로운 외국 생활이 오히려 자신을 다지는 계기가 되다
윤은경은 소위 조기유학 1세대인 80년대 생이다. 요즈음이야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아들, 딸들을 조기유학 보내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조기유학이 보편화되지는 않았었다. 그녀 역시 조기 유학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같은 반 친구들이 하나 둘 조기 유학을 떠나자 자기도 모를 마음속 뭔가가 외국 유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때마침 부모님은 남동생에게 조기 유학을 권했고, 동생은 싫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모님에게 유학을 가고 싶다고,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다. 그때 나이 열여섯,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녀의 외국 유학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외국 출장이 잦은 아버지가 세계 곳곳에서 사오는 작고 신기한 선물들을 보면서 과연 ‘바깥세상’이란 곳은 어떤 곳일까 하는 호기심을 가졌고, 미지의 세계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약간의 모험심이 더해져 겁 없이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호기심 반 모험심 반으로 시작한 유학 생활은 생각했던 것처럼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간 곳은 캐나다 밴쿠버에서도 쑥 들어간 시골에 위치한 여자 사립학교. 랭귀지 코스를 거치지 않는 대신 학년을 하나 낮추어 들어갔지만 모든 것이 벅차기만 했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아 수업 자체가 버거웠다. 게다가 승마, 필드하키 등 한국에서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수업들이 그녀를 주눅 들게 했다. 채플 수업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마치 외계에 혼자 뚝 떨어진 것 같은, 넘지 못할 높은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물설고 낯선 외로운 외국 생활은 철저하게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때까지 부모의 보호 속에서 살았던 소녀가 모든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에 옮겨야 하는 어른이 되어야 했다.
다행히 그녀는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차피 어렵게 온 유학이니 외롭다고 투정부리거나 중도에 하차할 수는 없었다. 깨질 때 깨지더라도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부모님이나 친구들을 그리워할 겨를도 없었다.
캐나다에서의 유학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사춘기 고등학생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심각한 문제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말로만 듣던 ‘왕따’라는 것을 당하게 되었다. 그것도 캐나다 친구들이 아닌 다음해 우르르 유학 온 한국 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그들은 대놓고 욕하거나 해코지하지는 않았지만,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말도 걸지 않았다. 이유인 즉 그녀가 노력도 안하는 것 같은데 성적도 좋고, 집안도 좋아 보여 그렇다는 거였다. 지금이야 아이들의 질투쯤으로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겠지만, 사춘기 소녀에게는 커다란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그리고 그 상처는 꽤 오래 가서 한국 친구들을 약간 꺼리게 되었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버릇이 생겼다.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유학 생활은 그녀를 유약한 소녀에서 독립된 인격체로 커가는 데 더없이 좋은 장이 되었다. 만약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캐나다에서처럼 공부를 잘하지 못했을 것 같다고 한다. 온실 속 화초 같았던 한국에서의 생활과는 너무나 다르게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부딪쳐서 헤쳐 나가야 하고, 외국인이라서 불이익을 당할 때마다 못하는 영어지만 대차게 덤벼서 이겨내야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절대 지지 않겠다는 신념이 생기게 되었단다.
뭐든지 열심히 하려는 그녀의 모습은 선생님들에게도 인상적이었던지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 그 덕에 더 신이 나서 수학이건 체육이건 열심히 했고 성적도 잘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단어 몇 개로도 이해가 가능한 수학은 영어를 전혀 못하던 처음부터 잘할 수 있어서 처음 본 수학 경시대회에서 캐나다 전체에서 1% 안에 들고, British Columbia 주에서는 1등을 해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일단 고교 성적이 좋다 보니 대학 입학은 별 문제되지 않았다. 좋은 대학들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을 수 있었는데, 딱히 가고 싶은 과도 없고 해서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가는 캐나다 최고 대학인 University of Toronto의 메디컬 스쿨 예과 과정인 Life Science에 입학했다. 단지 ‘최고 대학’이라는 이유만으로 입학했다.
맹목적인 의과대학 선택, 혹독한 대가를 치르다
하지만 이렇게 고민 안한 대가는 입학 후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열심히만 하면 최고의 성적을 얻을 수 있었지만, 캐나다 최고 영재들만 모아놓은 의대는 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쓰라린 좌절을 맛보았다.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피나는 노력을 하는 반 친구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아무런 신념 없이 입학한 자신이 한심했고, 이렇게 지독한 수련을 거쳐 얻는 의사라는 직업이 과연 맞는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사춘기 때도 안하던 방황은 어디까지 그녀를 끌어내릴지 알 수 없었고, 급기야 언제나 딸에 대한 후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던 부모님조차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우연치 않게 교양 수업으로 선택한 Life drawing을 듣는 동안, “아! 이거다” 싶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미술에 대한 흥미가 새롭게 솟아올랐다. 그제야 자신이 미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게 되었다.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미술 선생님과 어머니의 말을 귓가로 흘려들었는데, 마치 처음 미술을 대하는 사람처럼 아름다운 선과 색채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레 흥분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고민이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원인은 알았으나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해 여전히 고민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미국 유학 후 한국에서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이모를 만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처럼 대해주고, 힘들어할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던 이모와의 만남은 단순히 이모와 조카의 만남은 아니었다. 그녀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되는 아주 중요한 만남이 되었다.
그녀는 부모에게도 하기 힘든 속마음을 이모에게 털어놓았고, 그녀의 고민을 들은 이모는 아주 엉뚱한 제안을 했다. “너, 그렇게 그림이 좋으면 미술 학교로 옮겨 보면 어떠니?”
남들이 들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제까지 단단하게 묶여 있던 생각의 틀에서 빠져나오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이모는 어떤 뜻으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너무 신선한, 너무나 반가운 햇살 같았다.
그때까지 고민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모니카는 ‘그래. 뭐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 하는 배짱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교들이 봄 학기 마감을 했고, 마지막 남은 곳은 뉴욕의 파슨즈뿐이었다. 그녀가 갈 수 있는 유일한 대학인 셈이다. 선택의 여지없이 곧바로 지원서를 제출했다. 너무 급작스런 결정이라 부모님의 걱정이 대단했다. 다니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신중하게 정해도 늦지 않다고 만류하셨다.
하지만 운명은 절실히 원하는 자의 편인 듯, 한 달 만에 만든 포트폴리오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녀는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었고,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그때가 의대 2학년이었다. 고민과 방황을 끝내고 새로 시작될 뉴욕 생활을 위해 짐 보따리를 쌌다.
열정과 토론으로 자신만의 예술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다
같은 외국 생활인데도 뉴욕은 토론토에서의 생활과는 180도로 달라졌다. 도착한 첫날부터 시끌벅적 해괴망측한 옷차림의 외국 아이들이 기숙사 방으로 몰려들었다. 룸메이트도 아닌 아이들이 내 방을 떡하니 차지하고 떠들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고, 예술에 미친 애들인지라 자기 고집을 절대 꺾지 않아 공동 프로젝트를 할 때는 내가 옳다 네가 옳다 다투기 일쑤였다. 이렇게 정신없는 나날이었지만, 다투고 토론하면서 일상 대화에 머물러 있던 영어가 눈에 띄게 수준이 높아졌고, 그녀만의 예술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기틀을 세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기였다. 혼자서 책과 씨름했던 이전 학교에 비해, 열정에 가득 찬 희한하면서도 단순한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점점 고정관념에 갇혀 있던 가치관과 열정을 자유롭게 풀어 놓을 수 있었다.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와 아트가 얼마나 더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공을 정할 때, 다른 아이들보다 오히려 쉽게 Communication Design으로 정할 수 있었다. 만일 남들처럼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미술학교에 진학했더라면 예술의 꽃인 파인 아트를 하겠다고 쉽게 손들었겠지만, 치열한 고민의 시간을 겪은 후라 그런지 자신이 어디에 더 재능이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가지각색의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자 한다면 최적의 장소는 뉴욕 아트스쿨이 아닐까? 모니카 또한 이곳에서 아주 색다른 사람들은 만나며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꺼려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그들은 아주 반짝이는 재능을 가진 그냥 사람이었다. 그 친구들은 사람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고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열정을 느끼게 해준, 지금도 소중한 친구들이다. 학교에서 만난 재미있는 친구들은 졸업 후 패션계의 떠오르는 신인 디자이너로, 히트송을 연달아 내며 인기 차트에 오른 홍콩의 신인가수로, 그래픽 디자이너로 다들 힘껏 도약하고 있다. 국적도 인종도 다른데도,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는 공통분모 하나로 서로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가족보다 더 깊어 외로운 유학 생활을 따뜻하게 감싸준 좋은 친구들이었다.
‘늦게 시작한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그녀의 행보는 빨라졌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의사의 길을 버리고 어렵게 돌아서 온 길인만큼 밤잠도 거르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작품을 만들었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졸업 작품 전시회에서 그녀의 작품이 Senior Thesis에서 가장 중앙에 전시되는 행운을 얻었다. 당연히 참석한 아트 관계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고, 이때 뜻하지 않게 작품으로 만든 책을 프린트 맡긴 회사에서 제의가 왔다. 그 회사는 다름 아닌,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프린팅회사인 도판(Toppan)으로, XEROX에서 매년 열리는 PIXI(Printing Innovative Xerox International) Award에 공모해 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전문 그래픽 디자이너도 아닌 학생을 그것도 학예회 같은 졸업 작품으로 만든 것을 북미와 남미 통틀어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상대로 하는 어워드에 낸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경비를 자신들이 다 대겠다고 나서서 밑질 것 없다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 몇 달 후 1등 상인 Best of Show상을 탔다는 연락을 받았다. 시상식은 시카고에서 열렸는데, 그곳에 가 보고 어마어마한 규모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달이 지난 후에도 처음 보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알아봐서 정말 굉장한 상을 탔나 보다 생각했다고 한다.
어렵게 돌아왔지만 끝내 아메리칸 드림이 이루어지다
학비와 생활비는 집에서 보조를 받았으나, 용돈 정도는 벌어서 쓰고 싶어서 학교 다니는 내내 광고회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입은 썩 좋았지만, 광고 파트는 갈수록 흥미가 없어졌다. 오히려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종이로 만든 아날로그적인 잡지에 이상하게 더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만약 실제 경험이 없었다면 나의 적성이 무엇인지 더 늦게 알았을지 모른다.
졸업 즈음, 어떻게 잡지사에 들어갈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인터넷으로 구인하는 New York Home에 원서를 내보았다. 하지만 사실 거의 모든 나라의 잡지가 그렇겠지만, 그 나라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는 네이티브들을 상대로 뽑기 마련이니, 외국인 신분으로 풀타임 정규직을 잡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아닐까 싶어 아르바이트했던 광고회사에도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동안 유지했던 유학생 비자는 학교 졸업 후 1년 안에 정규직을 구하지 못하면 출국해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 직장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인터뷰 연락은 광고회사에 서 먼저 왔고, 그 다음날 그녀가 가고 싶어 하는 New York Home에서도 왔다. 마침 뉴욕을 베이스로 하는 럭셔리 라이프스타일의 고급 매거진 중에서 최정상의 잡지인 <Absolute>을 인수하면서 일이 많아져, 총괄 아트 디렉터와 함께 잡지들을 관할할 사람을 찾고 있던 차였다. 당연히 엄청난 경력의 아트 디자이너들이 인터뷰를 했을 텐데, 희한하게도 총괄 아트 디렉터는 신출내기인데다 비자 보증도 해줘야 하는 그녀를 뽑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훗날 모니카는 자신을 뽑은 이유를 그에게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이유는 아주 단순 명쾌했다. 우선 지원할 때 레쥬메와 함께 보낸 사진의 앵글과 색감이 아주 흥미로워 이 사람을 한 번 만나봐야겠다 싶었고, 면접 때 들고 온 포트폴리오와 졸업 작품인 책(나중에 XEROX의 PIXI Award에서 1등한 바로 그 작품)을 보고 ‘바로 이런 아트 감각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어서였단다.
그리고 모니카를 면접한 후 다음 주까지 풀로 잡혀 있는 면접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그 자리에서 취업을 약속했다. 바로 이것이 바로 학벌, 지연, 배경도 안 보고 단지 ‘실력’만으로 사람을 뽑는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현장이다. 전날 인터뷰한 광고회사와 비교해 절반밖에 안 되는 연봉이었지만 얼마나 바라던 일인가! 그리고 지금도 직함을 얘기하면 모두들 깜짝 놀라는데, 말 그대로 거대 잡지사의 아트 파트 넘버 투인 거다.
경험도 없는 신출내기를 뽑아놓고는 어찌 대할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시스템과 메이킹 과정을 설명해주고 몇 달의 적응기간이 지나자 <Absolute>의 아트 작업을 전적으로 그녀에게 맡겼다. 애송이라고 놀리거나 무시할 법도 한데 직원들 모두 단 한 번도 그런 내색하지 않고 모르는 것은 하나에서 열까지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레이아웃이나 사진 셀렉트, 커버 셀렉트 등에 이르기까지 매번 의견을 물으며 너의 감각이 정말 훌륭하다며 칭찬이 입에 붙었다. 까칠하고 까다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트 잡지 에디터들이 이렇듯 상냥하게 구는 건 아트 디렉터의 말처럼 모니카의 ‘센스’ 때문일 것이다. 절대적인 재능과 감각에 대한 경의와 존경, 하지만 조금이라도 뒤쳐진다 싶으면 가차 없이 내버리는 것이 뉴욕 아닌 전 세계 경쟁 사회의 생리 아니겠는가.
모니카의 꿈은 자신만의 잡지를 만드는 것이다. 대학생 때에도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 패션 잡지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는 등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거기다 뉴욕 최고의 감각적인 잡지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이든 한국이든 자신만의 색깔이 배어 있는 독특한 잡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물론 사회생활 2년차인 모니카, 그녀는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그녀의 꿈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고,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냈고, 좋아하는 일에 모든 열정을 바쳐 일하면서 무지 행복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이 부러워하는 일이 아닌,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에 모든 걸 올인할 수 있는 모니카. 그녀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필자 소개>
황정희
1970년생.
서울대 의류학과 졸업. 의상 디자이너를 거쳐 중앙일보 발행 <칼라>, <라벨르>, <쎄씨>, <더 스타일>의 패션 에디터를 거쳐 라이선스 잡지 <마리 끌레르>의 패션 디렉터로 5년간 근무.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1년간 연수. 현재 뉴욕 SVA에서 일러스트레이션 공부를 하면서 프리랜서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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